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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63화 (63/122)

63화. 독배를 든 자 (1)

“……네타, 아네타.”

몽롱했던 정신을 잡아끄는 것은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였다.

처음엔 실낱같이 가늘던 목소리가 점차 선명하게 들려오자, 긴 속눈썹이 어둠을 떨치려는 듯 파르르 떨렸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아네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초점이 돌아오자 안개 낀 듯 뿌옇던 눈앞이 맑아졌다.

시야가 회복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세르세였다.

아네타와 마찬가지로 옆으로 누워 있던 그는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길 기다리다 물었다.

“아네타. 정신이 좀 들어?”

“……어.”

대답과 동시에 목 뒤에서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간을 찌푸린 아네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가져다 대려고 했지만, 몸을 옭아맨 무언가가 움직임을 방해했다.

아네타는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상체는 물론 다리까지 밧줄로 묶여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살핀 세르세의 사정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꽁꽁 묶인 채 나란히 누워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자각한 아네타는 그제야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상황을 파악한 그녀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아네타는 대범하게 저택으로 찾아와 유인하던 릴을 떠올리며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아무리 찾아온 이가 버논의 사용인이라고 해도 호위는 대동했어야 했는데.’

호위는커녕 몸을 지킬 수단 하나 없이 따라나선 데다 릴이 수상한 동태를 보일 때까지 의심조차 못하다니. 엄연히 자신의 실책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혹여 문 밖에 누가 있을까. 아네타는 세르세가 그랬던 것처럼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글쎄. 창밖이 밝은 걸로 봐서는 해가 뜬 것 같기는 한데.”

“크리스, 크리스는?”

“네 뒤에 있어.”

아네타는 세르세가 눈짓으로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자 포박된 몸을 힘겹게 움직였다.

몸의 무게에 다친 손이 짓눌리는 아픔에도 굴하지 않고 돌아보자, 용병들과 대치하고 있을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크리스가 보였다.

다행히 크리스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구겨진 잠옷만 제외하면 멀끔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아네타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겼다.

“격렬하게 몸싸움을 벌인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껏 깨어나지 못하는 걸로 봐선 역시 독한 수면제에 당한 건가?”

이런 일에 빈번하게 사용되는 방법은 수면제를 코로 흡입하게 하는 것이다. 아네타는 가장 유력한 가정에 무게를 실었다.

“내 생각도 같아. 미끼로 이용하려면 그편이 가장 편할 테니까.”

세르세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지, 그는 곧장 아네타의 말에 동의했다.

“보나마나 릴도 용병들과 마찬가지로 보수를 약속 받고 움직였을 텐데. 사주한 사람이 누굴까.”

아네타는 의문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였다. 용병들을 고용할 자금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였다.

‘남은 돈을 모두 쏟아부었거나, 가지고 있던 사치품이라도 팔았겠지.’

아네타는 그리 직감하며 이를 갈았다. 확신은 있는데 확증이 없었다.

“범인은 에레즈 바우터야. 확실해.”

그러던 중 세르세가 장담하듯 말했다. 단순한 짐작만으로는 보일 수 없는 태도에 아네타는 물었다.

“근거는 있어?”

“있어. 네가 정신을 잃은 동안 분신의 힘을 써 보려고 했는데, 능력을 발현할 수 없더라고. 그건 즉, 이곳에 그자가 와 있다는 의미지.”

영광의 능력을 막을 수 있는 건 에레즈의 통제뿐이다. 아네타는 세르세가 장담하는 이유에 납득했다.

“막 나가도 이렇게 막 나갈 줄은 몰랐는데.”

“너와 내 영광을 빼앗지 않고 그대로 둔 것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거야. 가지고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에겐 너와 이적이 있지.”

아네타가 이적에 대해 감추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에레즈는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맹신하고 있었다.

그날 에레즈에게 잘못된 확신을 심어 준 건 다시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이었다.

“네가 분신과 이적을 이용해서 이곳을 빠져나간 뒤 도움을 요청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아. 언제 올지도 모르는 구조만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세르세는 뒤로 묶인 손을 움직였다. 손목에 감긴 밧줄에 살갗이 쓸려 붉은 생채기가 남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너만이라도 무사히 도망쳤으면 좋겠어. 분신이 이곳에 남는다면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거야.”

“마음은 고맙지만, 진짜 몸으로 빠져나가는 건 무리야.”

“어째서?”

“내가 이적을 통해 다른 영광의 능력을 발현하려면 반드시 그 영광의 주인이 주변에 있어야 하거든. 그게 능력 발현의 조건 중 하나라 빠져나가는 건 분신의 몸으로만 가능해.”

만약 발현에 제약이 없었다 해도 본체로 나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네타는 그러한 사실을 숨긴 채 멈칫하는 세르세를 두고 눈을 돌렸다.

‘문은 잠겨 있을 게 뻔하고. 창문엔 주먹만 한 자물쇠가 달려 있으니 저쪽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무리야. 그렇다면 숨어 있다가 나가야 한다는 건데…….’

아네타는 빠져나갈 방도를 궁리하기 위해 주변을 훑었다.

내부는 넓고 웅장한 느낌이었지만, 그뿐이었다. 뿌옇게 쌓인 먼지하며, 낡다 못해 삭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물건들의 상태로 미루어 봤을 때 버려진 지 반세기는 지난 듯해 보였다.

아네타는 이곳이 제 조부 대의 귀족이 살다 버린 별장 같은 게 아닐까 짐작했다. 장식이나 가구의 모양 따위가 딱 그 시기에 유행하던 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방 안을 샅샅이 훑던 아네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옷장이었다. 경첩에 문제가 생긴 건지, 문 한쪽이 조금 비뚤게 달려 있긴 하지만 제 몸 하나 숨기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내 분신은 저쪽에 있는 저 옷장 안에 숨겨 두면 되겠네. 우리가 끌려가면 이 방의 감시는 사라질 테니까 그때부터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도움을 청하는 게 좋지만, 그렇다고 너무 서둘렀다간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었다.

아네타는 용병들이 한곳에 모이는 때를 기다렸다 탈출의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세르세, 분신은?”

“뺐어. 그런데 우리 둘 다 손목이 묶여 있어서 네가 있는 쪽으로 굴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알겠어. 해 보자.”

몸이 묶인 상태에서 분신을 건네받는 과정은 힘겨웠다. 아네타가 그랬던 것처럼 억지로 몸을 굴린 세르세는 가까스로 반지를 세워 아네타가 있는 쪽으로 굴렸다.

다행히 분신은 아네타가 있는 곳까지 잘 굴러 왔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네타는 몸을 돌린 채로 보이지 않는 반지를 찾아 손에 쥐어야 했다.

“됐어. 잡았어.”

손을 가능한 뒤로 빼 바닥을 더듬는 과정에서 다친 곳의 상태가 더욱 엉망이 되는 것을 느꼈지만, 아네타는 결국 분신을 손에 쥐었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이 이상한데.”

능력을 발현하는 데에는 잠시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한 번에 두 개의 시야가 보였지만, 그렇다고 두 개의 몸이 하나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독립된 또 하나의 개체를 머릿속으로 조종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분신을 움직이는 것에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었다. 움직임이 섬세하면 섬세할수록 정신력이 큰 폭으로 깎여 나가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세르세가 두 개의 몸으로 용병들의 공격을 피했는지 의문이었다.

아네타가 분신의 몸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본체가 쥐고 있는 반지를 품 안에 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곤 몸을 숨기기 위해 살금살금 옷장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까 당장 무너질 것 같지는 않네.’

낡은 목재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아네타의 분신은 조심스레 옷장 문을 열었다. 다행히 안쪽은 텅 비어 있었지만, 선반이 제 무게를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언제 누가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망설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네타는 조심스럽게 분신을 옷장 안으로 움직였다. 혹여나 무너질까 작은 움직임 하나에 신중을 기한 덕인지, 옷장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아네타는 그제야 안도하고 옷장 문을 닫았다. 아귀가 맞지 않는 문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었다. 그 틈새로 들키지 않게 동태를 살피면 되겠다 싶었다.

“널 보는 눈에 살기가 담겨 있더니, 이번에는 진짜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 같네.”

그동안 세르세 역시 내부의 풍경을 둘러보았는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아네타를 철천지원수보다 더 지독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런 장소를 잘도 알아냈다 싶었다.

“내가 무력해서 미안해. 뭔가 이상하다는 감이 왔을 때 너만이라도 도망치게 했어야 했는데.”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야. 넌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에 휘말린 거고.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

“내가 따라가게 해 달라고 나선 거잖아, 아네타.”

“…….”

아네타는 명백한 사실이라며 못 박는 세르세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계속 잘잘못을 따지고 있을 상황도 아니거니와, 가까이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세르세도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는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발소리는 그들이 있는 방 바로 앞에서 멎었다. 두 사람은 불안스레 시선을 맞추었다.

잠금 장치를 얼마나 달아 놨는지, 문 앞에선 한참이나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녹슨 경첩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열린 문 사이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랜돌프였다. 웃는 낯으로 들어선 그를 본 순간 아네타는 또 한 번 목 뒤에서 묵직한 둔통을 느꼈다.

“다행히 깨어 있었네요. 아직도 기절해 있으면 물이라도 끼얹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랜돌프가 건네 오는 말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부하의 손에 정말 물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통이 들려 있자, 아네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걷어차면서 깨우려 들지 않아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런 야만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죠.”

“납치까지 해 놓고 잘도 그런 말을 하네.”

뚫린 입이라고 못 하는 말이 없다. 아네타가 기가 차다는 듯 반응해도 랜돌프는 그저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수고는 덜었네요. 바로 다음 목적으로 들어가면 되겠어요.”

만면에 가득했던 여유로운 웃음은 곧 지워졌다. 어느 순간 무표정이 된 랜돌프는 품 안에서 다른 용병들이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예리하게 벼려진 날은 주변이 그리 밝지 않음에도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잠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랜돌프가 단검을 손에 쥔 채로 가까이 다가오자, 아네타는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로 공격을 받게 되면 꼼짝없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 피할 도리도, 막아 낼 방도도 없어 아네타는 이를 악물었다. 무력하기만 한 상황에 정말이지 넌더리가 났다.

“걱정 마세요. 단지 발목에 묶인 밧줄을 끊어 내려는 것뿐이니까. 아, 그렇다고 오해하진 맙시다. 놓아주려는 게 아니라, 끌고 가려는 거거든요. 일단은 이쪽부터 먼저 끊어드리죠.”

랜돌프는 친절하게 순번까지 일러 주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세르세에게 다가갔다.

몸을 낮춘 그는 스스럼없이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 밧줄을 끊어 냈다. 조금의 지체 없이 깔끔한 솜씨였다.

그러곤 바로 아네타에게로 향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일순간 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줄곧 랜돌프를 경계하며 동태를 살피던 아네타는 재빨리 그의 시선을 좇았다.

랜돌프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있는 건 비어 있는 세르세의 손가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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