65화. 독배를 든 자 (3)
“저게 뭐지?”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잔은 안에 내용물이 들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네타는 에레즈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인상을 찌푸렸다.
“저기 보이는 두 개의 술잔 중에 하나는 독이 들었어. 너는 저기서 하나를 골라 마시면 돼.”
“……그래서 마시면?”
“독이 든 잔의 술을 마시면 모두 죽는 거고, 독이 없는 잔의 술을 마시면 두 사람은 살려 주는 거지.”
아네타는 에레즈가 말한 조건을 곱씹었다.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애초에 에레즈는 이 안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들의 납치를 지시한 장본인이었다. 아네타는 불신을 담은 눈으로 에레즈를 응시했다.
“두 잔 중 하나에만 독이 들어 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거지?”
“그걸 내가 왜 증명해야 해? 정 의심되면 하지 마. 난 손해 볼 거 없어. 다 같이 죽이면 그만인걸.”
이어지는 에레즈의 태도는 그러한 의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의 술수에 아네타는 헛숨을 터트렸다. 두 잔 모두 독이 든 잔임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살려 줄 생각이었다면 이리로 데리고 오지도, 또 그들의 앞에 대놓고 의뢰자라며 얼굴을 디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라도 살려 두면 분명 후환이 될 테니까.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신변을 걸고 도박을 할 멍청이는 이 세상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다른 종류의 멍청이였지만, 그의 말은 세르세와 크리스를 살리고 싶으면 네가 죽으라는 뜻이었다.
살려 줄 마음은 추호도 없으면서 제안이랍시고 자비라도 베푸는 양 떠들어 대는 모습에 아네타는 혀를 내둘렀다.
“분명 거짓말일 거야, 아네타! 그 말에 혹하면 안 돼!”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네타뿐만이 아니었다.
세르세는 강한 불신을 보이며 다시 한번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용병들은 그를 힘으로 억눌러 바닥에 무릎 꿇렸다.
“멀뚱히 서서 뭐 하고 있어? 자작 좀 조용히 시켜. 인질은 인질의 역할에만 충실해야지.”
에레즈의 한 마디로 인해 세르세와 그의 곁에 쓰러져 있던 크리스가 또다시 인질로 전락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네타는 그들의 목에 서슬 퍼런 단검이 겨누어지자, 소리 없이 분노했다.
“그래, 좋아. 네 말대로 하지.”
“좋은 선택이야.”
내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분신이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검 앞으로 뛰어들든, 그의 요구대로 독을 마시든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아네타가 자신을 가지고 놀려는 의도가 분명한 함정에 고분고분 응하자, 그를 보는 세르세의 얼굴에 깊은 무력감이 차올랐다.
“밧줄 풀어줘.”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을 이유는 뭐야. 우리에겐 인질이 있고, 저 여자는 절대 저들을 다치게 하지 못해.”
에레즈의 단언에 랜돌프는 지시를 이행했다. 그 역시 이미 한 번 크리스와 세르세를 이용해 아네타를 제압한 전적이 있어 스스럼없이 행한 일이었다.
“자, 이제 저기서 하나 골라.”
아네타는 상체를 결박하던 밧줄이 풀리자마자 잔이 있는 테이블 앞으로 내몰렸다. 독이 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제 손으로 마셔야 하는 상황에서 의연하기란 불가능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천근같은 두려움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녀 역시 생존욕을 지닌 사람인만큼 당장이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물러날 곳은 없었다.
아네타는 떨리는 손을 굳게 맞잡았다. 그러곤 두 개의 독배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골라도 그녀가 처하게 될 상황은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네타는 생사의 갈림길을 앞두고 고민하는 사람처럼 시간을 끌었다.
“못 고르겠어? 내가 대신 골라 줄까?”
아네타가 선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척하자, 에레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은근한 투로 물었다.
“그게 싫으면, 살려 달라고 개처럼 빌어 보는 건 어때? 그럼 내 마음이 바뀌어서 널 죽이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네 앞에서 그런 짓을 할 것 같아?”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인데 뭔들 못하겠어. 안 그래?”
“꿈 깨. 그럴 일 없으니까.”
“그럼 마셔. 기다리게 하지 말고.”
에레즈 바우터의 발치에서 비굴하게 비느니, 차라리 독약을 마시는 게 낫다.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그를 보며 그리 마음먹은 아네타는 이윽고 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아네타는 금속 특유의 냉기가 손끝을 타고 오르기 무섭게, 무언가에 놀란 듯 몸을 움찔 떨며 잔을 떨어뜨렸다.
댕그랑.
내용물을 뱉어 낸 잔이 금속음을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보랏빛 액체가 바닥을 적시자, 에레즈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시선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손에 닿아 있었다.
그는 아네타가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나머지 잔을 놓친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걸 쏟아 버리면 어떡해? 나머지 한 잔까지 떨어뜨리면 그땐 바닥에 고인 걸 먹게 할 거니까 알아서 처신 잘 해.”
아네타는 협박을 하는 에레즈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자신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 작정하고 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인지와 실감의 차이는 극명했다.
“뭐 하고 있어? 시간 끌지 말고 어서 마시라니까?”
그럼에도 에레즈는 재차 재촉을 했고, 아네타는 아주 느리게 손을 뻗어 남은 잔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입가에 가져가는 움직임도 느릿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독배가 입가에 닿는 순간, 아네타는 조용히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독배에 가려져 누구도 목격하지 못했다.
아네타는 언제 독주를 마시길 주저했냐는 듯 거침없이 입 안으로 쏟아지는 액체를 넘겼다.
들이켜는 즉시 목구멍은 물론 식도까지 화끈 달아오르는 까닭은 비단 술 때문만은 아니리라.
아네타는 혀끝이 점점 감각을 잃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마시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비워 냈을 때, 시야가 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네타!”
허물어지는 몸을 본 세르세의 경악 어린 외침이 귓가에 꽂혔다. 그는 죄책감에 젖은 얼굴로 용병에게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지만, 그들의 억센 손아귀는 더욱 강하게 그를 짓누를 뿐이었다.
아네타는 그가 보이는 죄책감이 자신을 지키지 못했기에 보이는 감정임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말이 아닌, 한 줄기의 선혈이었다.
***
늦은 밤, 이사벨은 희게 질린 얼굴로 발티모어 공작가의 문을 두드렸다. 막 잠에서 깨어난 칼로스를 앞에 두고, 이사벨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네타와 세르세가 크리스의 집으로 찾아가게 된 경위부터,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까지. 눈물에 젖었지만, 정확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가던 그녀는 말했다.
크리스의 집 내부가 엉망이 된 것은 물론, 아네타를 데리고 갔던 사용인이 그 안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마부 또한 마차 마부석에서 머리에 상처를 입은 채 기절해 있었다고.
끝으로 아네타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로 드레스 장식을 꺼내 보이자 처음엔 귀를 의심하며 멍하니 앉아 있던 칼로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곧장 창공의 능력을 발현하여 모습을 바꾼 그는 크리스의 집으로 향했다. 내부의 광경은 이사벨의 말대로 참혹했다.
버려진 단검이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망가진 물건들은 그나마 약과였다. 그사이 변질된 피비린내가 그의 예민한 후각을 강하게 자극했다.
칼로스는 핏자국이 말라붙은 거울 조각과 바닥을 보며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혈흔의 주인이 아네타가 아니길 바랐지만, 이사벨이 건네준 장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친 사람은 분명 아네타였다.
크리스의 집을 확인한 칼로스는 그 길로 황제 러셀을 찾아갔다. 납치의 정황이 분명한 상황이었기에 시간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보고를 받은 러셀은 즉시 영광의 가문 가주들을 소집했다. 날이 밝는 것과 동시에 제도에 도착한 버논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주들이 부름에 응할 동안, 칼로스와 러셀은 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파견했던 황궁의를 회장으로 불러들였다.
“그래. 케이너 백작가의 사용인이라는 자의 상태는 어떻지?”
“목에 자상을 입은 것 외에는 별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말끝을 흐리는 황궁의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러셀은 그를 보며 날카로운 눈매를 좁혔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상처의 방향이 조금 이상합니다. 타인에 의해 목에 상처를 입었을 경우, 대부분 그 방향이 비스듬한 것에 반해, 릴이라는 사용인의 상처는 반듯한 일직선이었습니다.”
상처가 하나였다면 황궁의 역시 그것을 우연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치명상뿐만 아니라, 그 근처에 난 여러 개의 상처 역시 일자였기에 황궁의는 더욱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상처가 납치범들에게 공격을 받아 생긴 것이라면 주변에 있는 다른 상처는 방어흔일 겁니다. 하지만 치명상부터 방어흔까지 모두 같은 일직선일 수는 없지요.”
“그럼 그 상처가 사용인이 스스로 낸 것이라는 건가?”
“예. 제 식견으로는 그리 보입니다. 치명상을 제외한 다른 상처들은 모두 주저흔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황궁의는 칼로스가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부분을 집어내자 기다렸다는 듯 긍정했다. 그의 주장은 타당했고, 두 사람은 납득했다.
황궁의의 소견이 사실이라면 릴이 자해를 한 이유는 뻔했다. 칼로스는 시선을 돌려 러셀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그 사용인 역시 에레즈 바우터에게 매수되었던 것 같군요.”
“피해자로 위장해서 누구도 자신을 의심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겠지.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던 사람을 공범으로 몰아가지는 않을 테니까.”
정확한 건 납치된 이들이 돌아온 이후에 자연히 밝혀질 것이다. 러셀은 황궁의에게 입단속을 명한 뒤 그를 회장 밖으로 내보냈다.
그로부터 수 분이 흐르고, 눈곱조차 떼지 못한 테르사가 회장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충격으로 반쯤 뜯겨진 문이 덜렁거렸지만, 그녀에겐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네타가 납치됐다는 게 사실입니까!”
관통은 물론 검까지 챙겨 들고 나타난 테르사는 금방이라도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내 모조리 화살꽂이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사나운 기세를 보였다.
“사실이다. 다 모이면 이야기를 시작할 테니 일단은 앉지.”
그런 그녀의 화를 가라앉히는 건 상석에 앉은 러셀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곧 정보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는 정보원과 버논이 돌아올 거라는 말에, 칼로스는 끓어오르는 속을 견디며 잠자코 인내했다.
테르사에 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헤첸 백작과 클로린 공작이었다. 나란히 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그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자, 더는 남는 자리가 없었다.
“자, 모두 도착했으니 상황 설명을 시작하지.”
“송구하오나, 폐하. 아직 바우터 남작이 오지 않았습니다.”
납치를 당했다는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 하나가 남는다. 그런데 당연하다는 듯 그를 제하고 시작하는 것에 헤첸 백작은 의아한 얼굴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