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추문 (1)
이전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 사람들 또한 시신 훼손을 지양하지만, 무슨 일이든 예외란 존재하는 법이었다.
아네타는 극과 극인 두 개의 상황을 떠올렸다.
첫 번째는 널리 이름이 퍼진 성인(聖人)의 경우. 영면에 접어든 그들의 시신은 여러 부위로 나뉘어 출생지 등의 일생과 관련 깊은 곳에 묻히며, 그곳은 곧 성지가 된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당사자의 생전 의사가 반영되는 반면, 두 번째는 아니었지.’
두 번째의 경우엔 중죄를 저지른 죄인들에게 해당되는 경우인데, 이전에 있었던 폴터 자작의 처형 때처럼 시신을 한 번 더 훼손함으로써 죄의 경중을 강조하고 본보기로 내보인다.
전자와 달리 조금도 명예롭지 않은 삶이자, 죽음이니 땅에 남은 마지막 육신마저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습격을 감행한 살수들은 당연히 후자의 경우에 해당했지만, 완전히 같다고 하기엔 그들의 경우는 조금 특수했다.
그들은 에레즈의 죄까지 떠안은 채 죽어야 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끝내 능력이 봉인된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는 거짓 공표와 함께 알려졌다.
편안하게 죽여 주겠다는 말은 지켰지만 그뿐이었다. 강도 높은 고문을 가했다는 증좌를 보여 주기 위해 러셀은 그들의 시신마저 이용했다.
죗값은 죽어서도 받아내겠다. 그리 말하듯 러셀은 훼손된 시신을 부러 많은 이들 앞에 보여 소문이 돌게 했다.
에레즈의 귀까지 닿을 수 있도록.
더 없이 엄중한 처벌이 이어지고, 공개된 시신의 상태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는 소문이 제국 전체를 휩쓸자 황제를 적대시하던 귀족파 수뇌부는 자연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그렇게 쥐 죽은 듯 지내겠지. 원래 그런 작자들이었으니.’
그간 숱하게 겪어 온 일이기에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혹여 불똥이 튈까.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그들 대신 오늘따라 조금 질기게 느껴지는 스테이크를 잘근잘근 씹으며, 아네타는 휴일 아침을 시작했다.
사용한 식기를 치우거나, 저택 이곳저곳을 쓸고 닦거나, 세탁물을 모아 분류하는 등 사용인들의 분주함을 차례로 눈에 담으며 집무실로 올라오자 정적이 그녀를 맞이했다.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지만, 비로소 소란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상황이 어떻든 서류 탑은 낮아질 생각을 안 하지만.’
아네타는 느른한 걸음으로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일복 하나는 타고난 것 같다. 그리 생각하며 낮 동안의 시간을 전부 서류를 처리하는 데에 써 버린 아네타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게 정말이야, 이사벨?”
이사벨이 집무실로 들어와 전한 소식에 아네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찌나 급하게 몸을 일으켰는지, 앉아 있던 의자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갔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는 책상 아래로 흩어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아네타는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사벨을 바라볼 뿐이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헛것이 아니길 바라며.
푸른 눈동자에 담긴 절박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사벨은 몇 번 본 적 없는 아네타의 격한 반응에 놀란 마음을 능숙하게 감추었다.
그러곤 자신의 젊은 주인이 의심하면서도 간절히 원하는 대답을 내어 주었다.
“예, 각하.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이사벨은 천천히 다가와 약간의 먼지 얼룩이 묻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새하얀 겉면, 그 위 보내는 사람을 기재하는 란에 적힌 이름은 ‘엘렌’.
아네타가 마담 리페에게 부탁하는 것은 물론 길드까지 고용해서 수소문하고 있던 그림 <여명>의 화가였다.
아네타는 건네어진 서신을 받아들었다. 또렷이 적힌 이름은 몇 번을 확인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게 정말 그 화가가 보낸 서신이라고?”
이사벨은 아네타가 대답을 듣고자 건네는 물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대신 보다 확실한 믿음을 안겨 줄 만한 사실을 알렸다.
“봉투 뒷면에 찍혀 있는 우체국 인장이 마테몬 왕국의 것이니, 적어도 이름을 속이지는 못했을 겁니다.”
다른 곳도 아닌 마테몬 왕국의 우체국이라면 아네타에게도 신뢰도가 높았다.
그곳은 본인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무언가를 발송할 수 없도록 법적인 규제를 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국외로 내보내는 경우 절차는 더욱 까다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네타는 그제야 걱정을 접어 두고 비교적 차분해진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화가분께선 뭐라고 하시는지요?”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아네타가 서신을 본래의 모양대로 접자 주변을 정리한 이사벨이 물었다.
“내게 고용된 길드 사람을 만나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모양이야. 후원 제의를 수락하고 싶고, 가능한 빨리 제국으로 돌아오겠다는데.”
“잘된 일이네요. 혹, 저택으로 들이실 생각이신지요?”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은 아주 잠시였다. 불현듯 칼로스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치더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달아나 버린 까닭이다.
“아니.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거처는 따로 마련해 줘.”
“예. 그럼 화가분께서 필요로 하실 만한 물건도 함께 준비해 두겠습니다.”
“고마워, 이사벨.”
“별말씀을요.”
모든 권한을 일임 받은 이사벨은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이미 눈 감고도 화가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줄줄 욀 수 있는 경지에 올랐기에, 부담은커녕 처리해야 할 일의 순번부터 떠올랐다.
이사벨이 떠난 집무실엔 또다시 아네타 혼자 남았다. 아네타는 이사벨이 세워 두고 간 의자에 앉아 복잡한 눈으로 봉투를 내려 보았다.
창문을 통해 빛이 새어들자, 그 위로 명과 암의 경계가 드리워졌다.
‘이 일을 그동안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처음 그림을 발견했을 당시에는 화가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에 안달까지 내었건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존재를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이전보다 많은 이들이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저런 일들로 소란스러웠기 때문일까.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으니 엘레나를 추억하는 시간마저 줄어 버렸다.
아네타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변화에 옅은 웃음을 베물었다. 든 것 없이 텅 빈 것 같던 세상에 자꾸만 저란 존재를 새겨 넣는 이들이 지독히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까닭이었다.
그중 제 색을 가장 짙게 남기는 이는 단연 칼로스였다. 아네타는 그가 남긴 색에 제 마음도 서서히 물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다시금 서류를 쥐었다.
‘지금쯤 그 사람은 무얼 하고 있을까.’
전에는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
아네타가 화가 엘렌을 마주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일이 지난 뒤였다. 엘렌은 서둘러 귀국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온 것처럼 빠르게 제도에 당도했다.
아네타는 엘렌이 저택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사벨의 표정이 묘한 것에 의문이 일었지만, 기다리는 이가 있으니 일단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건 소파에 앉아 있는 이의 뒷모습이다. 아네타는 인기척이 나자 뒤돌아보는 엘렌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켜자 그가 몸을 일으켰다.
“제국의 영광을 뵙습니다. 저는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엘렌이라고 합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여는 이의 외모는 놀랍게도 아네타의 어머니 엘레나와 흡사했다.
다른 게 있다면 아네타와 같은 금발과 청안이라는 점뿐이었다.
유약한 인상부터 웃을 때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깊게 패이는 볼우물까지. 무엇 하나 낯선 것이 없어 아네타는 들려오는 인사에도 입을 뗄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더니. 아네타는 그 말을 이런 식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닮아도 너무 닮았어. 내게 어머니를 닮은 남자 형제가 있었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자신이나 외가인 멜렛 남작가의 사람들보다 더 엘레나를 닮은 모습에 아네타는 넋을 놓았다.
이름부터 화풍이나 외모, 분위기까지. 하나 같이 엘레나와 흡사하기 이를 데 없어 그녀가 다른 성별로 살아 돌아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거였구나. 이사벨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이유가.’
엘레나를 아는 사용인들이라면 모두 비슷한 반응을 보였겠지만, 아네타는 그중에서 자신과 가장 흡사한 감정을 느낀 사람은 이사벨일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이사벨은 가장 가까이서, 아네타보다 오래 엘레나의 곁을 지켰던 사람이니까.
“후작 각하?”
어머니와 또 다른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이가 한 풍경에 담겼던 옛 기억을 더듬는 사이, 의아함을 담은 음성이 조심스레 공간을 울렸다.
아네타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그에게서 엘레나의 모습이 투영된다 해도, 그는 엘렌일 뿐 엘레나가 아니다.
변하지 않을 사실을 되뇌며 뒤늦게 인사를 돌려준 아네타는 그에게 앉을 것을 권하며 자신 역시 자리로 가 앉았다.
“방금 그 일은 미안했어요. 아는 사람이랑 많이 닮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실례를 범했네요.”
“실례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제가 좀 흔하게 생긴 얼굴이긴 해요.”
엘레나는 아버지 데릭이 대번에 정실로 삼을 만큼 내로라하는 미인이었다. 그런 그녀를 닮은 얼굴이 흔한 얼굴일 리가.
아네타는 멋쩍은 웃음 사이로 또 한 번 제 존재를 드러내는 볼우물에 눈길을 주다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빨리 제국으로 돌아온 걸로 봐선 일정을 제법 서두른 것 같은데. 너무 무리한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애초에 제국을 떠난 이유는 후원자를 찾기 위함이었고, 타지 생활에 지쳐서 향수를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때마침 각하께서 좋은 기회를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확실히 아네타 본인이 생각해도 다시없을 기회이긴 했다. 혼자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거처를 빌려주는 것은 물론 생활비에 재료비까지 대 주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아네타는 다시 한번 좋은 기회를 제게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후원 대상으로 택한 이유에 대해선 함부로 첨언하진 않았다.
괜히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간 그것을 이용하려 들지 모른다.
잘 모르는 상대에게 개인사를 말하는 건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경계가 높은 아네타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이유를 밝혀도 된다는 판단이 들면, 그때 제대로 사과해야겠어.’
아네타는 그리 다짐하며 얼마 전 이사벨에게서 넘겨받았던 열쇠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여독이 쌓여 피곤할 테니 오늘은 여기서 대화를 끝내는 게 좋겠네요. 당신은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며 그림을 그리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