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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64화 (64/122)

64화. 독배를 든 자 (2)

그대로 아무 말 없이 같은 자리에 서 있던 것도 잠시, 랜돌프는 돌연 내부의 풍경을 살폈다.

방 안에 있는 것들을 차례차례, 또 빠르게 훑던 그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것은 옷장이었다.

‘설마 눈치챈 건가?’

랜돌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네타는 뒷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신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낡은 나무문 너머의 시선이 몸의 감각을 움켜쥐는 듯했다.

“대장?”

그러던 중 용병 하나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처음 마주하던 때부터 그의 곁에 붙어 있던 부하였다.

부하는 세르세의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랜돌프가 비켜서는 것을 기다리다, 미동도 보이지 않는 그에게 의문을 표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일으켜 세워.”

부하의 물음에 부정한 랜돌프는 그제야 옷장에서 시선을 거두며 옆으로 비켜섰다.

아네타는 그가 제 쪽으로 다가오자,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입을 떼었다.

“말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거지?”

“각하께서 그리도 궁금해하시던 의뢰인이 있는 곳이죠.”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네타는 무언가를 더 물으려 했지만, 제 몸과 가까워지는 단검을 보곤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차가운 날붙이가 발목에 닿자 섬뜩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투둑.

밧줄 끊기는 소리와 함께 묶여 있던 다리가 자유로워지자 두 발이 저릿함에 징징 울려 댔다.

무뎌졌던 감각이 회복되기도 전에 강제로 몸을 일으키려 드는 손길은 억셌다. 랜돌프는 휘청이는 아네타의 몸을 대충 잡아 지탱하며 말했다.

“이쪽은 내가 맡을 테니 너희들은 나머지 두 사람을 맡아.”

“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세르세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용병들에게 둘러싸였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누구도 크리스를 깨우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랜돌프의 곁에 붙어 있던 부하는 곡식 포대를 어깨에 짊어지듯 크리스를 들어 올렸다.

“이제 가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랜돌프는 아네타를 가장 마지막에 방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철저히 앞만 보며 걸었다. 랜돌프의 속내를 알 수 없으니, 실수로라도 옷장에 눈길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네타는 얼마 안 가 자신의 노력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제법 재밌는 일을 벌이신 것 같더군요.”

수월한 탈출을 위해 티 나지 않게 복도의 구조를 살피던 아네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말에 멈칫했다. 하마터면 당황한 얼굴을 적나라하게 내보일 뻔했다.

‘역시 눈치챘던 거였어.’

아네타는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도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방 안에 있던 옷장이 사람 하나 숨기엔 딱 좋은 크기던데. 그 좁고 낡아 빠진 곳에 자작께서 들어가는 건 무리일 테고…… 각하께서 들어가신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도 소용없습니다. 분신의 부재만으로도 이미 눈치를 챘으니까요. 정 억울하시면 말씀하세요. 몸수색을 하거나, 지금이라도 그곳으로 돌아가 확인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랜돌프는 자신이 깨달은 사실에 대해 확신했고, 자신감을 보였다. 부정이 들려오는 즉시 그들이 있던 방으로 걸음을 돌릴 기세였다.

아네타는 물러날 곳 없는 상황에 찌푸려지는 미간을 감추지 않았다.

에레즈는 자신의 능력을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아네타와 세르세를 의심할 일은 없지만, 용병들의 경우는 아니었다. 에레즈가 진짜 능력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아네타와 세르세가 영광의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더는 아니라고 잡아 뗄 재간이 없었다. 그에게 에레즈에 대해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더욱 막막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수를 쓰지 않았지?”

“각하께서 이번엔 어떻게 나오실지 궁금해져서요. 그래서 두고 보는 겁니다. 어차피 이곳은 나가는 문이 하나고, 민가와 한참이나 떨어진 산 속에 있거든요.”

운이 좋아서 부하들이 막고 있는 문을 빠져나간다고 해도 산을 내려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때에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일 것이다. 그리 첨언하는 랜돌프를 보며 아네타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왠지 주변의 정보를 넌지시 일러 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말은 분신의 존재를 쭉 모르는 척해 주겠다는 건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요. 분신이 있으니 의뢰인에게 각하의 부재를 들킬 염려도 없고, 당신들을 납치하라는 임무도 끝냈으니 이제 우리는 돈만 챙겨서 뜨면 그만이거든요.”

이적의 한계에 대해서 모르는 랜돌프는 아네타가 당연히 본체로 도망을 꾀하고 있다고 믿는 듯했다.

아네타는 굳이 그의 생각을 바로잡지는 않았다. 대신,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대해 꼬집었다.

“단순한 흥미 때문에 행하는 일치고는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꽤 큰 것 같은데.”

만약 아네타가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면 그 본인은 물론 부하들까지 모조리 죽은 목숨이 될 것이다. 그런 위험을 단지 흥미 하나 때문에 감수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네타는 그에게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랜돌프는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당연히 조건도 있습니다.”

“조건?”

아네타는 랜돌프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무언가를 요구하고 나섰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호의적이지 못한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만약 제가 드린 기회로 구조 요청에 성공하신다면, 제게도 상황에 맞는 기회를 주시면 됩니다.”

“날 신뢰하지 못하는 거 아니었나?”

“일종의 대비책이죠. 각하의 성공 여부나 제 신뢰, 둘 모두 불확실한 건 마찬가지니까요. 게다가 귀동냥으로 접했던 당신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라면, 아까 본 의뢰인에 대한 신뢰는 지하 바닥을 나뒹굴고 있어서요.”

랜돌프는 의뢰인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마당에 차악과 도박을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첨언했다.

당연하게도 아네타는 그가 말하는 것들에 대해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꿀지 모르는 랜돌프의 말에 기대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좋아.”

아네타는 결국 랜돌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어떤 요구를 할지는 모르나, 어차피 그것은 그녀가 구조 요청에 성공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 가해자였다. 그런 이와 약속을 했다고 해서 모든 요구를 수용할 만큼 아네타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이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아네타는 속으로 칼을 갈면서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른 말 하시면 안 됩니다.”

“그쪽이야말로.”

서로에 대한 신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거래가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무슨 거래가 오갔는지 모르는 채 앞서 걷던 이들의 걸음이 어느 방 문 앞에 다다랐다.

쾅쾅. 문을 두드린 것은 크리스를 어깨에 둘러멘 채로 랜돌프를 대신해 용병들을 이끌던 부하였다. 그 요란한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늦어? 어서 끌고 들어와!”

쨍한 목소리가 귓가에 와닿자, 아네타의 시선은 저절로 용병들에게 둘러싸인 세르세에게로 향했다. 때마침 시선이 마주친 그의 표정은 아네타와 다를 바 없었다.

‘맞지?’

‘맞아.’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는 동안 용병들은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문을 열었다. 세르세에 이어 안으로 끌려들어간 아네타는 낡은 물건들 사이에 서 있는 인물을 발견했다.

“저 여자가 왔으니 이제 그건 필요 없어. 저리 치워.”

그는 아네타가 안으로 들어서자, 바닥에 몸을 굽히고 앉아 의자를 닦던 용병에게 날파리를 쫓는 듯한 손짓을 보이며 명령했다.

하찮은 것을 대하는 태도에 아네타는 힐끗 랜돌프의 표정을 살폈다. 이를 악물어 도드라진 턱뼈는 그가 무슨 연유로 에레즈에게 반감을 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보니까 느낌이 새롭네. 안 그래?”

“에레즈 바우터.”

이름을 발음하는 투에서 적나라한 경멸이 묻어났다.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아네타와 달리, 에레즈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람을 셋씩이나 납치한 주제에 단장은 단장대로 하고 온 것인지, 화려하기 짝이 없는 행색이었다.

그런 그와 비견되게 아네타는 단출한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마저도 엉망으로 구겨져 있는 데다 밧줄에 포박되어 있기까지 하니 그녀를 훑은 에레즈의 얼굴에 업신여김이 가득했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꼴좋네. 지금껏 본 모습 중에 지금 모습이 네 주제에 가장 잘 어울려.”

후작가에서 찻잔을 내던진 이후로 연기는 그만두기로 했는지, 에레즈는 아네타에게 하대하며 그녀의 처지를 비웃었다.

팔짱을 낀 채 앞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은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듯 오만했다.

“영광을 찾으면 뭐 해. 정작 이런 상황에선 무용지물인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레즈는 언제 제 능력을 감추었냐는 듯 조심성 없이 말을 꺼냈다. 죽음을 통해 침묵하게 할 생각으로 여지를 주는 걸까. 아네타는 그 생각 없는 행동과 능력에 대한 맹신이 우스워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웃음은 얇고 짧은 에레즈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 충분했다.

심사가 비틀린 에레즈는 단숨에 아네타의 뺨을 올려붙였다.

아네타의 고개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돌아갔다. 일순간 맞은 볼에 화끈 열이 오르더니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픔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치욕감이었다. 아네타는 입술을 앙다물며 감정을 삭였다. 여기서 흥분해 봤자 도움이 될 건 하나도 없었다. 그리 자신을 다독이면서 숨을 골랐다.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모양인데, 웃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드디어 내 앞날을 망친 널 처리할 수 있는 순간이 왔으니까. 그러게 내가 좋게 말할 때 듣지 그랬어. 그럼 적어도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멍청하긴.”

아네타가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하자, 에레즈는 씹어 뱉듯 악의를 드러냈다. 뒤에서 용병들에게 움직임을 제지당한 세르세가 살벌하게 이를 갈아도 에레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짓을 벌이고도 네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당연한 거 아니야? 난 이 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라고. 너희 같은 별 볼 일 없는 것들과는 차원이 달라.”

자신감에 차 턱을 치켜드는 모습을 보며 아네타는 할 말을 잃었다. 저 정도면 유치함을 넘어서 망상에 빠져 사는 수준이었다. 겨우 저런 이가 판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니 기가 찼다.

“그런 자리를 감히 너 따위가 노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난 반드시 너 하나만큼은 내 손으로 죽일 거야. 너만 없으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테니까.”

에레즈 바우터는 아직도 틀어진 원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네타의 눈에는 그것이 열망을 넘어선 집착으로 보였다. 허황된 꿈에 잠겨 사는 모습에 이제는 연민마저 일었다.

“하지만 내가 죽기를 원하는 건 오직 너 하나뿐이야. 그러니 다른 두 사람을 살려 주는 조건으로 나랑 내기 하나 하는 게 어때?”

그러던 중 에레즈는 꿍꿍이가 있는 얼굴로 내기를 제안했다. 아네타는 옆으로 비켜선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응시했다.

에레즈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건 두 개의 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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