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추문 (3)
아네타와 엘렌은 첫날 이후 두 차례 더 얼굴을 마주했다.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는 언제나 아데나워 후작저였고, 오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걸, 내게 선물하고 싶다고요?”
아네타는 어두운 천에 감싸인 채 제 앞에 놓인 두 점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엘렌이 제도를 떠나 있는 동안 그린 그림이라며 가지고 온 작품들이었다.
“네. 좋은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약소하게나마 감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드릴 수 있는 게 제가 그린 그림뿐이라 죄송하지만…… 받아 주시겠어요?”
엘렌은 거절을 염려하며 불안스레 두 손을 마주 쥐었다. 걱정으로 물든 눈동자는 감히 눈앞에 있는 이에게 닿지 못한 채 바닥 언저리를 배회할 뿐이었다.
“약소하다는 말엔 동의할 수 없지만, 선물은 고맙게 받을게요.”
애초에 그림만 보고 후원을 결정했는데 그보다 가치 있는 대가가 또 있을까.
아네타가 스스럼없이 선물을 취하자, 엘렌의 낯빛이 단숨에 밝아졌다.
“어떤 그림인지 보고 싶은데.”
“아, 제가 풀어드리겠습니다.”
“손님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는 없죠. 그저 허락을 받기 위해 꺼낸 말이니 도로 앉아요.”
아네타는 선물을 풀어 보기 전에 그것을 준 이에게 허락을 구하는 건 으레 있는 일 아니냐고 말하며 시립해 있던 사용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에 당연하다는 듯 사용인들이 나서는 것을 보며, 엘렌은 엉거주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소파에 앉혔다.
그림 위쪽에 지어진 매듭을 당기자 천을 고정한 끈이 스르륵 풀렸다.
사용인들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겹겹이 싸여 있던 천을 걷어 내자 두 점의 그림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그림은 각각 조조, 즉 이른 아침과 한낮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아네타는 드러난 화폭을 보며, 처음 그의 그림을 발견했을 때와 같이 널뛰는 감정을 가라앉히고자 무던히 애를 썼다.
마치 다시없을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가슴이 둥둥거렸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무척 아름다운 그림이네요. 마음에 들어요.”
노력 끝에 꺼낸 말은 간략한 칭찬이었다. 티는 나지 않았지만 어딘가 억눌린 음성이었다.
‘역시 여명을 보며 느꼈던 건 착각이 아니었어.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의 그림은 엘레나의 그림을 닮았다. 같은 사람이 그렸다 해도 믿을 만큼.
아네타는 아직은 드러내지 못할 생각에 대해 내색하지 않고자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 뒤엔 미처 꺼내지 못한 그림에 대한 감상을 하나둘 늘어놓았다.
엘렌은 아네타가 꺼내는 말들에 맞장구를 치거나 설명을 더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는 함께 나누는 대화가 퍽 즐거운 듯 보였다.
화제는 감상에서 다양한 기법이나 소재 등으로 옮겨갔지만, 아네타는 무리 없이 그에 응할 수 있었다. 명색이 후원자라는 사람이 미술에 대해 무지하면 안 될 것 같아 익혀 둔 지식을 십분 활용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느새 하늘은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들뜬 얼굴로 재잘대던 엘렌이 돌연 작은 탄성을 내지른 것도 그때였다.
“아!”
마른 목을 축이고자 잠시 말을 멈춘 엘렌은 창밖으로 해가 기우는 것을 보곤 급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들려오기 무섭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이 예의가 아님을 깨달을 정신도 없이 너무도 다급한 모양새였다.
“어떡하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무슨 일이에요?”
“돌아가서 그림을 그려야 할 시간인데, 그만 깜빡하고 있었어요.”
아네타의 물음에 고개를 돌린 엘렌의 눈망울에서 당혹감이 뚝뚝 묻어났다.
가뜩이나 유약한 인상을 지닌 이가 난처함에 몸 둘 바를 몰라 하자 그 모습이 퍽 가련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항상 해가 저물기 전에 돌아갔던 것 같은데. 그게 매일 같은 시간에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었나요?”
예술계에 종사하는 이들의 특이성은 다양했다. 그간 여러 화가들을 면대 면으로 만나 왔던 아네타는 그 다양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중에선 매일 같은 시간에 그림을 그려야만 집중을 할 수 있는 이도 있었다. 아네타는 엘렌 역시 그와 같은 경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작업하는 시간은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은 무슨 그림인데요?”
날이 저무는 때에 그려야 하는 것이 뭘까.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잔상이 스쳤으나, 아네타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듯 그녀가 외면한 것과 동일한 소재가 엘렌의 입을 타고 나왔지만.
“황혼이에요. 저는 제도에 도착한 이후로 매일 이 시간에 황혼을 그리고 있습니다.”
황혼. 그 익숙한 울림에 아네타는 잠시 멈칫했다. 자각 없이 오직 본능으로만 이루어진 반응이었다.
엘렌은 그를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다급한 얼굴로 청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바로 거처로 돌아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지금이라도 걸음을 서두른다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렌은 초조함이 깃든 얼굴로 재차 말했다.
“저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하루빨리 그림을 완성하고 싶거든요.”
그림을 그릴 때 저만의 규칙이 있으며 그것을 깨트리고 싶지 않다는 부언이 잇따르자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후원자인 그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할 책임이 있는 것과 동시에 막아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죠. 어서 돌아가 봐요.”
아네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엘렌의 표정이 밝게 피었다. 혹여 불쾌함을 드러내면 어쩌나 긍긍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엘렌은 서둘러 인사를 남긴 뒤돌아섰다. 응접실을 벗어나는 걸음은 무언가에 쫓기듯 분주했다.
아네타는 문이 닫히는 것을 기점으로 애써 만면에 붙들어 두었던 평온을 허물어뜨렸다.
한 꺼풀 허물을 벗어낸 감정의 민낯은 혼란이었다.
엘레나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진 그림을 엘렌 역시 그리고 있다.
아네타는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다가도, 곧 앞선 생각을 수정했다.
황혼은 누구나 한 번은 도전해 볼 법한 소재다. 증거로 리페의 갤러리에만 가도 황혼을 주제로 한 그림이 네댓 점은 있었다.
“……그러니 우연이겠지. 이번에도.”
아네타는 기운 없이 늘어지는 몸을 등받이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눈동자에 서린 그늘은 복잡하게 엉켜든 심경을 대변했다.
확신의 부재가 여실했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믿고 싶었다.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
여성 화가만을 후원하던 아데나워 후작이 난데없이 남성 화가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남 일에 대해 떠들어 대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 사실이 알려지자 아네타를 대상으로 추잡한 소문을 만들어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후원은 눈가림용이고, 사실은 어리고 반반한 화가가 마음에 들어 애인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
누군가가 생각 없이 떠들어 댄 말은 추문의 시초이자 기반이 되었고, 아네타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온갖 살이 붙고 떨어지길 반복했다.
“하나 같이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이사벨을 통해 소식을 접한 아네타는 매끄럽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당황하여 발을 동동 구르거나, 분노에 치를 떠는 등의 열렬한 반응을 보이기에는 지금껏 살아온 생이 평탄치 않았다.
아비라는 자에 의해 웬만한 더러운 꼴은 다 보고 살았는데 겨우 이런 일에 흔들릴까. 아네타는 어린아이 장난 수준으로 느껴지는 어처구니없는 추문에 코웃음을 쳤다.
“재밌네.”
책상 위로 턱을 괴는 모습에서 꾸며내지 않은 여유가 묻어났다.
아네타가 눈 하나 깜짝하기는커녕 오히려 남 일 대하듯 반응하자, 곁에 있던 이사벨이 깊은 한숨을 삼킨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랫동안 모셔 온 주인은 이토록 한결 같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그네들 수준도 알 만해.”
명확한 증거도 없이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퍼트리는 말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아네타가 어린 애인을 곁에 두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지원을 쏟아붓고 있다는 것.
저들 나름대로 근거랍시고 들먹이는 말들은 들어줄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네타는 모든 후원 대상에게 동일한 대우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후원이 수십 차례 이어질 동안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더니. 이제와 대상의 성별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득달같이 달려드는 이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우습기 짝이 없는 작태에 아네타는 혀를 찼다.
“남 일에 관심이 그렇게 많으면 제대로 알아보고 떠드는 정성이라도 좀 보여야 할 텐데.”
하여간 답도 없는 이들이다.
아네타가 질린 기색을 비치자 이사벨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의사를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각하?”
깊은 염려가 묻어나는 말에 아네타는 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으로 제 뺨을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그 무의미한 행동을 네댓 번 반복했을까. 아네타는 물음에 대한 답을 돌려주었다.
“글쎄. 일단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볼까.”
난감하기 보다는 처리해야 할 일이 늘어 귀찮다는 감상뿐이라, 아네타는 방관이라는 선택지에 마음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그냥 보아 넘길 이사벨이 아니었다.
이사벨은 조용히 수를 찾았고, 번뜩 떠오르는 이름 하나를 입에 올렸다.
“그러기엔 발티모어 공작 전하의 존함도 함께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칼로스까지?”
과연 효과는 확실했다. 칼로스가 언급되는 순간 번거롭다는 기색은 씻은 듯 사라졌다. 이사벨의 의도대로였다.
아네타는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을 요구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최근 공작 전하의 저택 출입이 잦아지지 않았습니까. 엘렌 님 역시 매번 이리로 불러들이셨고요.”
“그랬지.”
“그 때문인지 각하께서 두 분을 저택으로 끌어들여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각하는 물론 다른 분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될 문제라고 사료됩니다.”
설마, 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아네타는 지금까지 중 단연 최악이라 칭할 만한 추문에 턱을 괴었던 손마저도 거두었다.
하여간 앞에서는 싫은 소리 한 번 못하는 자들이 뒤에서는 못하는 말이 없다.
그러한 이중성은 언제 겪어도 지긋지긋했다.
“확실히 그냥 두어선 안 될 것 같긴 하네.”
어디까지 갈지 두고 보자는 생각은 아무래도 접어두어야 할 것 같다. 이미 갈 데까지 가 버렸는데 무얼 두고 보겠는가.
선을 넘었으면 응당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는 법. 아네타는 판단이 서는 즉시 선택을 뒤집었다.
“일단은 최초 유포자부터 찾아 봐. 알렉에게도 기별을 넣고.”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리인인 알렉의 이름까지 나오자 이사벨은 기다렸다는 듯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네타는 그녀가 일부러 칼로스를 언급함으로써 법적인 대응을 유도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 문제 삼지는 않았다.
자신을 위해 행한 일임을 알기에 그저 모르는 척 보아 넘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