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음모 (1)
연회 이후,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살았던 에레즈는 자신의 능력이 발각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일들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칼로스가 여전히 아네타만을 바라보고 있는 탓이었다.
에레즈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칼로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네타를 보며 유혹하듯 웃던 것부터 자신의 청을 냉정하게 거절하다가도 아네타의 한 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바꾸는 모습까지.
하나같이 자신을 위해 행해져야 마땅한 일들이었으나, 칼로스는 영 엉뚱한 이에게 빠져 눈이 멀었다.
그에 대한 원망의 화살은 아네타 쪽으로 겨누어졌다.
“이건 다 남의 남자를 꼬신 그 여우 같은 여자 때문이야.”
언제나 그랬듯 모든 죄는 아네타의 몫이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작가는 왜 쓸데없이 그 여자에게 과분한 권력을 준 거야? 그것뿐이면 또 몰라. 없던 능력까지 생겨 버렸잖아. 당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네.”
하여간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자였다.
에레즈는 이를 득득 갈면서도 자신의 주인공 자리는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제 능력 앞에서는 아네타의 능력도 무용지물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지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내 발끝에도 못 미치지.”
에레즈는 혼자만의 자신감에 힘입어 턱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른 것은 아네타와 출신 불명의 화가를 대상으로 한 염문설이었다.
앞선 두 사람보다 더 그녀의 주제에 맞는 상대라고 생각한 에레즈는 코웃음 쳤다.
그 반반한 얼굴만 믿고 칼로스로도 모자라 세르세까지 꼬시더니 이제야 조금 제 주제를 깨달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친히 가서 격려해 줘야지.”
에레즈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얼굴로 당김줄을 당겼다. 인내심 없이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종소리가 요란스레 방 안을 울렸다.
“부르셨습니까?”
그 안하무인한 부름에 응한 것은 시종도, 시녀도 아닌 바우터 가문의 집사였다. 거듭되던 종소리가 멎자, 그 자리를 대신한 건 그만큼이나 쨍한 목소리였다.
“부른 지가 언젠데 왜 이제야 와?”
“죄송합니다.”
집사는 에레즈의 신경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도하게 몸을 굽혔다. 변명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익숙한 태도였다.
“됐고, 갈 곳이 있으니까 마차나 준비해.”
“예. 그런데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아네타 아데나워. 그 여자 저택으로 갈 거야.”
집사는 에레즈가 저보다 높은 신분의 아네타 이름을 아랫사람 부르듯 입에 담는 것에 흠칫 놀랐지만 곧 납득했다.
이 가문의 새 주인은 원래 그런 인간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집사가 주인에게 품는 생각치고는 퍽 불손했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에레즈는 그저 짜증스럽게 눈을 치켜뜰 뿐이었다.
“마부에게 알리러 가지 않고 멀뚱히 서서 뭐 하고 있어? 안 나가?”
“혹시, 약속은 잡고 가시는 겁니까?”
“내가 아네타 아데나워랑 약속 같은 걸 왜 잡아?”
“아무리 그래도 후작가인데, 기별은 넣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별은 무슨, 됐어. 내가 왜 그 여자 눈치를 봐야 해?”
“……그럼, 바로 마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을 말하는 투에 집사는 눈을 굴리다 순순히 물러났다. 눈치를 보는 게 아닌, 기본적인 예의였지만 말해 봐야 제 입만 아프다는 걸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익힌 그였다.
어차피 본인 얼굴에 먹칠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텐데 굳이 안 먹어도 될 욕까지 먹어 가며 설득할 이유는 없었다.
***
연이어 이어지는 아네타의 고소에 귀족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데이먼 백작 부인과 다를 바 없이 아네타가 누구도 고소하지 못할 거라고 여겼던 이들은 줄줄이 패소의 쓴맛을 봐야 했다.
그와 관련된 일에 당사자보다 더 바쁘게 움직인 사람은 알렉이었다.
아네타는 유능한 대리인을 둔 덕에 필요한 서류에 도장만 찍을 뿐, 고소와 관련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한가롭게 놀고먹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네타는 곧 밀려들 서류로 인해 바빠질 것에 대비해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을 미리미리 처리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다른 국가들이 겨울에 본격적으로 한 해를 마무리한다면, 성질 급한 러셀은 마지막 계절이 오기 전에 서류상의 모든 정리를 끝마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아마 여기에 고소까지 겹쳐졌으면 혼자 죽어났겠지.’
알렉이 아데나워의 대리인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네타는 선득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의 과거를 떠올렸다.
형제 중 누구보다 명석했던 알렉이 가문을 잇지 못한 것에는 오래 묵어 퀴퀴한 냄새마저 풍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장남이 아닌 사남이라는 그의 위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유란 말이지.’
하지만 그 덕분에 아네타는 알렉 렘리스라는 인재를 얻을 수 있었다. 알렉은 본디 정의로운 자였고, 타고난 눈치와 능력으로 해야 할 일들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런 그에게 아네타는 부정을 저지르라 강요하지 않았고, 보수 또한 아끼지 않았으니 서로 간의 신뢰가 깊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네타에게 있어 알렉은 가문의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자였다. 법적 대응에 직접 나서지 않고 그에게 전권을 위임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이를 대리인으로 삼았더라면, 자신은 누구도 믿지 못하여 몸을 혹사하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만 해도 섬뜩해 아네타는 양팔을 쓸어내렸다.
그러던 때에 날아든 것은 의외의 소식이었다.
아네타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던 상체를 곧게 세웠다.
“누가 찾아왔다고?”
“에레즈 바우터 남작입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또렷하게 들려오는 이름에 아네타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에레즈 바우터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지?”
기억을 되짚어도 에레즈가 저택까지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는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따로 만남을 가질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짐작 가는 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칼로스.’
높은 확률로 그와 관련된 일일 것이라는 직감이 서기 무섭게, 아네타는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그 적나라한 감정 변화에 에레즈의 방문을 알렸던 이사벨이 넌지시 물었다.
“기별 없이 찾아온 것은 크나큰 무례이니 돌아가시라고 전할까요?”
칼로스나 크리스라면 또 모를까. 친분도 없는 이가 막무가내로 들이닥쳐 아랫사람 찾듯 가주를 불러 달라 요구하는 것은 이사벨의 충심마저 건드렸다.
더군다나 두 눈에 누구를 향한 것인지 분명한 적의까지 서려 있었으니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아니. 일단 안으로 들이고 다과는 간단하게 준비해 줘.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 들어나 보지 뭐.”
“괜찮으시겠습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휴식을 취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걱정 마. 적당히 상대해 주다가 돌려보낼 테니까. 오래 얼굴 맞대고 있을 일 없어.”
그러고 싶은 상대도 아니라는 말이 이어지자 이사벨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곧장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해.”
아네타는 집무실 문을 나서는 이사벨을 보다 책상 위를 정리했다. 몸을 일으키는 것은 중요한 서류를 따로 간수한 뒤였다.
응접실로 향하는 걸음은 느긋했다. 누군가는 객에게 신분의 차이와 굴욕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치장을 다시 하거나 늑장을 부리는 등의 방법으로 시간을 끈다지만, 아네타는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애초에 상대는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자였으니까.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보게 된 것은 바쁘게 눈을 굴리는 에레즈의 모습이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가구 혹은 장식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작저의 수준을 가늠해 보려는 듯했다.
“날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죠?”
아네타가 말을 걸자 한 줌이나 될까 한 집중력마저 흐트러뜨린 에레즈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아네타는 마주한 눈동자가 애써 적의를 감추고 있음을 알면서도 무시했다.
“요즘 각하께서 어떤 화가와 잘 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서요. 축하라도 드릴까 하고 찾아왔죠.”
“그런 거라면 소식이 느려도 너무 느리네요. 게다가 정확성까지 떨어지고. 내가 헛소문을 퍼트린 이들을 모조리 고소했다는 사실, 모르고 있었나요?”
능청스레 축하를 입에 담는 에레즈에게 맞서는 아네타의 태도는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부러 입가에 유려한 미소를 그려 냈다.
“확실하게 못 박아 두죠. 추문은 거짓이고, 화가와는 단순한 후견인과 피후견인 관계예요.”
“그럼 라폴리 자작님과는요?”
“갑자기 세르세가 왜 언급되는지 모르겠지만 그쪽도 아닌 건 마찬가지고요.”
“뭐, 사실 그 두 분과 어떤 관계든 상관없어요. 각하께서 저를 도와주시기만 하신다면요.”
에레즈는 아네타의 단언에도 굴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 같은 태도에 아네타는 탄식을 삼켰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
“네. 실은 제가 발티모어 공작 전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쭉 사모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분 곁에 늘 각하가 계셔서 다가갈 수 없었어요. 그러니 제가 그분과 잘 될 수 있도록 각하께서 거리를 둬 주셨으면 해요.”
탓하는 걸로도 모자라 터무니없는 요구까지 하다니. 이러다 곧 대놓고 칼로스와 만나지 말라는 강요까지 하겠다 싶어 아네타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하.”
어이없음에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네타는 얼마 안 가 에레즈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친분 없는 가문에 기별도 없이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참 경우 없네요. 도무지 배려할 수 없으니 말은 낮출게요.”
그것은 그의 의사 같은 건 필요 없다는 통보였다. 배려 없는 자에게 배려를 보여서 뭘 하겠는가. 아네타는 이참에 존대를 그만두기로 했다.
“일단 이유부터 말해 보는 게 좋겠네. 내가 왜 남작을 도와야 한다는 거지? 단지 남작이 연모하는 이의 곁에 머물렀기 때문인가?”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어요.”
원작을 망친 사람은 아네타다. 무엇보다 맹신하는 가정이었으나, 그리 말하면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때문에 에레즈는 없는 능력을 근거로 들어 가며 제게 유리한 쪽으로 말을 바꾸었다.
“제가 본 미래에서 각하는 원래 아무런 능력도 발현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했어요. 그랬던 미래를 바꿔 준 게 바로 저예요. 그 덕분에 능력을 발현했고, 결과적으로 가문에 큰 이득이니 그에 대한 보답을 해 주시라는 거예요. 제가 원하는 형태로요.”
미래를 바꿨다. 아네타는 에레즈의 기세등등한 요구에 코웃음을 쳤다. 그가 원작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더욱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네가 본 것은 미래가 아니라 원작이겠지.’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아네타는 끝내 충동을 몰아냈다.
에레즈의 주장에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여전히 찬연의 능력을 믿는 척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그의 행동으로 인해 원작이 엉망이 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네 말이 맞다는 듯 무조건 고개만 주억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네타는 미세하게 굳어 있던 입매를 어렵지 않게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어떤 행동으로 미래를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이든 날 위해서 행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정곡을 찌르는 아네타의 말에 기고만장했던 에레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