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50화 (50/122)

50화. 덫을 놓다 (5)

“지금 같은 구성으로 모인 건 처음이네.”

“영광의 가주라는 것 외에 다른 접점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아네타가 서두를 떼자 세르세는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화제를 자연스레 습격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칼로스는 입을 다문 채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의심을 살 테니 늘 그랬듯 에레즈를 무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칼로스와 세르세는 자주 봤는데, 바우터 남작은 얼마 전에 있었던 연회에서 잠깐 얼굴 본 게 전부네요.”

아네타는 말하던 중간에 문득 떠올랐다는 듯 아, 하는 탄성을 뱉었다.

“그 자리에서 큰일을 당할 뻔했던 것 같은데.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넌지시 습격 때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 특유의 높낮이 없는 투에서 기회를 엿본 것인지 에레즈가 눈을 빛냈다.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각하께서도 영광을 찾으셨던데, 늦게라도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일부러 여지를 주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에레즈는 아네타가 말을 잇기도 전에 본심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의 영광을 다룰 수 있다니. 신기해서 그러는데 다시 한번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에레즈는 네? 하고 조르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네타는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에레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건 없죠.”

망설임 없이 떨어진 수락에 에레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아마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아네타는 그 진심 어린 기쁨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다.

“그럼 잠시 찬연을 빌려줄래요?”

넘어와도 그만이고 넘어오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이미 에레즈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가 어느 쪽을 택하든 상관없었다. 무슨 대답을 하든 이용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아네타는 일말의 재촉 없이 여유로운 눈길을 보냈다. 그에 반해 에레즈는 당혹스레 눈을 굴렸다.

아네타는 그것이 에레즈가 핑곗거리를 찾아 머리를 굴릴 때의 습관임을 알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마주하던 날 역시 이와 같은 모습을 보았으니까.

“아…… 그건.”

끝내 핑곗거리를 찾지 못한 것인지, 에레즈는 난감하다는 듯 아미를 좁혔다. 거절하자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요구대로 하자니 능력에 대해 거짓말한 것이 들통 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결국 아네타는 지금쯤 속으로 제 욕을 늘어놓고 있을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찬연의 능력은 아주 드문 경우에만 발현된다고 했죠.”

“네. 그래서 찬연을 이용해 능력을 보여 주시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미래를 보는 것 자체가 워낙 대단한 능력이니 그럴 만도 하네요.”

어두운 하늘에 내린 빛줄기와도 같은 말에 에레즈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는 아네타가 슬며시 건넨 미끼를 단숨에 물었고, 대단한 능력이라는 칭찬에 자신의 능력이 들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모두 아네타의 의도대로였다.

“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이적의 힘을 보고 싶은데요. 안 될까요?”

“안 될 이유야 없죠.”

아네타는 자신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칼로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는 칼로스는 아네타에 이어 자신을 바라보는 에레즈의 시선을 무시한 채 창공을 풀어냈다.

“창공의 영광으로 하시려고요?”

“아무래도 가장 익숙하니까요. 무슨 문제라도?”

창공을 건네받기 위해 몸을 살짝 틀었던 아네타는 곁눈으로 에레즈를 바라보았다.

다른 말을 꺼낼 수 없도록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는 시선을 보내자, 그는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 문제없어요.”

문제가 없다는 말과 달리, 어색하게 끌어올린 입매에서 불만이 묻어났다.

분신이 아닌 창공을 빌리는 것이 탐탁지 않은 눈치였지만, 아네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창공을 손목에 찼다.

에레즈에게는 가장 익숙하기 때문에 택했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세르세의 분신을 빌리면 능력이 발현되었을 때 숨길 수 없기 때문에 창공을 택한 것이었다.

아네타는 그 사실을 능숙하게 감추어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가 좋을까…….”

장소가 장소인 만큼 함부로 무언가를 훼손하거나 폭음을 내는 건 금물이었다. 아네타는 적절한 물건을 찾아 주변을 훑었다.

두리번거림을 반복하던 끝에 눈에 든 것은 정원에 피어 있는 다른 꽃들과 달리 붉은 잎에 녹색 꽃을 매단 꽃나무였다.

“아, 저기가 좋겠네.”

아네타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가리킨 곳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잘 보고 있어요.”

저거라면 건드려도 러셀이든 황궁의 정원사든 아무 말도 안 하겠지. 아네타는 정원사는 몰라도 러셀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나뭇가지 근처의 공기를 압축해 터트렸다.

굵은 가지는 충격이 가해지기 무섭게 녹색 꽃잎과 그보다 더 꽃잎 같이 생긴 잎사귀를 털어 냈다.

꺾이면 어쩌나 우려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것은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그사이 쏟아지는 붉은빛의 향연은 장관이었다. 아네타는 자연히 칼로스와 암행을 나갔을 때의 기억을 상기했다.

‘그때는 그의 능력을 통해 같은 일을 벌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정말 모를 일들만 일어나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감상이었다.

아네타가 상념을 접어 내는 사이, 바람에 떠밀려 온 잎사귀가 그녀의 찻잔에 올라앉았다.

그에 에레즈는 감탄하듯 꾸며낸 탄성을 내뱉었고, 아네타는 손끝으로 그것을 툭 건드렸다.

예쁘긴 하지만 마시기엔 찝찝했다. 아네타는 손끝에 묻은 찻물을 테이블에 놓여 있던 물수건에 닦아 내곤 에레즈와 눈을 맞추었다.

“이 자리에서 이 이상의 힘을 보여주는 건 무리일 것 같네요. 남작도 알다시피, 황궁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으니까.”

“그럼 방금 보여 주신 것만이라도 한 번 더 보여 주시면 안 될까요?”

보면 볼수록 신기해서요.

에레즈의 입에서 뒷말이 들려오기 무섭게, 통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거운 감각이 그녀를 짓눌렀다.

아네타는 슬쩍 칼로스와 세르세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은 이번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통제의 능력을 발현하며 힘을 써 보라고 요구하는 것은 필시 제 능력이 통하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일 터.

아네타는 기다리던 상황이 왔음에도 일단 망설이는 척 검지를 세워 테이블 상판을 두드렸다.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듯이.

툭툭. 매끄러운 상판을 치는 소리가 반복되자 에레즈는 애써 초조함을 감추었다.

“……알겠어요.”

뜸을 들이던 아네타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또 한 번 긍정을 말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창공이 아닌 이적 본연의 힘을 풀어 통제의 결계를 깨트리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 냈다.

이적을 제어하는 방법을 익힌 덕에 결계는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무너져 내렸지만, 이번에도 역시 다른 이들을 감싼 결계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다만 느껴질 뿐이었다. 여전히 그들을 뒤덮고 있는 통제의 힘이.

“이런 부탁을 들어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아네타는 그 말과 함께 테이블 아래에 있는 두 남자의 발치를 한 번씩 툭 건드렸다. 그것은 에레즈가 오기 전에 정한 그들만의 신호였다.

세르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신호를 받았고, 아네타와 동시에 능력을 발현했다. 하지만 나오는 능력은 없었고, 이번에는 자신이 그녀의 발치를 두 번 건드리는 것으로 신호를 돌려주었다.

습격 때처럼 영광의 힘이 봉인당했다는 의미였다.

다행히 아네타의 상황은 그와 달랐다.

그녀는 에레즈의 시선이 꽃나무에 가 있는 틈을 타 다른 곳에 실낱같이 약한 힘을 풀어냈다.

결과는 이전과 같았다.

발현 대상으로 삼은 꽃은 소리 없이 낱장의 꽃잎을 흩날리며 쓰러졌다.

에레즈가 이적의 능력을 알게 된 이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색은 금물이다. 아네타는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능력 발현이 안 돼. 아까는 잘 됐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또? 이리 줘 봐.”

칼로스가 확인을 위해 창공을 돌려받자, 에레즈는 황급히 능력을 해제했다.

재빨리 능력을 거두는 것을 보면 여전히 세세한 컨트롤은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가능한데 노력을 안 하는 건지, 아니면 노력을 해도 불가능한 일인 건지.’

정답이 무엇인지는 그녀조차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의 에레즈가 통제를 사용하는 일은 드물었으니까.

“나는 되는데. 라폴리 자작, 자작은?”

“저도 됩니다.”

통제의 능력이 해제되었으니 창공과 분신이 제 힘을 되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이어 능력을 발현하는 두 사람을 보며 아네타는 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내 능력이 불안정한 건가?”

“아니. 그것보단 역시 황궁 지하에 구금되어 있는 놈들에게 뭔가가 있는 것 같아.”

칼로스는 러셀의 지시 사항을 이행하며 아네타의 모르쇠에 장단을 맞추었다. 그는 제 식으로 말을 바꾸어 거짓 정보의 서두를 떼면서도 주변에 다른 이가 없는지 살피는 시늉까지 해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각 기사단의 단장들이 돌아가며 심문하고 있는 실정이야.”

살수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 분명 그들이 원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칼로스가 그리 확신하는 듯하자 어느 순간부터 조용히 상황을 살피던 에레즈의 입꼬리가 슬며시 휘었다.

아무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상황에 어지간히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진전은 있고?”

“전혀. 강도 높은 고문을 가해도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말만 반복한다더군. 하지만 그 말을 누가 믿겠어.”

“확실히 믿음이 안 가긴 하네. 아무리 기스턴 백작이 수십억을 제시했대도 그것만 믿고 습격을 감행했을 리 없을 테니까. 목숨이 걸린 일이잖아.”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들은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을 행했지만 사실을 밝힐 수야 없었다.

아네타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 영광의 주인들을 상대하려 했을 것이고, 그 믿는 구석이라는 게 능력 발현을 막아버리는 정체불명의 힘일 것이라는 마음에도 없는 추측을 늘어놓았다.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닌데 술술 쏟아져 나오는 말들에 새로운 적성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마저 일었다.

그것은 그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스치듯 마주한 세르세의 눈빛마저 묘했다.

걱정을 떨쳐 낸 에레즈는 더는 살수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긍긍하며 마음 졸이던 이전의 태도를 버리고 더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그렇다고 에레즈가 칼로스에게서 완전히 주의를 돌린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에레즈는 그가 말하는 내용은 모두 흘리면서도 움직이는 입술이나 표정, 목소리에 집중했다.

‘아니, 홀린 듯이 넋을 놓았다는 표현이 더 걸맞겠네.’

아네타는 칼로스에게 쏟아지는 기이한 열망에, 저도 모르게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못마땅함을 억눌렀다.

그를 미끼로 삼고자 한 것은 자신인데 막상 그 광경을 눈으로 좇고 있자니 혼탁한 무언가가 폐부를 간질였다.

‘이건 대체 무슨 심보일까.’

감정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그게 무엇이든 그리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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