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음모 (6)
랜돌프는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자신과 함께 있던 부하를 향해 손짓했다.
인질. 그 말에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였다.
‘설마…….’
눈에 띄게 안색이 안 좋아진 아네타의 시선이 침실 안으로 들어가는 부하의 등에 꽂혔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모습을 드러낸 부하가 안고 나온 이는 익숙한 주홍빛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두 팔이 묶인 채, 머리와 다리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는 이는 분명 크리스였다.
“……크리스.”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크리스를 발견하자 아네타는 흡사 신음 같은 음성으로 이름을 불렀다. 정신을 잃은 것인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네타에게 닥친 절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분신과 함께 간신히 버티고 있던 세르세는 바닥난 체력으로 버티고 버티다 결국 무너지듯 제압당했다.
“어윽……!”
용병들은 가차 없이 중심이 무너진 세르세의 뒷목을 쳐 기절시켰다. 이윽고, 랜돌프의 시선이 아네타에게로 돌아왔다.
“자, 이제 각하 한 분만 남았습니다. 선택하세요. 손에 든 걸 버리고 저항을 끝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이쪽에 계신 귀한 분들의 몸에 상처가 나는 모습을 지켜보시겠습니까?”
랜돌프가 아네타에게 건넨 것은 협박성이 농후한 선택지였다. 아니, 선택지라 칭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요구하는 바가 명확했다.
인질을 대상으로 맞불을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이에게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분한 마음을 짓씹는 아네타의 얼굴은 잠깐 사이에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찢어진 손가락 끝으로 핏기가 싹 빠지는 것 같았다.
아네타는 결국 손에 쥐고 있던 거울 조각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피로 물든 그것이 바닥과 만나 파열음을 내는 순간, 랜돌프는 그녀에게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괜히 대장이 아니라는 듯 랜돌프의 움직임은 다른 용병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속했다. 그의 움직임을 한 박자 느리게 눈치챈 아네타는 손을 급히 뒤로 돌려 외출복에 달려 있던 작은 장식 하나를 떼어 냈다.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다친 손으로 뜯어 낸 장식엔 자연히 붉은 피가 묻어났다. 아네타가 그것을 놓기 무섭게 랜돌프에게 팔을 붙잡혔다. 장식이 떨어지는 소리는 그녀가 그 힘에 끌려가는 소리에 묻혔다.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요.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아마 목적지에 다다라 있을 겁니다.”
“……!”
귓가에서 들려오는 랜돌프의 말에 반발하거나 반항할 틈도 없이, 모로 세운 손날이 정확히 그녀의 뒷목을 노렸다. 묵직한 통증과 함께 아네타의 시야가 어둠으로 점멸되었다.
***
랜돌프는 적당히 힘 조절을 했음에도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받아 지탱하며 말했다.
“후작을 잡았으니 이제 됐어. 일단 이들이 타고 온 마차의 마부를 기절시킨 뒤에 우리가 준비한 마차를 불러와. 추적자가 붙을 게 뻔하니 한시라도 빨리 제도를 떠나야 해.”
후작의 부재가 길어지면 후작가에서 사람을 보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황을 파악하고 제도의 출입을 통제할 테니 그 전에 빠져나가 목적지에 다다라야 했다.
힘없이 늘어진 몸을 품에 안아 든 랜돌프는 거침없이 앞으로 발을 디뎠다. 그가 지나는 길마다 짓밟힌 거울 조각들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동행할 생각이라면 그쪽도 서둘러.”
랜돌프는 그대로 크리스의 집을 나서기 전, 벽에 붙어 못 박힌 듯 서 있던 릴에게 말했다.
“……저는 이곳에 남겠어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행동은 얼마 가지 않았다. 릴은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얼굴로 거부 의사를 보였다.
“괜찮겠어? 후작을 이곳으로 불러온 그쪽이 가장 먼저 의심받을 텐데.”
“생각해 둔 방법이 있으니 상관 마세요.”
“그럼 먼저 가지.”
랜돌프는 두 번 권하지 않고 릴을 스쳐 지나갔다. 함께 가자며 부득불 붙들고 늘어질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랜돌프였으나, 이 일에 목숨을 건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빠르게 관심을 껐다.
관여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용병들이 대장의 뒤를 따라 나가자, 자연히 혼자 남게 된 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엉망도 이런 엉망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크리스의 집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모든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낸 뒤 자신 역시 피해자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아네타를 찾아가는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러나 주저할 수는 없었다.
릴은 바닥에 나뒹굴던 단검을 집어 들었다.
***
손톱 끝을 잘근거리며 방 문 앞을 서성이는 에레즈의 모습에선 초조함이 묻어났다.
조부인 바우터 남작의 사후 첫 생일이라는 핑계로 영지에 내려온 지 이틀째. 슬슬 용병들의 소식이 들려와야 마땅하건만, 새벽이 되도록 전해지는 소식이 없으니 애가 탔다.
“설마 실패한 건 아니겠지?”
밀려드는 불안감에 와락 인상을 구길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들어온 이는 함께 영지로 내려온 집사 젠이었다.
“어떻게 됐어? 성공했대?”
노크 소리를 듣고 휙 소리가 날만큼 빠르게 고개를 돌린 에레즈는 문이 닫히자마자 일의 경과를 물었다.
뒷목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네. 주인님의 뜻대로 일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이야?”
아네타와 크리스를 잡았다. 반가운 소식에 에레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눈엣가시 같던 여자를 치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네. 빠르면 내일 오전 중에 약속한 장소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 무슨 문제?”
“용병들이 아데나워 후작과 함께 왔던 동행인도 붙잡았다고 합니다.”
“동행인이 누군데?”
“세르세 라폴리 자작입니다.”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 들려오자, 에레즈는 황궁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아네타의 곁에 붙어 있던 붉은 머리의 남자를 떠올렸다. 죽이기엔 너무도 아까운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어쩌겠는가. 이 일을 알아 버린 이상 살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러게 왜 그만한 인물로 그 재수 없는 여자랑 어울려서는.’
하여간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여자다. 에레즈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 아네타를 칭하며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뭐, 그 정도쯤이야 괜찮아. 뒤처리가 조금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아네타 아데나워를 협박할 인질이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해야지.”
용병들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 달라는 의뢰를 넣을 수도 있었지만, 에레즈는 그리하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아네타가 제 발치에서 살려 달라고 설설 기는 모습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고고한 여자가 엉망이 된 몰골로 목숨을 구걸하면 얼마나 보기 좋을까.”
상상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데나워 후작이 빌면 살려 주실 요량이십니까?”
“내가 미쳤어? 살려 줄 거였으면 애초에 그 돈을 들여서 잡아 오라고 시키지도 않았지.”
에레즈는 아네타를 아주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일 작정이었다. 죽음보다 더 깊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 정도는 봐줘야 지금껏 해 왔던 마음고생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명줄을 확실하게 끊어 놓을 거야. 그래야 뒤탈이 없지.”
그래도 그 바보같이 착해 빠진 크리스는 그나마 덜 고통스럽게 보내 줄 작정이었다. 쌓인 감정이 없다는 데에서 비롯한 결정이었다.
세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한 치도 없었다. 이곳은 황제나 황족을 향한 암살 시도도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세계다. 그런 세계에서 고작 조연 몇 명 죽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크리스 빼고는 원작에서 제대로 다뤄지지도 못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그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했다.
“젠, 너는 잔말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에레즈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잘 들어. 날이 밝기 직전에 마차 한 대를 준비해. 나는 그 마차를 타고 아무도 몰래 용병들이 있는 곳으로 갈 거니까, 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할아버지 방 문 앞에서 아무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아. 내가 슬픔에 겨워서 그 안에 틀어박힌 것처럼 보이게 하란 말이야.”
에레즈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제 손으로 죽음으로 이끈 조부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죄책감 따위는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산 사람에게 보탬이 되면 좋은 거지.’
에레즈는 입매를 비뚜름하게 말아 올리며 젠을 내보냈다. 어서 나가서 마부에게 언질을 두라는 요구에 젠은 순순히 응했다.
혼자 남은 에레즈는 그제야 마음 편히 침대로 가 두 발을 뻗고 누웠다. 계획에는 없던 세르세가 끼어들었지만, 그 외에는 원하는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음에 만족을 느꼈다.
처음 버논의 사용인을 매수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협조하기는커녕 주인인 버논에게 그대로 일러바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처벌을 받게 될 테니까.
그럼에도 매수를 감행했던 것은 릴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릴은 불운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온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아주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에레즈는 그 안타까운 사정을 비집고 들었다.
“이 일만 성공한다면, 내가 너와 네 가족쯤은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게 해 줄게.”
그리 제안하며 가지고 있던 장신구 하나를 쥐여 주자, 릴은 바로 협조를 약속했다. 어린 동생의 존재를 언급하며 처신 잘하라는 말까지 덧붙였으니 배신할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을 잘 처리해서 다행이었다.
‘내가 사람을 참 잘 골랐어.’
마음에 드는 활약을 한 데다, 앞으로 두고두고 수족처럼 부릴 예정인 만큼 약속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내가 원작대로 발티모어 공작가의 안주인 자리만 차지한다면 그 정도 돈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대가는 그때 주면 돼.’
현재 에레즈가 가진 것이라고는 그나마 여유 있을 때 사들인 장신구나 의류가 전부였다.
사치로 조부가 모아 둔 재산을 탕진하고, 그나마 남은 돈마저 용병들을 고용하는 데에 써 버렸으니 릴에게 내어 줄 돈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사실을 릴이 알고 있었더라면 버논의 부재를 틈타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만, 에레즈는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그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모든 일이 끝난 이후일 테고, 그때가 되면 꼼짝없이 공범이 되어 거래와 관련한 일은 입도 벙긋하지 못할 테니까.
그 모든 계산 아래 에레즈는 밝아 올 아침을 기대하며 억누를 수 없는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내일이 되면 빼앗겼던 모든 것을 돌려받을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