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음모 (2)
그동안 무례를 저질러도 좋게 좋게 넘어가 주었더니, 이제는 끝도 모르고 선을 넘는다. 아네타는 더는 참아 줄 생각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난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 역시 중요시하는 사람이라서. 어쩌다 운이 좋아서 얻어 걸린 일로 남작을 돕고 싶지는 않네.”
아네타는 서슴없이 말을 건네면서도 평온을 유지했다. 에레즈를 대하는 낯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원작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행동했던 것뿐이면서 대가를 달라니. 이보다 터무니없는 일이 또 있을까.
그러겠노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마음이 들기는커녕, 외려 반감이 일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고맙다는 말은 해 둘게. 하지만 그뿐임을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남작을 돕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아네타는 칼로스에게 그 어떤 감정도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그럴 자격 또한 없었기에, 에레즈의 요구에 고민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용건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돌아가 주겠어? 내가 요즘 일이 많아서 이런 일에 할애할 시간이 없거든. 아, 원한다면 차는 마시고 가도 좋아.”
미우나 고우나 손님은 손님이다. 아네타는 이사벨이 내온 것으로 보이는 찻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제 몫으로 준비된 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순순하지 않은 언행이 제게로 몰아치자, 에레즈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러다 저 여자의 방해로 영영 칼로스와 이어지지 못하면 어쩌지. 불안과 함께 범람하듯 차오른 것은 화였다.
그가 아네타를 향해 드러낸 적의는 이름 그대로의 날것이었다. 유순한 눈매 아래로 자리한 녹안에 독기가 차올랐다. 그 사이로 스치는 이채는 이질적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아서.”
그러거나 말거나, 아네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레즈만 남겨 두고 응접실을 벗어나는 걸음엔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지금껏 상대해 준 것만으로도 주인 된 도리는 다 했다고 보는 그녀였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은 아네타가 나오기 무섭게 문을 닫아 버렸다. 자신들의 주인에게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손님을 떨쳐 내듯이.
여느 때보다 손발이 잘 맞는 시종들을 보며 이사벨이 흡족한 눈길을 보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평온은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파열음과 함께 깨졌다.
무엇이 깨졌는지야 뻔했다. 불쾌함을 능숙하게 감추어 낸 이사벨은 물었다.
“깨진 찻잔 값은 바우터 남작가에 청구할까요?”
“아니, 됐어. 어차피 사치하느라 바빠서 적자일 텐데. 저건 내가 깨트렸다고 치지 뭐.”
깨트린 찻잔 하나면 그가 오늘 걸치고 온 모든 걸 살 수 있을 텐데. 과연 에레즈는 그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건조한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던 아네타는 곧 등을 돌려 집무실로 향했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
돌아서는 그녀의 걸음 밑으로 제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혀 부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에레즈는 사납게 뜬 눈으로 그 뒤를 좇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네타의 모습이 닫히는 문 너머로 사라지자, 분노 어린 시선은 그녀가 가리켰던 찻잔으로 옮겨갔다.
“원한다면 차는 마시고 가도 좋아.”
아네타가 남기고 간 말이 귓가에 다시 한번 들려오는 듯하자, 에레즈는 참지 못하고 거칠게 손을 뻗었다.
“이 따위 것, 누가 마실까 봐?”
에레즈는 손에 잡힌 찻잔을 냅다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요란스레 튀어 오른 파편은 그리 멀지 않은 바닥 위로 흩어졌다.
당장 분풀이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지금껏 어설프게나마 이어 왔던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모멸감에 치를 떠느라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은 다 빼앗아 간 주제에 감히 나를 이따위로 대해? 조연이면 조연답게 쥐 죽은 듯 살 것이지. 저 시건방진 여자를 어쩌면 좋을까.’
앙다문 입술 사이로 까드득 이 가는 소리가 새었다. 당장이라도 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무슨 수가 없을까.’
약점이라도 떠올려 보려 노력했지만, 아네타에 대한 정보는 극히 한정적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주변인들은 죄다 요직을 꿰차고 있는 거물들밖에 없었다. 에레즈는 되도록 그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보복이 두렵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게 두려웠다면 아네타에게 맞설 생각 따위는 진즉에 버렸을 거다.
에레즈에게 있어 그들은 고귀한 삶을 이루고, 영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아네타를 처리한 뒤 그녀의 주변인들을 고스란히 제 인맥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에레즈는 주인공인 자신이라면 목표한 바를 실현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다. 자신을 위한 세계에서 자꾸만 분탕질을 치는 아네타만 없앤다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주변 사람을 이용하는 거겠지. 아네타 아데나워가 소중히 여기면서도, 이용해 먹기 좋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에레즈는 적합한 인물을 찾기 위해 궁리했다. 정확히 말하면 만만한 이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오다가다 몇 번인가 본 적 있는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머릿속에 반짝 불이 켜지는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애가 있었지.”
아네타가 특별히 아낀다는 소문이 자자한 여자, 크리스 데번. 본래 자신과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어야 했을 서브 여주를 떠올린 에레즈의 눈이 만족감에 빛났다.
‘서브 여주건 뭐건 아네타 아데나워랑 세트로 묶어서 보내 버리면 되겠네. 나 외에 다른 주인공은 필요 없으니까.’
바보 같을 정도로 올곧은 크리스는 쓰다 버릴 패로 적합했고, 더없이 완벽한 미끼였다.
에레즈는 지금껏 통제의 능력이 별 볼 일 없다고 여겼다. 원작에서도 에레즈의 능력이 제대로 사용된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가주들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같은 편인 사람들의 능력을 멈추게 해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습격 이후 변화를 겪었다. 에레즈는 똑똑히 깨달았다. 통제의 능력은 생각보다 쓸 만하며, 잘만 이용한다면 거슬리는 것들을 모두 치워 버릴 수 있음을.
‘난 분명 기회를 줬어. 그걸 뻥 차 버린 건 그 여자고. 그러니 내겐 아무 잘못도 없는 거야.’
애초에 남의 남자를 넘본 사람이 잘못이다. 에레즈는 아네타를 위험에 빠트릴 계획을 구상하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 순간,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찻잔의 파편 위로 미약한 빛이 내려앉았다. 그 빛은 에레즈가 눈치챌 새도 없이, 불투명한 표면 위에 요요히 머물다 흩어졌다.
***
가을이 깊어지자, 여름날 푸르렀던 들판은 어느덧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바람의 서늘한 숨결은 지상을 더듬어 꽃과 나무의 잎을 거두었고, 빈자리를 채우는 건 탐스러운 열매였다.
농민들의 손과 발이 더욱 분주해지는 시기는 무르익은 곡식이 고개 숙일 때였다.
고된 노동에 몸이 고단해도, 지난 계절에 흘린 땀과 노력의 결실을 거두는 그들의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났다.
반면, 그간의 결실을 정리하면서 죽상을 쓰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이었다.
관리들 사이에서 가을은 풍요와 수확의 계절이 아닌, 노동의 계절이라고 수식되었다.
백성들의 곳간에 쌓이는 것이 곡식이라면, 관리들의 책상에 쌓이는 것은 서류였다.
웃음이 떠나간 얼굴은 낱알을 털어 낸 볏짚처럼 건조했고, 색 바랜 낙엽처럼 혈색이 없었다.
아네타와 칼로스의 상황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다. 관리들의 손을 거친 서류들은 결국 각 부서의 장관에게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가 되면 장관들은 자택에서 서류를 처리하며 칩거하게 된다. 황궁까지 출퇴근할 시간에 서류나 한 줄 더 보라는 황제의 배려 아닌 배려 덕분이었다.
‘장관들의 편의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이건 거의 강제 연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다. 러셀은 장관들에게 고액의 녹봉을 받았으면 그에 대한 값을 하라고 요구했다.
가장 먼저 황궁에서 쫓겨난 사람은 칼로스였다. 그를 본 아네타는 직감했다. 다음은 보나마나 자신의 차례일 거라고.
애석하게도 아네타의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바로 어제 행정부 서류를 발티모어 공작저로 옮겼던 이들이 또 한 번 집무실 문을 두드린 것이다.
아네타는 복지부 서류를 수레에 실어 옮기는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서류가 어디로 옮겨질지야 뻔했다.
‘악덕 고용주의 횡포도 아니고.’
마치 골수까지 부려 먹히는 기분이었다. 아니, 부려 먹히고 있었다. 아무리 일중독으로 유명한 그녀라도 휴식 없이 주야장천 서류만 보고 있으니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러다 빠른 시일 내에 과로사 하겠는데.’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방금 또 늘었으니.
“크리스.”
아네타는 품 안 가득 서류를 끌어안은 채 멍하니 서 있는 이를 호명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크리스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어, 아네타 님. 이건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이쪽으로 주시면 됩니다.”
아네타 대신 나선 이는 사용인들이 서류를 빼돌릴 수 없게 감독하던 기사 중 하나였다. 눈치 좋게 다가온 그가 서류를 받아 들자, 크리스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저는 이만.”
두 사람은 웃는 낯으로 인사를 마쳤다. 별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버논이 보면 질투하겠다 싶은 그림이었다.
크리스가 가지고 왔던 서류는 때마침 들어온 빈 수레에 실렸다. 땅겨 오는 어깨를 통통 두드린 크리스는 수선스러운 집무실 내부를 돌아보다 물었다.
“오늘부터 자택에서 업무 처리를 하시는 건가요?”
“맞아. 이런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
“버논 오라버니께서 알려 주셨어요.”
하긴. 버논이라면 알아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일러 주었을 터였다. 납득한 아네타는 고개를 주억이며, 제 사촌의 안부를 물었다.
“버논도 요즘 많이 바쁘지?”
“네. 수입 문제로 무역부 장관님과 함께 루티본 왕국에 다녀오신다고 하셨거든요.”
“루티본까지? 일 끝내고 돌아오려면 시일이 좀 걸리겠네.”
“최소 보름은 걸린대요.”
버논의 출장 사실을 떠올린 크리스의 눈매가 아래로 축 처졌다. 눈에 띄게 기운이 없어진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챈 아네타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만약 기다리다 울고 싶어지거든 후작저로 와. 아무리 바빠도 어깨 정도는 빌려줄 테니까.”
“아네타 님도 참. 겨우 보름이에요. 저도 그 정도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정말?”
크리스는 짐짓 의연함을 가장했지만, 아네타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네타가 부러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자, 크리스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다, 당연히 정말이죠. 그러니 놀리지 말아 주세요.”
“알겠어. 이제 장난은 그만 칠게. 그러니 네 말대로 씩씩하게 기다리고 있길 바라. 알겠지?”
“……네. 그럴게요.”
크리스는 언제 원망의 시선을 보냈냐는 듯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크리스를 내려다보는 아네타의 눈빛에서 애정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