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음모 (4)
어둠을 헤치고 달린 마차가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곳에 위치한 주택가였다.
마차에서 내린 아네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주택가임에도 불구하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그 사이의 간격이 이십에서 삼십 미터쯤은 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래서야 옆집에서 누가 죽어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택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네타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보지 못했다.
여름보다 해가 짧아져서 어두울 뿐이지,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가구 수가 적어서 그런가?’
이전에 왔을 때에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두울 때 와서 보니 생각이 변했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곳곳에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크리스에게 진지하게 이사를 권했으리라.
아네타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눈을 들었다. 집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던 그녀는 곧 외벽에 난 창문을 보며 의문을 느꼈다.
“불이 다 꺼져 있는데?”
아네타가 의아한 듯 입을 떼자, 세르세 역시 고개를 들어 창문을 확인했다. 그녀의 말대로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그러게.”
사용인에게 아네타를 불러와 달라고 해 놓고 벌써 잠자리에 들었을 리는 없었다. 세르세는 릴에게 물었다.
“데번 남작, 지금 집에 없는 건 아니겠지?”
아네타는 세르세의 물음에 동의하듯 릴을 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듯 시선이 몰리자, 품 안에서 열쇠를 꺼내던 릴은 그만 손을 삐끗하고 말았다.
땡그랑. 작은 쇠붙이가 몸체를 울리며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실수를 자각한 릴은 재빨리 그것을 주워 들었다.
“……안에 계실 거예요. 제가 저택을 나오기 전과 다른 게 없거든요.”
릴은 크리스가 침실에서 칩거하는 내내 불을 켜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자신이 나오는 길에 꺼 두었다고 말했다.
말을 하는 중간중간에 뜸을 들이며 눈을 굴리는 모습은 그리 신뢰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미심쩍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지만, 아네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힐끗 세르세의 안중을 살폈다. 그는 문을 여는 릴의 뒷모습을 묘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릴이 문고리에 난 구멍에 열쇠를 끼워 돌리자 현관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아네타는 안내하듯 앞장 서는 릴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굳이 나오기 전에 불을 끈 이유가 뭘까.’
아네타는 왠지 그 말이 대충 둘러댄 말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곧 손님을 데리고 올 곳의 불을 남김없이 꺼 버린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또, 세르세의 말에 보인 반응도 좀 이상했어.’
버논이 크리스의 곁에 신뢰할 수 없는 자를 붙여 둘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네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날이 선 경계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실례로 귀족이나 황족이 암살을 당한 경우, 집사나 전속 사용인이 직접 범행을 저질렀거나, 일조한 경우가 상당수였다. 믿음과 충성이 비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녀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건 필히 확인해 봐야 할 문제라고.
릴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행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다른 마음을 품고 사는 자와 크리스를 함께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크리스의 집이었다. 그 말은 즉, 이 문제가 크리스의 신변과 직결된다는 뜻이었다.
만약 릴이 정말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크리스는 다칠 수도 있거나, 이미 다쳤을 수도 있다.
안 좋은 예감이 뇌리를 스치자 심장의 둔중한 울림이 귓가에서 둥둥댔다.
“크리스 님의 침실은 이쪽이에요.”
릴은 안으로 발을 들이기 무섭게 두 사람을 크리스의 침실로 안내하려 했다. 세르세는 그에 따르며 티 나지 않게 아네타를 뒤로 보냈다.
실내는 여전히 어둠에 잠긴 채였다.
‘등을 켜는 것을 잊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켜지 않는 건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던 아네타는 간절히 바랐다. 부디 자신이 느끼는 불안과 걱정이 모두 기우이기를.
그러나 그녀의 직감은 대부분 적중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아네타는 거실을 지나며 내부를 살피다 저도 모르게 멈추어 섰다. 익숙한 물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 까닭이었다.
‘저건 분명…….’
아네타는 그것이 떨어져 있는 소파 다리 옆으로 다가섰다.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온, 희미한 달빛은 그것의 형태를 더욱 정확하게 비추었다.
역시 제대로 본 게 맞았다. 아네타가 발견한 것은 크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던 호신용 구슬이었다.
‘이게 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거지?’
평상시엔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물건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심지어 오작동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뚜껑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설마. 그냥 떨어져서 분리된 거겠지.’
아네타는 엄습하는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뚜껑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드러난 곳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남은 곳은 하나다. 아네타는 하는 수 없이 바닥으로 몸을 낮추었다. 누군가가 말릴 새도 없이 행한 일이었다.
아네타는 두 팔을 짚어 상체의 무게를 지탱한 뒤 소파와 바닥 사이의 틈을 들여다보았다.
기껏해야 텅 빈 공간만 있을 거라고 여겼던 곳에서 아네타가 마주한 것은 누군가의 눈이었다.
경악한 아네타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날카롭게 찔러드는 시선으로 인해 처참하게 찢겨 나갔다.
머릿속에서 적색경보가 울렸다.
아네타는 너무 놀라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소파의 높이를 이용해 바닥에 엎드린 채 숨어 있던 남자를 응시했다.
온몸에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석고처럼 굳어 버린 몸은 제어를 잃었다. 목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그 역시 녹록치 않았다.
그러던 찰나였다. 존재가 발각된 남자가 더는 거칠 것이 없다는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아네타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굳어 있던 몸의 감각을 깨우는 것은 생존을 갈망하는 본능이었다.
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그 과정에서 손목을 삐었는지 일순간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아네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릴의 반응을 살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보고 놀란 세르세와 달리, 릴의 표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처음부터 한 패였어.’
아네타가 확신하는 사이, 빈틈을 노린 남자가 그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세르세는 목소리를 높여 아네타를 불렀다.
“아네타!”
다행히 아네타는 바닥에 주저앉는 것으로 머리채를 휘어잡기 위해 뻗어오던 손을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남자는 주저앉은 아네타를 제압하기 위해서 단검을 빼 들었다.
목표는 오직 그녀 하나뿐이라는 듯이.
하지만 호락호락하게 당해 줄 아네타가 아니었다.
아네타는 제 몸을 내리찍을 듯 휘둘러진 단검을 피해 몸을 옆으로 굴렀다. 그러곤 손에 쥐고 있던 호신용 구슬의 버튼을 눌러 그에게로 던졌다.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 구슬을 단검으로 쳐 내려 했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구슬에 흐르던 강한 전류가 단검을 통해 전도된 것이다.
“악!”
남자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팽개치듯 떨어뜨렸다.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 허우적대던 그는 곧 경련하며 쓰러졌다.
아네타는 정신을 잃은 남자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꺼내 든 단검이 자루까지 금속이라 다행이었다.
“젠장.”
상황을 지켜보던 세르세는 이번에도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네타를 공격한 남자와 한패임이 분명한 릴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였다.
다행히 릴은 아무런 신체 능력도 없었고, 제압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세르세는 릴의 두 팔을 뒤로 잡아 꺾은 뒤, 그대로 침실 문 옆의 벽으로 밀어붙였다.
“아네타.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없어.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함정에 걸린 것 같은데.”
걱정 어린 음성에 대꾸하는 아네타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반쯤은 각오하고 왔지만, 직접 겪으니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크리스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으니까.
“대체 이런 일을 벌인 목적이 뭐지? 크리스는 또 어디에 있고.”
아네타는 푸른 불길이 일렁이는 듯한 눈으로 릴을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릴은 의미 모를 표정으로 시선을 피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줄곧 닫혀 있던 침실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꺼져 있던 등이 켜지자,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시야에 섬광이 터지듯 번쩍이는 빛이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던 아네타는 아차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사이 침실에서 나온 또 다른 남자가 릴을 제압하고 있던 세르세에게 단검을 휘둘렀다.
세르세는 아주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제압하고 있던 릴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풀려난 릴은 재빨리 남자의 뒤로 가 숨었다.
세르세는 릴의 앞을 막아선 남자에게 대적하기 보다는 서둘러 뒤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네타는 침실 안에서 몰려나오는 이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이는 아네타에게 당해 기절한 제 동료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곱게만 자라신 줄 알았더니 여간내기가 아니십니다, 각하?”
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그들의 특징은 하나였다. 연회장에서 보았던 살수들과 달리, 움직임이 날래지 못하고 묵직하다는 것. 그 사실이 걸음걸이에서부터 티가 났다.
척 봐도 다른 것보다 힘을 우선시하며 무식하게 근육만 키워 온 것 같았다.
“용병인가?”
세르세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는지, 확신을 담은 투로 물었다. 그러자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바닥에서 떨어진 호신용 구슬을 주워들며 사람 좋은 척 웃어 보였다.
“예, 용병입니다. 고매하신 두 분 귀족 나리들과 다르게 돈만 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그런 의미에서,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각하와의 만남을 무척이나 고대하고 계시는 분이 있거든요.”
“내가 거절하겠다면, 어쩔 거지?”
“어쩌긴요. 너무 당연한 걸 물어보시는 거 아닙니까. 필요에 따라 무력을 써서라도 모셔 가야지요.”
대장 랜돌프가 능글맞은 투로 협박을 해오자, 그의 부하들은 일제히 손에 든 무기를 고쳐 쥐었다. 무력의 필요 여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아네타는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떠오른 방법은 거래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내세울 만한 것은 역시 돈이었다.
“우리를 데려다 바치는 조건으로 고용인에게 얼마를 받기로 했지?”
아네타의 물음에 랜돌프는 잠시간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물음의 의도를 가늠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네타는 어서 대답하라는 듯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