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음모 (3)
아네타가 장관이 된 이후, 막대한 양의 서류가 저택으로 옮겨지는 것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그때마다 이사벨은 저택의 사용인들을 모아다 소식을 알리며 말했다.
지시 없이 주인의 집무실이나 침실 주변에 걸음 하는 일을 삼가라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 다른 지시를 내릴 필요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었기에.
사용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아네타의 편의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배려 덕분에 아네타는 별다른 방해 없이 주어진 업무에 열중할 수 있었다.
서류 처리가 끝난 것은 그로부터 수일이 지난 뒤였다.
마지막 서류에 서명한 아네타는 곧장 침실로 향했다. 누구도 초주검이 된 그녀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상태였지만, 침대에 누웠다고 해서 바로 잠이 오진 않았다.
사람이 극도로 피로를 느끼면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고 했던가. 아네타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몸소 체감하며 한참이나 뒤척인 뒤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아네타가 깨어난 것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무슨 정신으로 침실까지 왔는지 모르겠네.’
눈은 뜨지 못하고 정신만 깨어난 상태에서, 아네타는 가만히 생각했다. 지난 생활은 정말이지 일 지옥과도 같았다고.
죄 지은 관리들이 죽으면 가는 곳이 그런 곳이지 않을까. 제가 생각해도 실없는 생각과 함께 아네타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별거 아닌 움직임 하나에도 몸이 축 늘어졌다. 마치 온몸에 쇠붙이를 둘러놓은 것 같았다. 눈꺼풀은 누가 와서 납땜이라도 한 듯 꼭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지금이 몇 시지?’
불규칙적인 생활로 인해 시간 감각이 마비된 듯 대략적인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나마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날짜뿐이었다.
이사벨이 식사를 가져다줄 때마다 시간을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그마저도 어림없었을 것이다.
‘이제 급한 일은 끝났으니 여유를 즐겨도 되겠지.’
억지로 몸을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서류에 코를 박고 지내는 것은 당분간 안녕이다. 아네타는 마음 편히 누워서 깨고 잠드는 것을 반복했다.
그를 두어 번쯤 반복하자 슬슬 정신이 맑아졌다. 아네타는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닫혀 있던 눈꺼풀을 들자 뻑뻑한 눈에서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침침한 눈을 수차례 깜빡이자, 흐렸던 시야가 회복됐다.
아네타는 가장 먼저 시간을 확인했다.
‘……4시.’
저게 오전을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오후를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다. 빛이 새어드는 것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커튼을 쳐 두었기 때문이었다.
아네타는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자꾸만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향한 곳은 창문 앞이었다.
그대로 손을 뻗어 커튼을 걷어 내자 가려져 있던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네타는 바람이라도 쐴 겸,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섰다.
밖으로 한 걸음 내딛기 무섭게 바람이 불어왔다. 선선한 공기와 함께 훅 끼치는 가을 내음은 그사이 계절이 더욱 깊어졌음을 알렸다.
아네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만에 제대로 보는 하늘이람.’
조금 더 일찍 몸을 일으켰더라면 좋았으련만. 올려다본 하늘은 마지막 퇴근 때 보았던 선명하고 높은 하늘과는 달랐다.
낮은 채도로 가라앉은 하늘은 마르고 건조했다. 그 위를 빠르게 떠다니는 구름을 눈으로 좇자니,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이 역시 사용인들의 배려 덕분이겠지만,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형용할 수 없는, 묘하게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아네타는 곧 형태 없는 감정의 끈을 내려 두고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보름이 조금 지났으니, 버논도 곧 돌아오겠네.’
버논에 이어 떠오른 것은 크리스였다. 애써 괜찮은 척하던 모습부터,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말을 더듬는 모습까지. 솔직하지 못한 반응들을 떠올린 아네타의 입매가 자연히 호선을 그렸다.
아네타에게 있어 크리스는 마치 어린 동생 같았다. 세상에 내놓기엔 아직 어리고 여려 작은 것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었다.
스물한 살의 크리스를 자꾸만 ‘아이’라고 칭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했었다는 사실은 기억 저편에 밀어 둔 지 오래였다. 굳이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었기에.
‘크리스는 잘 있으려나.’
아네타는 찬바람에 시린 팔뚝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크리스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안부를 살펴야겠다고.
그런데 그보다 먼저 크리스가 보내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가 찾아왔다. 소식을 들은 아네타가 직접 내려와서 살피자,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 보였다.
후작저를 찾아온 여인은 버논의 사용인으로, 영지에 있는 데번 남작가의 사용인들을 대신해 크리스의 편의를 봐주는 사람이었다.
“이름이…… 릴이라고 했던가?”
아네타는 언젠가 크리스의 입에서 들었던 이름 하나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릴은 아네타가 제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얼떨떨한 얼굴로 긍정했다.
“듣기로는 크리스가 보내서 왔다고 하던데. 혹시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송구하오나, 각하. 저는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다만?”
아네타는 말끝을 흐리는 릴을 눈빛으로 재촉했다.
“며칠째 방 밖으로 나오지 않고 계시다가, 오늘 겨우 각하를 모셔 와 달라는 부탁만 하셨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네타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밝고 성실한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까.
만약 자신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누군가가 크리스에게 해코지를 한 것이라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과 함께 서늘한 눈매에 날이 섰다.
아네타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한기는 한쪽에 시립해 있던 이사벨에게로 고개를 돌릴 때가 되어서야 가라앉았다.
“이사벨. 아무래도 크리스를 살펴보고 와야 할 것 같아. 마부에게 마차를 준비해 달라고 전해 주겠어?”
“예, 알겠습니다.”
이사벨은 지금쯤 말을 돌보고 있을 마부를 찾아 걸음을 서둘렀다. 그동안 아네타는 릴에게 양해를 구한 뒤 환복을 위해 자리를 떴다.
아네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이제 가지.”
간소한 외출복 차림으로 나타난 그녀는 줄곧 같은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릴을 데리고 저택 본관을 벗어났다.
해가 기울고, 사위를 휘감은 어둠이 세상을 삼키자 낮보다 깊은 적막이 공기처럼 맴돌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 귀퉁이가 비어 있는 달이었다. 불완전한 그것은 소리 없이 흘러가는 구름에 휘감겨 있었다.
그 사이로 내린 가느다란 빛줄기는 발치를 비추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어두운 정원을 지난 아네타와 릴은 마차를 기다리며 정문 앞에 섰다. 걸음이 멈추기 무섭게 두 사람 앞으로 마차 한 대가 멈추어 섰다.
제법 익숙한 모양새였지만, 아네타가 소유한 마차는 아니었다. 어느 가문의 마차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저 마차는 주인이 직접 디자인해서 제작을 맡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이었으니까.
아네타의 예상대로 마차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세르세였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린 아네타를 보며 놀란 기색을 비치더니, 곧이어 나타난 후작가의 마차를 보며 물었다.
“아네타, 어디 가는 길이었어?”
“크리스의 집에 가 보려던 참이야. 너는 후작저엔 어쩐 일이야?”
“지금쯤이면 네 업무가 끝났을 것 같아서. 또 무리하다가 앓아누운 건 아닌지 확인하러 왔어.”
“귀신같은 타이밍이네. 마침 오늘 새벽에 마무리 지었거든. 그런데 그게 걱정돼서 여기까지 와 준 거야?”
“……온 김에 겸사겸사 그림도 좀 보고 가려고 했지.”
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세르세는 끝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런 세르세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아네타는 팔짱을 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자보다 후자가 본 목적인 건 아니지?”
“뭐야. 티 났어?”
세르세는 능청스레 대꾸하며 본심을 숨겼다. 진심 대신 입 밖에 낸 말은 거짓투성이였다.
아네타는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 세르세 라폴리가 어디 가겠나 싶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 서둘러 가 봐야 할 곳이 있거든.”
아네타는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는 릴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세르세는 그제야 아, 하고 탄성을 냈다.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아네타가 크리스의 집으로 향하려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보고 싶어서 왔는데. 아쉽네.”
“정 아쉬우면 안으로 들어가서 보고 가. 이사벨에게 말하면 안내해 줄 거야.”
“괜찮아. 그림은 다음에 보러 오면 돼. 오늘만 날인 건 아니니까.”
세르세는 부드러운 말씨로 아네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의 녹빛 시선은 어느새 아네타에게서 그녀의 동행인에게로 옮겨 갔다. 세르세는 어쩐지 그녀가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자꾸만 마차를 곁눈질한다거나, 앞으로 모은 두 손을 옴지락거리는 것만 봐도 그랬다.
아네타는 그녀보다 두어 걸음쯤 앞으로 나와 있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데번 남작의 집에 간다더니, 거기에 무슨 바쁜 용무라도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방 밖으로 안 나온대서. 살펴보러 가는 중이야.”
“그래? 그럼 나도 동행해도 될까?”
“너도?”
아네타는 뜻밖의 말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을까 싶었다.
“고민, 걱정, 갈등. 이런 부정적인 문제들은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럴싸한 이유를 가져다 붙였지만, 본 목적은 아네타와 함께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것에 있었다.
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금물이었다. 세르세는 여전히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럼.”
아네타는 언제 망설였냐는 듯 그의 동행을 받아들였다. 곤란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르세는 타인의 감정을 곧잘 읽어 내는 편이니 분명 크리스에게도 도움이 될 터였다.
자신만 해도 리페의 갤러리에서 그에게 위로를 받지 않았던가.
“괜찮겠지?”
아네타는 말없이 상황을 살피던 릴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세르세의 시선은 그 뒤를 따랐다.
“……그럴 거예요, 아마.”
잠깐 뜸을 들인 릴의 입에서 애매한 긍정이 나왔다. 애초에 릴은 아네타의 결정에 반대하고 나설 위치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귀족이었고, 릴 자신은 집 주인도 아니었기에.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고, 우선 마차에 타자.”
아네타가 가리킨 마차는 코앞에 있는 세르세의 마차가 아닌, 자신의 마차였다. 세르세의 마차를 타고 가도 무관하지만, 그의 마부가 크리스의 집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기에 택한 일이었다.
세 사람이 모두 탑승한 것을 확인한 마부는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어둠을 박차는 발굽 소리가 점차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