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추문 (6)
알렉은 아네타의 지시대로 데이먼 백작가와 이덴 자작가를 찾았다.
아데나워 후작가의 대리인이 나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추문에 대해 떠들어 대던 이들의 기세는 빠르게 꺾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렉이 다녀간 자리마다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진 까닭이었다.
고소장만 받아 보게 되었다면 그나마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데나워 후작가 덕분에 누리던 것들을 박탈당했고, 그로 인해 사업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덴 자작가는 적어도 데이먼 백작가보다는 형편이 나았지만, 그뿐이었다. 애초에 이덴 자작의 사업이 성공한 이유는 아데나워에서 사들인 철 덕분이었다.
주재료로 사용되던 센더 광산 철의 명성에 업혀 가다, 공급이 완전히 끊기게 생겼으니 받게 되는 타격이야 뻔했다.
‘사업의 사활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네.’
아네타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뭐든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니까.
추문에 대한 대응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알렉은 아네타가 붙여 준 호위를 대동하고 이리저리 발품을 팔았다. 데이먼 백작과 이덴 자작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고소를 진행한 것이다.
그동안 엘렌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했다. 경거망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아네타는 적어도 그가 자신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판단이 서자 아네타는 사과를 목적으로 엘렌에게 저택으로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만남을 가지더라도 장소는 일관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사벨의 의견을 반영한 결정이었다.
“바쁠 텐데 시간 내 줘서 고마워요.”
아네타는 가장 먼저 요청에 응해 준 엘렌에게 감사를 전했다. 잠깐의 인사를 나눈 뒤에는 곧바로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 상황은 선처 없이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할 거예요. 그리고 이번엔 사과를 하나 해야 할 것 같은데.”
“만약 이 일에 관해서 사과하시는 거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걱정 말아요. 추문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나도 없어요. 내가 퍼트린 것도 아니고,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에 대한 사과는 그쪽에서 받게 해 줄게요.”
“추문 때문이 아니라면 무슨 연유로 사과를 하시겠다는…… 설마 후원에 관련된 건가요?”
엘렌은 아네타가 이번 일로 인해 후원을 취소할까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하던 말을 멈춘 채 물어 오는 엘렌의 낯빛이 어둡게 물들었지만, 다행히 아네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아니었다.
“후원과 관련된 일은 맞지만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는 말은 아니니 염려치 마세요. 내가 사과하고 싶은 건 후원 대상으로 엘렌을 선택한 이유 때문이에요.”
아네타는 잠시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골랐다. 이윽고 그동안 입을 열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리페의 갤러리에서 처음 엘렌 당신의 그림을 봤을 땐, 솔직히 깜짝 놀랐어요. 화풍이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화풍과 굉장히 흡사했거든요.”
아네타는 엘렌이 그린 그림들을 한 점 한 점 떠올렸다. 사그라든 줄 알았던 과거의 잔재가 머릿속에서 너울댔다.
“내가 당신을 길드까지 고용해 가며 찾아내고, 후원을 하기로 결정했던 건 그것 때문이었어요. 당신이 그린 그림에 다른 사람을 투영해서 본 걸로도 모자라,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밝혀서 미안해요.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아네타는 엘렌에게 건네는 사과 한 자 한 자에 진심을 실었다. 한 치의 거짓 없는 태도로 어떤 비난도 달게 받겠다고 말한 아네타는 기꺼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각하, 그. 이러지 마세요, 각하.”
그 스스럼없는 모습에 엘렌은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엉덩이를 붙였다 떼었다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자 애썼다.
“부디 고개를 들어 주세요. 각하께서 제게 사과하실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각하께서 제 그림 위로 누군가를 덧대어 보고 계셨다는 사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점에 대해서 너무 심려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네타가 동의할 수 없다는 기색을 보여도 엘렌에게 있어 이견은 없었다. 엘렌은 더 확고한 눈빛으로 아네타를 응시했다.
“사실 얼마든지 그러셔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님과 화풍이 닮은 덕분에 저는 예외적인 경우로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아네타는 본래 여성 화가들만을 후원해 주던 사람이었다. 만일 화풍이 조금이라도 달랐다면 이처럼 후원을 받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엘렌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제가 그 점을 이용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침묵하고 있었으니 각하께 사과 받을 자격은 없어요.”
엘렌은 잠시 아네타의 눈치를 살폈다. 그와 별개로 이어지는 말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그저 그림만 그릴 수 있으면 돼요.”
전에 없던 확고함이 완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네타는 그에게서 또 한 번 엘레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럼 저는 이제 각하께 무엇을 해 드리면 될까요?”
“해 주다니, 무슨 말이죠?”
“제게 무언가를 원하고 계신 건 아닌가 해서요. 가령 앞으로 그리게 될 그림들을 원한다거나.”
“그럴 일 없어요.”
어머니를 향한 향수 때문에 데리고 왔으니 그림들을 요구하리라 여겼던 걸까. 아네타는 그리 짐작하며 단호하게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았다.
“한 가지 오해를 한 것 같네요. 나는 당신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본 건 맞지만, 무언가를 바라고 후원을 시작한 게 아니에요. 날 위한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할 생각도 없어요.”
그럴 목적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림을 모두 매입하겠다는 조건을 걸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또 다른 조건을 걸어, 그것을 기반으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방법도 있었다.
아네타는 그가 얼마를 요구하든 지불할 능력이 되었으니까.
그런 간편하기 짝이 없는 수단을 두고서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을 할 리가. 아네타는 해명을 이어 나갔다.
“내가 당신을 찾은 건 내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꿈을 당신만이라도 이루길 바라서였어요. 꿈을 이루고,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들을 지켜보며 도움을 주고 싶었고요. 그게 내 진심이자, 진실이에요.”
아네타는 잠시 숨을 고르며 엘렌과 눈을 맞추었다. 자신과 같은 색채를 보는 아네타의 시선은 더할 나위 없이 진중했다.
“그러니 당신은 다른 걱정 없이 그저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만 하면 돼요.”
이는 비단 엘렌에게만 해당되는 감정이 아니었다. 아네타는 자신이 후원하는 화가들에게 같은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한 진심이 담긴 말에 엘렌은 놀란 눈으로 아네타를 응시했다.
놀란 이유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아네타는 끝내 그를 알 수 없었다. 때마침 누군가가 열려 있던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까닭이다.
“아네타. 당신이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왔어.”
“칼로스.”
칼로스는 무언가를 손에 말아 쥐고 있었다.
안으로 성큼 발을 들인 그는 자신보다 먼저 온 선객이 있다는 언질을 들었는지, 자연스럽게 아네타의 맞은편에 앉은 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선객이라는 이가 소문의 화가라는 사실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게 인사를 건네는 엘렌을 눈에 담는 순간 칼로스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릭의 장례식 때 보았던 엘레나의 초상화가 그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생김새는 엘레나와 같고, 색채는 아네타와 같다. 아데나워의 숨겨진 핏줄이라고 해도 믿을 광경에 칼로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흡사 남매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질투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칼로스는 아네타가 엘렌에게 건네었던 진심 어린 말이 떠오르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그를 겉으로 드러내는 우를 범하는 일 또한 없었다.
“어쩐 일이야?”
“일전에 당신이 부탁했던 일에 대한 결과를 말해 주려고 왔어. 그 전에…… 손님은 돌려보내야 할 것 같은데.”
입은 분명 아네타를 향해 말하고 있지만, 시선은 엘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엘렌은 칼로스가 원하는 바를 눈치채곤 아네타를 바라보았다. 동의를 구하는 시선에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미안했다는 말을 끝으로 엘렌을 보내자, 줄곧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칼로스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엘렌은 왜 보내라고 한 거야? 최초 유포자에 관한 일이라면 함께 들어도 상관없을 텐데.”
일단 그의 말에 따랐던 아네타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의문을 표했다.
“글쎄. 별로 내키지 않아서라고 해 두자.”
이유는 생각보다 뜨뜻미지근했다. 칼로스는 이에 대한 화제를 넘기고자 본론을 꺼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당신이 말해 준 시기를 토대로 추문의 최초 유포자를 찾았어.”
“벌써? 적어도 이주 정도는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는데.”
아네타는 목표한 것보다 시일을 더 단축할 수 있겠다는 계산과 함께 물었다.
“누구였어?”
군더더기 하나 붙지 않은 깔끔한 질문이었다.
“이름은 제임. ‘트리스턴’이라는 삼류 찌라시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는 기자라더군.”
칼로스의 입에서 어딘지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아네타는 기억을 더듬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마담 리페의 갤러리에서 만났던 형편없는 기자를 떠올린 아네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제임이라는 기자, 혹시 ‘허마이오니’라는 신문사에서도 일하지 않았어?”
동명이인일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칼로스는 긍정을 돌려주었다.
“그래. 알아보니 당신 때문에 번듯한 직장을 잃었다고 한탄하고 다닌다던데.”
“내 앞에서 하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기에 물 좀 먹였더니 윗선에서도 벼르고 있던 모양인지 바로 잘리더라고. 그런데 그런 자를 받아 주는 곳이 또 있을 줄은 몰랐네.”
이리도 작은 곳에서 시작되었으니 그간 찾지 못했던 것도 당연했다. 이 세계는 이전에 살던 세계와 다르게 하나의 정보를 찾으려면 수일이 걸리곤 했으니까.
“신문사 이름 뜻부터가 소란이잖아. 이름에 걸맞는 저급한 찌라시를 기사랍시고 싣는 곳이더군.”
칼로스는 둥글게 말아 들고 있던 신문을 펼쳐 아네타의 앞에 놓았다. 터무니없는 헛소리만 줄줄이 늘어놓은 그것엔 아네타에 관한 찌라시도 실려 있었다.
“날짜는, 지금껏 봐 온 기사들 중에 가장 먼저 작성됐네.”
아네타는 기사를 작성한 이의 이름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단에는 제임의 이름이 버젓이 쓰여 있었다.
“기사 작성뿐만이 아니야. 직접 소문까지 내고 다닌 모양이더군. 증인은 이미 확보했으니 걱정 말고.”
“헛수작도 참 정성껏 부렸네. 바쁜 와중에도 도와줘서 고마워, 칼로스.”
“고맙긴. 당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야.”
아네타의 감사 인사에 칼로스는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더는 자신이 이 일에 나설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고소는 빠르면 내일 바로 들어가게 할 거야. 엘렌에게도 사과하게 해야겠지.”
그런 와중에 들려온 엘렌의 이름은 칼로스의 질투심에 작은 불을 지폈다.
“아네타. 그 화가, 너무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추문 때문에?”
“아니.”
“그럼?”
아네타가 화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굳이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칼로스는 타오르는 질투심을 감추기보다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택했다.
“질투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