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추문 (5)
예고 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은 데이먼 백작이었다.
헐레벌떡 들어온 백작은 살벌하기 그지없는 칼로스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각하께서 투자금을 회수하고, 저를 고소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부인은 몰라도, 저는 그런 소문을 낸 일이 없습니다!”
백작의 의도는 투명했다. 부인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 자신만이라도 아니라고 잡아떼어 피해를 줄여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눈에 훤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갈 리가 있나. 아네타는 백작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더 해 보라는 듯 무감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이 없자, 데이먼 백작은 더 안달이 난 모양새로 안절부절 말을 이었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이는 분명 데이먼 백작가와 아데나워 후작가의 관계를 질시하는 자가 벌인 음모일 겁니다.”
세 치 혀는 포기를 모르고 결백을 주장했다. 자신의 잘못은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돌린 채였다.
“후작가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제가 어찌 감히 고귀하신 각하를 대상으로 그런 천박한 만행을 저질렀겠습니까?”
과연 데릭의 발치에서 굽실대며 투자금을 받아 낸 이다웠다. 염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아네타는 환멸을 느끼며 혀를 찼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더니.’
지금의 상황에서 그보다 더 절실히 와닿는 말은 없었다.
더 들어 줄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아네타는 눈앞에서 백작을 치워 버리고자 입을 열었다.
“감히, 저질렀던데요. 그 천박한 행동.”
“아닙니다. 오해가 분명합니다, 각하!”
“오해라…….”
아네타는 부러 말꼬리를 흐리며 데이먼 백작을 응시했다. 자리조차 권하지 않아 텅 빈 공간에 덩그러니 서 있던 데이먼 백작은 그 의미 모를 행동에 입술을 짓씹었다.
위치상 그녀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자신이 그녀의 발치에 엎드려 빌빌대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그 감상을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네타가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책상 위로 툭 던져 올린 것이다.
손을 떠난 봉투는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책상 끄트머리에 놓여졌다. 아네타는 그것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걸 보고도 그 말이 나올까 싶네요.”
“그게…… 뭡니까?”
“직접 확인해 보세요.”
아네타는 친절하게 설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명확하면서도 냉랭한 태도에 데이먼 백작은 주춤대며 다가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왠지 모를 불안이 그의 등줄기를 훑었다.
봉투를 여는 손을 버벅거리던 것도 잠시, 백작은 곱게 접혀 있던 여러 장의 종이를 펼쳐 들었다.
안 좋은 예감은 늘 빗나가질 않는다. 내용을 읽어 내리는 백작의 얼굴은 갈수록 창백하게 질렸다. 그리고 마침내 시선이 마지막 한 줄에 찍힌 마침표에 달했을 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것들이 팔랑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네타는 낱장이 그려 내는 궤적을 눈으로 좇다 말했다.
“그건 그날 백작과 함께 있던 무리 중 하나가 적은 증언이에요. 물론 자필 증언은 따로 보관하고 있고요. 증거가 이렇게 버젓이 존재하는데, 이게 과연 백작의 말대로 오해이고, 누군가의 음모일까요?”
증거라는 말에 다가온 칼로스가 몸소 흩어진 종이를 주워 들었다.
서둘러 살핀 종이에는 아네타의 말대로 백작이 허위 사실을 퍼트린 장소인 술집의 이름과 시간대, 계산서, 그리고 종업원의 증언까지 적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칼로스는 데이먼 백작이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술을 마셨는지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음을 확인했다.
까득. 거친 소리가 맞물린 이 사이로 새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육신을 갈가리 찢을 듯 날카롭게 벼려진 눈초리가 백작에게로 향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런……!”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이 정도 조사도 안 해 보고 근거도 없이 백작을 고소하려 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네요.”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던 데이먼 백작은 곧이어 들려오는 아네타의 날 선 목소리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백작은 이제 주먹 쥔 손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보고 동정이나 안쓰러움, 그 비슷한 감정이 생길 리가 없었다. 아네타는 여지없이 반감을 드러냈다.
“천박한 만행이라고 했던가요? 자신의 행동이 어떤지 스스로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요. 아, 알면서도 행했으니 죄질이 더 나쁘다고 해야 하려나.”
잘못했다고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모자랄 판에 거짓말이라니. 그런 이를 용서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소와 투자금 회수는 예정대로 진행할 생각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취하할 생각은 없으니 쓸데없는 기대는 품지 않길 바라요.”
아네타는 자신의 의사를 더욱 단단히 못 박았다. 쓸데없는 짓 말고 돌아가라는 의미였다.
아무리 봐도 용서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데이먼 백작은 자존심을 내던졌다. 앞선 감상처럼 돌연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린 것이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빌겠습니다. 부디 투자금 회수만은 봐주십시오! 지금 그걸 회수하면 제 사업이 무너지고 말 겁니다!”
백작이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칼로스는 아네타의 기색을 살폈다. 역시나 아네타는 꿈쩍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데이먼 백작이 자존심을 버렸든 무릎을 꿇었든 아네타에게는 얻을 것 하나 없는 일이었으니.
“투자금을 내어 준 건 오래 전의 일인데, 아직도 그것에 기대어 있을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닌가요? 회수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데요. 더 유지할 가치, 없잖아요.”
동정심 자극을 위해 했던 말은 역효과를 불러 왔다.
백작은 엎드렸던 상체를 번쩍 들어올렸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울상이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무릎까지 꿇었음에도 하등 소용없자 열이 치솟는 모양이었다.
‘역시 꾸며 낸 표정이었어.’
아네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리도 엉성한 자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 더 이상했다.
“아무리 제가 실수를 했다고 해도, 정말 너무하십니다. 각하께서 진정 아버님을 생각하신다면 제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전대 후작께서 결정하신 일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끊어 버릴 작정이십니까?”
백작은 자신의 잘못을 실수로 치부하며 언성을 높였다.
큰 소리를 낼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그를 분간하지 못하는 모습에 칼로스가 나서려 했지만, 그보다는 아네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
아네타는 그가 데릭까지 운운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은 아네타가 소리 없이 밀린 의자 앞에 서서 자신을 말없이 노려보자, 제가 잡은 것이 상황을 타개할 동아줄이라고 착각하며 기세등등하게 아네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잡은 줄은 구원의 동아줄이 아닌, 썩은 동아줄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아네타는 보란 듯이 코웃음 쳤다.
“그 말을 들으니 일말의 망설임도 남지 않네요. 차라리 다른 핑계를 대지 그랬어요. 내가 내 아버지와 사이가 나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요? 설령 사이가 좋았다고 해도, 아버지가 그랬다는 이유로 나 역시 그 상황을 유지할 이유는 없죠.”
백작은 뒤늦게 아차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낭패감이 서린 얼굴에 아네타는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세요. 무릎 꿇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이미 쏘아진 화살과 엎어진 물은 되돌릴 수 없다. 입 밖으로 뱉어 낸 말 또한 그와 같은 결이었다.
그러나 돌아가란다고 돌아갈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기별 없이 집무실에 찾아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화가 난 데이먼 백작은 씩씩대면서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백작은 지금 자신의 처지를 잊은 것 같은데.”
백작이 다시 한 번 큰소리를 내자 칼로스는 이번에야말로 그를 제지하고 나섰다.
“엄연히 가해자인 주제에 이따위 행패라니. 아무래도 백작은 아데나워 후작과 내가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로군.”
칼로스는 아네타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하듯 앞으로 나섰다. 내려다보는 기세는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계속 여기서 이러고 있을 생각이라면 말리진 않겠다. 그 대신, 사지 멀쩡하게 돌아가는 건 포기해야 할 거야. 내가 백작에게 악감정이 좀 있어서 말이지.”
백작은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렸다. 시선은 자연히 칼로스의 팔목에 있는 창공에 닿았다. 그런 그에게 칼로스는 위협적으로 성큼 다가섰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어쩔 거지?”
“도, 돌아가겠습니다!”
잠자코 있던 칼로스까지 나서자 더 버티고 있을 재간 따위는 없었다. 데이먼 백작은 눈이 마주치면 능력이라도 발현할세라 뒤 한 번 돌아보지 못하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칼로스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모습을 매서운 눈으로 좇았다. 저런 이들은 꼭 힘의 차이를 내보여야만 꼬리를 말고 도망간다.
지긋지긋한 족속들이 아닐 수 없다고 여긴 칼로스는 백작의 모습이 사라지자 몸을 돌렸다. 누구라도 하나 찢어 버릴 듯한 분위기는 아네타를 눈에 담기 무섭게 사그라들었다.
“아네타. 괜찮아?”
칼로스는 한결 유순해진 얼굴로 아네타에게 물었다.
“걱정 마. 조금 피곤할 뿐이야.”
안 괜찮을 이유는 없다. 아네타는 그리 덧붙이며 뻐근한 눈가를 두어 번 누르다 손을 거두었다.
그런 그녀를 보니 칼로스는 자연히 걱정이 앞섰다. 광산과 관련된 다른 하나도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건 아닐까. 아네타가 어련히 잘 대처하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별수 없었다.
“이 일, 하루 빨리 마무리 지어야겠어. 가뜩이나 할 일이 많은데 자꾸 시간을 뺏기게 되네.”
“좋은 생각이야. 나도 도울게.”
“돕겠다니, 어떻게?”
“내가 이 일에 관여하는 걸 허락해 준다면, 일단 당신이 찾고 있다는 최초 유포자부터 찾아볼 생각이야.”
“괜찮겠어? 서류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많이 바쁠 텐데.”
아네타는 고개를 옆으로 빼 칼로스의 책상에 쌓인 서류를 눈에 담았다.
그녀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긴 했지만 그에 비하면 여유 있는 수준이었다.
그만큼 칼로스는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칼로스가 돕는다면 분명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 붙일 시간도 없을 그에게 이런 부탁을 해도 될까.
아네타는 갈등했고, 칼로스는 그를 눈치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문제야. 내가 아니면 누가 돕겠어.”
실은 칼로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아네타를 도울 이는 한둘이 아니었다.
아네타를 돕겠다고 나설 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를수록 칼로스는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특히 자신과 같은 감정을 품어 버린 세르세에게 만큼은.
욕심이라고 해도 좋다. 그는 아네타와 관련된 일은 무엇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아네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최초 유포자 찾는 일만 도와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