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추문 (4)
안 좋은 추문이 돌고 있다는 이유로 몸을 사리는 건 물어뜯기 좋은 구실을 내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겁도 없이 떠들어 대는 이들을 상대로 칼을 빼어 들기로 결정한 아네타는 대대적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추문은 자신과 하등 관계없는 것들이며, 허위 사실을 유포할 경우 그에 따른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그러나 그렇게 강경 대응을 예고해도 직접 겪기 전까지는 천지 분간 못 하고 입을 놀리는 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네타는 그런 이들을 위해 바쁜 와중에도 대리인인 알렉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최초 유포자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했으니, 일단 가장 악질적인 소문의 유포자부터 잡아요.”
그 말에 알렉은 기다렸다는 듯 데이먼 백작과 이덴 자작을 꼽았다. 악질적일뿐더러 아데나워의 덕을 본 주제에 아네타에 대해 떠들어 댄 것이 괘씸한 까닭이었다.
아네타는 알렉이 꺼낸 두 이름을 곱씹으며 가문끼리의 이해관계를 떠올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관계를 무로 돌려 버리는 것은 그녀의 말 한 마디로도 충분했다.
“내일 바로 데이먼 백작가에 아데나워의 이름으로 들어가 있는 투자금 전액을 회수하세요. 이덴 자작가에는 더 이상 철을 공급하지 않는 걸로 하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아네타는 여유 기간도 주지 않고 하루아침에 모든 관계를 엎어 버리라고 명했다.
“이렇게 갑자기 물리시면 어느 정도의 손해는 감수하셔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알렉의 염려가 무색하게 아네타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그러니 그 문제는 신경 쓰지 말고 진행하세요.”
아데나워의 철광산은 황제가 직접 거래를 제안할 만큼 순도 높은 철이 나오기로 유명했다.
손해를 메꿀 만한 돈을 싸 들고 거래를 청할 이들이 줄을 섰으면 섰지 결코 팔리지 않을 일은 없었다.
투자금 회수 역시 망설일 이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자금을 대 준 이는 아버지 데릭이었으니까.
아네타는 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데이먼 백작을 떠올렸다. 하도 사정사정하기에 데릭이 죽고 없는 지금까지 회수를 미뤄 주었더니 돌아오는 결과가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니 더는 봐줄 이유가 없지.’
아네타는 짧게 혀를 차며 알렉이 건네는 서류에 날인했다.
알렉을 부른 보람은, 논의를 마치고 그를 몸소 배웅하러 나서는 길에 느낄 수 있었다.
아네타는 모퉁이를 돌기 전 들려오는 음성에 뒤따라 걷던 알렉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 앞으로 길게 뻗은 팔에 가로막힌 알렉은 의아한 얼굴로 아네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참 말세예요, 말세. 출신 성분도 모르는 그런 하찮은 화가 따위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니.”
귓가에 꽂히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알렉의 시선이 돌아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오른쪽으로 꺾이는 모퉁이. 아네타의 시선은 이미 그곳에 닿아 있었다.
말하는 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아네타는 이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서기 보다는 잠자코 서서 들려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발티모어 공작 전하와 이혼한 이유도 그 화가 때문인 것 같아요. 왜, 후작 각하께서 이혼 직후에 혼자 여행을 떠났었잖아요. 그때 남몰래 같이 다녀왔던 걸지도 모르죠.”
하필 여행지라고 알려진 곳도 국외, 그것도 예술의 도시라 불리는 리테아였다. 필시 그 화가를 위해 택한 여행지가 아니겠냐며 호들갑을 떨어 대는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소설을 한 권 써 내릴 듯 쏟아졌다.
그러자 그를 제지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부인? 요즘 같은 때에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큰일 나요.”
“요즘 같은 때가 어느 때인데요?”
“아데나워 후작께서 강경 대응하겠다고 하셨잖아요.”
“아아, 난 또 뭐라고. 설마 그걸 믿는 거예요?”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건네어지는 물음에 아네타는 소리 없이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베티어 자작 부인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반면, 추문에 대해 떠들던 데이먼 백작 부인은 그를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고소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다들 걸핏하면 한다는 소리가 그거잖아요. 마지막엔 결국 사실이었다는 게 밝혀지고 고소는 이루어지지 않는 게 부지기수죠. 분명 그분도 별반 다를 게 없을 거예요.”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확신에 차 고개를 쳐드는 모습에선 한 점 부끄럼도 묻어나지 않았다.
두 팔을 교차해 팔짱을 끼고 있던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백작 부인의 말은 반은 틀렸지만, 반은 맞았다. 그녀의 말대로 요즘 개나 소나 고소 타령을 하는 실정이었으니까.
‘그러니 나처럼 무고한 사람까지 피해를 보지.’
그러나 그녀가 말한 경우는 아네타와 하등 관계없었다. 켕기는 게 없는데 무엇이 두려워 고소를 저어하겠는가.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무슨 일이 있어도 부인 말대로 될 일은 없을 거예요.”
아네타는 가만히 듣고 있던 것을 멈추고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이던 기세가 잦아들고, 두려움에 질린 얼굴이 뒤를 돌아본다.
“가, 각하. 언제부터 그곳에 계셨던 건가요?”
“언제부터긴요. 부인께서 터무니없는 추측을 늘어놓을 때부터죠. 뭐랬더라…….”
아네타는 자신이 들었던 말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읊어 주었다. 한 자 한 자 평온한 투로 내뱉는 말들에 백작 부인의 낯빛은 하얗다 못해 푸른 기가 돌았다.
제가 내뱉은 말임이 분명한데도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양 입술을 덜덜 떨어 대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저희 이야기를 엿듣고 계셨던 건가요?”
함께 있던 베티어 자작 부인은 ‘저희’라는 말로 한데 묶이기 싫은 눈치였으나, 백작 부인에겐 그녀의 반응까지 살필 여유는 없었다.
“그게 그렇게 되나요? 나는 또, 주변 신경 쓰지 않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에 다 들으라고 하는 말인 줄 알았지 뭐예요.”
아네타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지적은 하지 않았다. 끼고 있던 팔짱을 풀자, 백작 부인은 그 별거 아닌 움직임이 제겐 큰 위협이라도 된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뭐, 잘 됐어요. 안 그래도 헛소문을 퍼트리는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줄 생각이었는데. 부인께서 그 역할을 해 주시면 되겠네요.”
“본보기라니. 그게 무슨.”
“알렉, 인사해요. 당분간 자주 보게 될 테니까.”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말은 들어 줄 가치도 없었다. 아네타는 가차 없이 말을 끊어 내곤 잠자코 서 있던 알렉을 불렀다.
그러자 알렉은 제가 달마다 챙기는 급료의 값을 해야 하는 순간이란 걸 깨닫고 앞으로 나섰다.
“아데나워가의 대리인인 알렉 렘리스라고 합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유감이군요.”
알렉 역시 아네타의 사람인지라 백작 부인을 향한 감정이 좋을 수 없었다. 가볍기 짝이 없던 행동을 은근한 투로 꼬집어 말하자, 그가 나선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챈 베티어 자작 부인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아네타는 그 모습을 힐끗 보다 말았다. 자신에게도 불똥이 튀면 어쩌나 걱정하는 기색이었으나, 백작 부인을 만류하던 그녀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었다.
“귀댁으로는 내일 바로 고소장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알렉은 데이먼 백작 부인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과 표정의 간극을 느낀 백작 부인은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고소장이라고 했어요?”
“네. 고소장이라고 했어요.”
물음에 답한 건 알렉이 아닌 아네타였다. 주저 없는 긍정에 떨리던 입술이 떡 벌어졌다.
“말했잖아요. 부인 말대로 될 일은 없을 거라고.”
“…….”
“역시 세상은 남부끄러울 일 따윈 안 하고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야 이런 터무니없는 추문이 돌아도 떳떳하게 무고를 증명할 수 있으니까.”
백작 부인은 불시에 날벼락을 맞은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아네타는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미리 말하지만 선처를 바라진 마세요. 들어줄 마음도 없을 뿐더러, 내가 지금 여기서 눈감아 주면 부인 말대로 추문이 사실이기 때문에 고소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길 테니까요.”
아네타는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백작 부인을 응시했다. 그녀는 차디찬 시선에 움츠러들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부디 용서해 주세요. 남편이 알게 되면 큰일 날 거예요. 주변 사람들 앞에서도 면이 서지 않을 거고요. 제발…… 제발 고소만은 하지 말아 주세요.”
남편이라는 말에 데이먼 백작이 퍼트린 소문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네타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부부가 나란히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다니, 정말이지 그 남편에 그 부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그럼…….”
선처는 없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무슨 희망을 품은 것인지, 백작 부인이 희미하게 낯빛을 밝혔다. 그에 응해 줄 생각이 없는 아네타는 더 큰 절망을 안겨 주었다.
“백작에게도 고소장을 보낼 예정이거든요. 자신도 같은 일로 고소를 당하는 마당에 부인에게만 뭐라고 하지는 않겠죠.”
부부가 나란히 고소도 당하고.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아네타는 그리 생각하며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반쯤 돌렸다.
“이참에 투자금도 함께 회수할 생각이니 백작에게 그리 알라고 전해 두세요. 그럼 난 이만.”
돌아서던 중 시선이 마주친 자작 부인에게 짧은 눈인사를 건넨 아네타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자작 부인은 아네타가 제게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이자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에 반해 안달이 난 데이먼 백작 부인은 돌아선 등 뒤에 대고 끊임없이 사정했다.
용서를 구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음이 분명한데도, 아네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따라 걸음을 옮기던 알렉을 배웅해 돌려보낸 아네타는 곧장 레녹스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문고리를 당기며 안으로 들어서자, 반나절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던 칼로스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 왔어?”
아네타는 여상한 투로 물으며 책상으로 가 앉았다. 알렉과 논의를 하느라 잠시 미뤄 두었던 서류가 있어 그와 마주 앉을 새도 없었다.
“방금. 당신은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알렉을 배웅하느라 정문에 잠깐.”
칼로스는 제게도 믿음직한 인상을 주던 그녀의 대리인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가 황궁까지 와야 했던 이유. 즉, 아네타가 직면한 상황을 상기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이야기는 잘 끝냈고?”
“어. 유포자는 모조리 고소하려고.”
아네타는 알렉과 논의해 결정한 사항은 물론 그를 배웅하러 가는 길에 목격한 일 또한 말해 주었다.
그녀가 더러운 추문에 휩싸인 걸로도 모자라 상황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다는 말에 칼로스의 표정은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래서 가만히 뒀어?”
치미는 분노를 삭이며 칼로스는 허벅지 위로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툭 불거졌다.
“아니. 내가 어디 당하고만 있을 사람인가. 남편인 데이먼 백작이랑 나란히 고소하겠다고 했어. 겸사겸사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는 통보도 했고. 얼마 안 가서 명예든 재산이든 남아나는 게 없을 거야.”
지금쯤 데이먼 백작도 소식을 전해 듣지 않았을까. 아네타는 그리 생각하며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낱장을 서너 장 쯤 넘겼을까.
불청객이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