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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61화 (61/122)

61화. 음모 (5)

“6,000만 벨론. 의뢰 내용은 남작과 각하, 두 사람에 한정되어 있지만 예기치 못한 동행인을 달고 오신 덕분에 머릿수가 하나 더 늘어 버렸네요.”

랜돌프는 생각보다 쉽게 자신들의 의뢰 정보를 알려 주었다. 아네타가 지금의 상황에서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아네타는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말에도 욱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을 거두고 더 이성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는 랜돌프가 밝힌 액수를 비웃듯 말했다.

“겨우 그거 가지고 되겠어?”

“6,000만 벨론에 언제부터 ‘겨우’라는 말이 붙었습니까?”

4인 가족이 적어도 5년 이상은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액수에 붙은 표현이 ‘겨우’라니. 랜돌프는 동의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아네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겨우라고 생각하게 될걸. 내 제안만 받아들이면, 그 금액의 열 배를 당신들에게 지급할 용의가 있으니까.”

아네타는 단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거액을 제시했다. 실제로 그와 같은 금액을 지급할 생각이 없음에도 조건을 내거는 태도는 당당했다.

“내 조건은 두 가지야. 나와 세르세, 크리스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돌려보내 주는 것과 누가 이따위 의뢰를 했는지 순순히 자백하는 것. 이 두 가지만 확실하게 들어준다면, 저택으로 돌아가는 즉시 앞서 말한 대가를 지불하지.”

후자의 경우에는 사실 의심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저들이 말한 의뢰금을 지불할 만한 형편이 되는지 의문이었기에 쉬이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아네타.”

세르세는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아네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이미 첫 번째 조건을 듣고 아네타의 목적이 무엇인지 눈치채고 있었다. 돈을 주겠다는 그녀에게 반대하는 척 인상을 찌푸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어, 세르세. 이 방법밖에는 없잖아.”

“…….”

아네타와 세르세는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장단을 맞추었다.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아네타의 말에 동의하듯 입을 다무는 세르세를 보며 용병들은 쑥덕댔다. 하나같이 아네타가 내건 조건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는 말들이었다.

자그마치 6억이다. 그 정도면 수도 외곽에서 머릿수대로 집을 한 채씩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어느새 용병들 사이에서는 감출 수 없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6억 벨론이면 우리 꿈을 이룰 수 있어. 언뜻 누군가가 그리 중얼거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부하들의 설렘과 별개로, 대장 랜돌프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

“됐습니다. 영 끌리지 않네요.”

“돈만 주면 뭐든 다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 거절하는 거지?”

“왠지 뒤가 구려서요. 왜, 후작가의 영지에서 각하를 속이려고 했던 여자 있잖습니까. 이름이…… 그래, 멜라라고 했던가. 우리도 그 여자처럼 마지막에 뒤통수를 맞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멜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아네타는 데릭의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했던 여자를 떠올렸다.

아네타는 그녀에게 목걸이의 대가로 돈을 주었다가, 고소를 통해 한 푼도 빠짐없이 되찾아 온 전적이 있었다.

‘설마 그 일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아네타는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 드는 탄식을 가까스로 삼켰다. 이번엔 그럴 생각이 없다고 부정해 봐야 믿을 것 같지 않았다.

멜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기대를 품고 있던 부하들의 표정마저 굳었다.

생각보다 잘 알려진 일이었는지, 그들은 랜돌프의 결정에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협상은 결렬입니다. 아무래도 곱게 따라나설 생각은 없으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군요. 말씀드렸던 대로 무력을 사용하는 수밖에요.”

뒤돌아 나가기엔 이미 늦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등 뒤에서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아네타는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선 누군가가 퇴로를 막아 버렸음을 눈치챘다.

현관뿐만이 아니었다. 거실에 난 창문까지 막히자 아네타와 세르세는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저벅저벅. 가까워지는 묵직한 발소리는 아네타를 긴장으로 몰아갔다. 빨라지는 심장 박동만큼이나 거리는 점점 더 좁혀져 가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순간이었다.

“말했던 대로 가볍게 해, 가볍게. 저기 저 녀석처럼 혼자 돌발 행동 하다가 당하지 말고.”

대치하고 있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든 것은 홀로 여유로워 보이는 랜돌프의 목소리였다.

랜돌프는 쓰러져 있는 제 부하를 턱짓으로 가리키곤 문턱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이 꼭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감상하려는 모양새였다.

용병들은 귀족 두 명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들고 있던 무기를 품 안으로 갈무리했다. 공격이 가해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윽!”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남은 것은 자연히 몸으로 나누는 대화뿐이었다. 세르세는 급히 분신의 능력을 발현했지만, 살벌한 소리와 함께 날아드는 주먹을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가 영광의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신의 수는 오로지 하나였고, 두 몸을 동시에 움직이는 데에는 두 배의 체력이 소모된다.

때문에 세르세는 자연히 방어에만 급급할 뿐, 반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억센 힘이 날아들 때마다 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네타의 경우에는 늘 그랬듯 주변에 있는 물건을 이용했다. 소파 등받이에 걸쳐져 있던 담요부터 물병, 컵, 촛대, 장식용 액자까지. 손에 잡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며 가해지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내던진 물건들이 하나같이 바닥 위를 나뒹굴자, 집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크리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겨를도 없었다.

“하아, 하아.”

대치가 길어질수록 숨은 거칠어져 갔다. 찌르듯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던 손목은 어느새 감각을 잃었다.

아네타는 등 뒤로 손을 뻗어 서랍장 위를 더듬었다. 저린 손목으로 또 한 번 책을 던졌지만, 용병들은 그마저도 가뿐히 피했다. 그러면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꺼번에 여러 명이 달려드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네타와 세르세에게는 다행인 일이었지만, 어딘가 미심쩍었다.

대장인 랜돌프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쉽게 끝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리저리 잘도 피해 간다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한계에 달했다.

‘더는 던질 만한 게 없어.’

주변을 돌아본 아네타의 눈동자가 불안스레 흔들렸다. 두 주먹을 말아 쥐자 망가진 손톱 끝이 손바닥에 희고 붉은 달을 새겼다.

용병들을 상대로 힘겨루기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하게도 아네타는 언제나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먼저 깨닫곤 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잡히고 말 거야.’

두렵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아네타는 입 안이 바짝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러던 순간, 불안이 깃든 눈가에 희미한 빛의 잔상이 스쳤다.

아네타는 홀린 듯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자그마한 빛의 출처는 맞은편에 서 있는 거울이었다.

‘이 집에 저런 거울이 있었던가?’

의문을 느끼던 아네타는 곧 다른 쪽으로 번지는 생각을 다잡았다. 지난 기억을 돌이킬 시간 따윈 없었다. 중요한 건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하는 것뿐이었다.

아네타는 승산 없는 싸움임을 알고 있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순순히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우리 셋 다 저들의 손에 잡혀가는 것만큼 최악인 상황은 없어. 누가 되었든 한 사람이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서 상황을 알려야 해.’

아네타는 자신을 제압할 기회를 노리는 용병들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세르세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저들의 타깃이 아니었고, 단순히 자신을 따라나섰다는 이유로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고 있는 것이었으니 아네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설령 그를 보내는 과정에서 피를 보게 된대도 상관없었다. 아네타는 세르세가 들으면 기함할 각오를 다졌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쓸데없이 기운 낭비하지 마시고 이제 그만 포기하시죠.”

“어쩌지? 난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최후의 발악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네타는 흐트러진 호흡 사이로 거절을 표했다. 그러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용병들을 속이기 위해 금방이라도 오른쪽으로 뛰어나갈 듯한 자세를 취했다.

다행히 용병들은 아네타가 의도한 대로 앞을 막아서기 위해 몸을 움직였고, 아네타는 그 틈을 타 비어 버린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네타가 용병들보다 나은 신체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민첩성이었다. 그들이 아차 하고 뒤돌아봤을 때, 아네타는 이미 거울 앞에 다다라 있었다.

“그쪽이 아니잖아!”

“너는 다시 저쪽으로 가!”

아네타는 용병들이 급히 다가오려는 것을 보곤 길쭉한 거울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들어 올려 휘두르거나, 던지기엔 그녀의 팔심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네타는 구석진 곳에 들어가 있던 전신 거울을 앞으로 끌어낸 뒤 코앞까지 다가온 그들 앞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와장창.

거울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네타는 치맛자락이 흩어지는 조각들을 막아 주어 다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용병들은 거울의 몸체와 파편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러는 사이, 아네타는 눈을 바삐 굴려 깨어진 조각들을 살폈다. 그중 가장 긴 조각을 발견한 아네타는 주저 없이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게 무슨……!”

아네타의 돌발 행동에 놀란 것은 오히려 랜돌프와 용병들이었다. 작디작은 생채기 하나에도 눈물을 글썽일 것처럼 생긴 여인이 보이는 행동은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포기는 못 하지만, 알고는 있어. 이대로라면 우린 분명 당신들 손에 잡혀가고 말겠지.”

움켜쥔 조각은 하얀 손바닥을 금세 붉게 물들였다. 날카로운 날이 살갗을 파고드는 감각은 적나라했다.

툭, 툭. 손끝에 모인 붉은 선혈이 방울져 떨어지며 마른 바닥을 적셨다.

찢어진 살갗 위로 불에 데인 듯한 열감이 번졌으나, 아네타는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방법을 좀 바꿔 볼까 하는데.”

놓기는커녕, 오히려 깨어진 조각의 날카로운 단면을 제 목에 겨누었다.

“아네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세르세가 화를 냈지만 그의 외침도 그녀의 귓가에 닿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네타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결정권을 가진 랜돌프를 직시했다.

“남는 건 나 하나로 하지. 당신들 의뢰와 관련 없는 세르세는 보내 줘.”

“이번에는 각하의 목을 가지고 거래를 하자는 겁니까?”

“그래. 설마 이번 거래도 거부하지는 않겠지? 내가 잘못되면 당신들이 받기로 했던 6,000만 벨론 또한 물거품이 될 텐데.”

용병들의 목적은 아네타를 데리고 가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만약 목숨을 노리는 것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네타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하고자 했다. 의뢰 완수의 가장 큰 조건인 제 목을 건다면 어디에 있는지 모를 크리스는 몰라도, 타깃이 아닌 세르세 하나만은 보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모든 일이 아네타의 뜻대로 흘러갈 리가 없었다. 짙은 눈썹을 치켜세운 랜돌프는 곧 가슴 앞에 교차하고 있던 팔을 풀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거래는 거절해야겠습니다. 인질은 이쪽에도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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