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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52화 (52/122)

52화. 추문 (2)

“이쪽에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엘렌이 제도에 당도하자, 날이 밝기 무섭게 길드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의뢰를 완수했음에 동의하는 확인서를 들고 찾아온 이는 자신을 길드장의 비서라고 소개했다.

아네타는 그가 꺼내 보인 증거를 확인한 뒤 확인서의 내용을 꼼꼼히 훑었다.

「갑 아네타 아데나워는 계약금 2,000만 벨론과 함께 의뢰 수행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지불하며, 을이 화가 엘렌을 찾는 일에 성공할 경우 추가금 3,000만 벨론을 지급한다.」

상호 합의하에 정해진 조건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한 아네타는 곁에 있던 이사벨이 찾아 건넨 인장으로 확인서에 날인했다.

서명한 곳에 한 번, 그리고 같은 내용의 두 장을 나란히 놓고 중간에 한 번. 도용할 수 없게 만들어진 특수한 잉크는 종이에 스미는 것과 동시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다른 질감으로 변했다.

그중 한 장의 확인서는 이사벨의 손을 거쳐 비서에게 전달되었다.

“추가금은 어떤 방법으로 지급해 주실 예정이십니까?”

“사람을 시켜 길드로 직접 보내는 걸로 하죠.”

길드와의 금전 관계에 있어 개인의 손에 돈을 들려 보내는 것은 금물이었다.

혼자 모든 금액을 취하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아네타의 말에 비서는 순순히 그러겠노라 긍정했다.

“네, 그럼 길드장님께는 그리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만 길드로 돌아가 봐도 될는지요?”

“그리하세요.”

아네타의 허락이 떨어지자 비서는 몸을 돌렸다. 그때 똑똑, 두어 번의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네타.”

사용인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칼로스였다.

선객이 있는 것에 잠시 멈칫한 칼로스는 집무실을 벗어나려던 비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에 시선을 내리깐 비서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넨 뒤 집무실을 벗어났다.

문은 하나. 나가려는 이와 들어오려는 이는 필히 곁을 스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미약한 바람이 스치자 순간 창공에서 희미한 박동이 느껴졌다.

“…….”

칼로스는 그 실낱같이 희미한 감각에 이끌려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이미 닫혀 버린 문뿐이었고, 미간을 찌푸린 그의 눈길은 한참이나 같은 곳에 머물렀다.

“어딜 그렇게 봐.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어?”

그런 칼로스의 주의를 끈 것은 언제나와 같은 목소리였다. 아네타는 여상스러운 투로 물음을 건네면서도 혹여 긍정이 돌아올까 그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 내가 당신을 두고 한 눈을 팔 리가.”

돌아온 대답은 두말할 것 없이 깔끔한 부정이었다. 칼로스에겐 당연하고, 아네타에겐 다행인 말이 들려오자 졸지에 두 사람 사이에 남겨진 이사벨은 기척 없이 옆으로 두어 발 물러났다.

아네타의 말에 담긴 기색은 너무도 은근해서 칼로스조차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를 키우다시피 한 이사벨의 귀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두 분 사이에 큰 진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 생각하며 슬그머니 아네타를 담은 칼로스의 시야에서 벗어난 이사벨은 이어지는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신분 차를 생각하면 과분한 감상이 아닐 수 없으나, 마치 다 큰 딸의 연애를 몰래 훔쳐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반한 게 아니면 왜 그렇게 떠난 자리를 열렬하게 보고 있어?”

“열렬하긴. 다른 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거라면 제도에서 오다가다 스친 게 아닐까. 당신이 길드장의 비서와 안면이 있는 사이일 리는 없을 테니까.”

칼로스가 자신처럼 길드를 고용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네타는 낱장만 남은 확인서를 갈무리했다.

짐작이 틀리지 않았는지, 칼로스는 그럴지도 모른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엔 어쩐 일이야? 오늘은 연습하기로 한 날이 아니잖아.”

제어 연습 때문에 아데나워 후작저에 출입하는 일이 많아진 그는 아네타가 부재중이 아닐 경우에 한하여 저택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당신이랑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하고. 괜찮을까?”

칼로스가 허락을 구한 건 아네타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물러나 있던 이사벨은 칼로스의 시선이 제게도 닿아 오자 아네타의 답을 기다렸다.

“좋아. 그렇게 해.”

“그럼 주방장에게 식사 준비에 대해 일러 두겠습니다.”

아네타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사벨은 두 사람 사이에서 빠져나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집무실을 나섰다.

묵례를 하고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네타는 곧 제게로 가까이 다가온 칼로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무슨 말이야?”

“거의 매일 보다가 연습 횟수를 줄이니까 습관처럼 당신이 보고 싶어져서 혼났어.”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라며, 칼로스는 입매를 말아 올렸다.

“불쑥 찾아온 건 미안하지만 역시 오길 잘한 것 같네. 당신 얼굴만 봐도 갑갑했던 숨이 트여.”

“실없는 소리.”

“실없다니. 난 언제나 당신에게만은 진심만을 전하고 진실만을 말할 뿐이야.”

가벼운 듯 뱉었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그 말은 줄곧 변하지 않은 칼로스의 진심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시간은 특별할 것 없이 소소했다.

아네타는 저녁을 먹고도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칼로스와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고, 그러다 저도 모르는 새에 그의 어깨에 기대어 까무룩 잠이 들었다.

칼로스는 세상모르게 잠든 아네타를 조심스레 품에 안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던 이사벨은 주인이 안겨 나온 것에 제법 놀란 눈치를 보이더니, 이내 조용히 물었다.

“침실까지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 내가 알아서 찾아가지.”

이사벨은 칼로스의 부정에 토를 달지 않고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이사벨이 순순히 길을 내어 주자 칼로스는 아네타의 간호를 위해 머물던 때의 기억을 살려 그녀의 침실을 찾아갔다.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 위로 아네타의 몸을 눕히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돌아서서 나오기엔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볼 기회가 너무도 드물어, 칼로스는 잠든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그녀는 한없이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늘 그렇게 당신이 평온함에 젖어 살길 바라. 그게 꿈결이든 현실이든 언제나 변함없이.”

칼로스는 아네타에게로 손을 뻗어 불편하게 놓인 손의 위치를 바로잡아 주었다.

비어 있는 약지가 오늘따라 유독 시선을 길게 잡아끌었지만, 칼로스는 가까스로 시선과 함께 손길을 걷어냈다.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침실 문을 열고 나온 칼로스를 반긴 이는 이사벨이었다.

이사벨은 그의 거절에 따라 안내를 하진 않았지만, 결국 잇따라 다다른 복도에 서서 그가 나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저택 앞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침실 문은 작은 소음 하나 없이 닫혔다. 이사벨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고맙게 받아들이지.”

앞선 경우와 달리 칼로스는 이사벨의 배웅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사벨은 굳이 그가 알고 있는 길을 안내했다. 예법에 맞게 손님을 예우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칼로스는 그를 모를 수 없었다.

“내가 영 못 미더운 모양이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림이 죽 늘어진 복도를 걸으며 떠보듯 말을 흘리자 복도를 비추는 조명만큼이나 차분한 목소리가 인적 없는 공간을 울린다.

“전하께서는 지금껏 각하 곁을 맴돌던 이들 중 가장 진실하고 반듯한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하께서 각하께 해가 될 만한 일을 하실 분은 아니시지요.”

저는 그리 믿고 있습니다.

이사벨의 부언이 잇따르자, 그 뒤를 따라 꾸준히 걸음을 옮기던 칼로스의 눈에 마지막 그림이 들어왔다.

가장 최근에 들여온 것으로 보이는 그것은 칼로스도 잘 아는 그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네타가 그 그림을 발견할 당시 그도 곁에 있었으니까.

여명. 밤과 아침을 잇는 매개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밝아 올 아침을 상징하는 그것을 스치며 칼로스는 물었다.

“믿는다라…… 그럼 어째서 그 앞에서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그 믿음을 이어가기 위함이지요.”

이사벨의 진심은 상대의 신분에도 굴하지 않은 채 또렷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언젠가 아네타에게도 한 번 건네었던 말이지만 담겨 있는 무게 자체가 다르다.

“부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청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겐 목숨보다 소중한 분이시니까요.”

아네타와 이사벨의 관계는 누군가가 함부로 침범할 만한 영역이 아니었다. 칼로스는 그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고, 더불어 안도를 느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있어 ‘내가 없는 자리에서 아네타를 지킬 수 있는 존재’였으니.

“이해 못 할 이유는 없어. 나 역시 같은 마음이니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군.”

칼로스는 화가가 제 발로 나타나기 전과 다름없이 의연함을 보이던 아네타를 떠올렸다.

그녀는 걱정이 무색하게 스스로 중심을 잘 잡고 서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보였지만 곁에 이사벨이 버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더 편해졌다.

***

일러 준 시간에 맞추어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타고 후작저를 벗어난 칼로스는 공작저에 도착하는 대로 침실로 직행했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아 지금껏 환히 밝혀져 있던 그곳은 여전히 그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아네타가 자는 모습을 눈에 담다 온 탓일까. 안으로 발을 들이기 무섭게 외로움이 바닥을 딛고 서 있는 발끝을 스멀스멀 타고 오른다.

“…….”

칼로스는 침실 내부를 죽 둘러보았다.

그녀와 관련 없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지만, 감히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물건 또한 없었다.

금방이라도 잇새를 비집고 나올 것 같은 탄식을 삼키며 그는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윽고 지척에 놓인 협탁 서랍을 열자, 그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벨벳 케이스 하나가 조명을 받아 검은빛을 발한다.

그의 손바닥 반이나 될까 싶은 크기의 케이스 안에는 반지 한 쌍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벨벳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는 그것은 그와 아네타의 결혼반지였다.

반지를 구매할 당시, 칼로스는 푸른 다이아몬드가 아네타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택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아네타를 사랑하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

칼로스는 힘없이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그녀와 마찬가지로 비어 있는 제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언제쯤 이 반지를 다시 한번 당신과 나누어 낄 수 있을까.

사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었다.

그날이 와 주기만 한다면 그는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기다림을 거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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