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덫을 놓다 (4)
“……어.”
아네타는 벌어진 입술 새로 간신히 대답을 끌어냈다. 놀란 가슴이 떨어져 나갈 듯 쿵쿵대자 칼로스는 경직된 몸을 끌어안고 여린 등을 도닥였다.
“일단 저쪽으로 가서 앉자.”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칼로스는 아네타를 부축해 가제보로 이끌었다.
의자에 앉아 가느다란 손목에서 조심스레 창공을 거두어 가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연신 걱정을 비쳤다.
뜻하지 않은 능력 발현은 그 역시 창공을 처음 손에 쥐었을 당시 적지 않게 겪었으나, 그와 같은 경우라고 보기엔 강도가 너무도 셌다.
앞선 연습에서 아네타가 보인 한계를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기에, 칼로스는 이에 대한 질문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네타.”
물을 마시며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던 아네타는 칼로스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칼로스는 손수건을 꺼내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 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들을 수 있을까?”
닿아 오는 손길만큼이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네타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조금 놀란 것뿐이었으니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구름이 걷히는 순간 영광을 제어할 수 없었어. 당신에게 배운 대로 해 보려고 했는데 몸도 이적도 말을 듣지 않더라고.”
마치 범접할 수 없는 힘에 압도된 느낌이었다.
아네타는 그때의 감각을 상기하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래, 압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그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일 것이다.
“아무래도 그 힘이 이적의 제어를 풀고 힘을 증폭시킨 것 같아.”
***
다음 날, 아네타는 작은 폭주에 대한 원인을 밝혀낼 틈도 없이 다른 일에 신경을 쏟아야만 했다.
밝혀낼 길 없는 문제보다는 당장 눈앞에 직면한 황제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아네타가 생각을 정리하고자 잠시 테이블 위로 텅 빈 시선을 던지는 사이, 그녀를 둘러싼 사위의 분위기는 묘했다. 원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소리 없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칼로스와 세르세였다.
구심점 역할을 하던 아네타가 아무런 말이 없다 보니 그들 사이엔 형식적인 대화조차 오가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랬듯 서로를 경계할 뿐이었다.
두 사람에게만 불편했던 침묵이 걷힌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네타는 줄곧 생각해 왔던 것을 말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폐하께서 내게 따로 내리신 명, 기억하지?”
“어.”
“이적이 여전히 통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확인하라고 말씀하셨지.”
세르세와 칼로스가 차례로 답하자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과정에서 바우터 남작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해도 그에게는 반대의 확신을 심어 줄 생각이야.”
“반대라면, 능력이 통하는 척한다는 거야?”
“맞아.”
아네타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미미한 온기가 감도는 찻물로 마른 입술을 적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는 나를 둘러싼 통제의 결계를 볼 수 있으니까 상황에 맞춰서 능력이 발현되지 않는 척만 하면 돼.”
일찍이 아네타로부터 결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칼로스는 에레즈를 속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하며 가만히 수긍했다.
그런 그와 달리 세르세는 물었다.
“감추려는 이유는?”
“굳이 내가 가진 패를 다 보여 줄 필요는 없잖아. 보여 봤자 바우터 남작을 자극하는 꼴이 될 뿐이고.”
“확실히 에레즈 바우터가 네게 이상할 정도로 적대감을 품고 있긴 하지.”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세르세는 거침없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논했다. 에레즈가 환영식 때 이적에 관해 떠들어 대던 말이 떠올라 와락 이맛살을 찌푸린 채였다.
“마치 제 것을 모조리 네게 빼앗겨 버린 사람처럼 군달까.”
직감이 뛰어난 예술가의 눈은 신묘했다. 아네타를 향한 에레즈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 낸 세르세는 첨언했다.
철천지원수를 보는 눈초리도 그보다는 고울 것이라고.
“혹시 모르지. 가문과 가문 사이에 청산되지 못한 채무 관계라도 남아 있을지도.”
장난스러움이 다분히 묻어나는 투에, 아네타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파악했다.
“우리 가문은 사채 같은 거 안 해. 엄한 상상하지 마.”
“어떻게 알았어?”
“그야 뻔하지. 설마 아데나워가 바우터에 빚을 졌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 아니야.”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소리 아닐까. 아네타가 세르세의 우스갯소리를 단칼에 잘라 내자, 끼어들 타이밍을 노리던 칼로스가 단숨에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에레즈 바우터를 유인할 방법은 있어?”
일단 유인을 해야 능력을 확인하든 거짓 확신을 심어 주든 할 텐데. 칼로스가 줄곧 생각에 빠져 있던 아네타에게 물음을 던지자, 아네타는 등받이에 느른하게 몸을 기대었다.
“있지.”
이윽고 말문을 열자, 두 남자는 숨소리마저 낮추며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방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칼로스, 당신이 미끼가 되어 줘야 해.”
“미끼?”
아네타는 의아한 듯 눈썹을 추켜올리는 칼로스를 보며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래. 에레즈 바우터를 우리 앞에 데려다 놓을 미끼.”
***
황궁의 정원은 계절마다 다른 분위기로 단장된다.
봄에는 색감이 여린 꽃으로 화사한 분위기를, 여름에는 푸른색이나 녹색 계열의 꽃으로 청량한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가을의 정원은 붉은 계열의 꽃들로 치장된다.
글록시니아부터 사루비아, 가장 지척에 피어 있는 달리아까지.
꽃의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 있는 마지막 계절이니만큼, 가을을 맞이한 정원은 온통 황제를 닮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석양이 지듯 강렬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대도, 눈앞에 있는 이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네타는 무료한 시선을 들어 칼로스와 세르세를 응시했다. 정원 풍경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누가 꽃이고 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에레즈 바우터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늦는군.”
“곧 오겠지. 황궁 출입 기록을 보니 항상 이 시간대에 오던데.”
문관도 무관도 아닌 에레즈가 하루가 멀다 하고 황궁에 들락거리는 이유야 뻔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능력이 들통났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는 거겠지.’
아네타는 혀를 차며 주변을 훑었다.
그들이 탁 트인 정원 한복판에서 다시금 회동한 이유는 하나였다. 오직 에레즈 바우터를 유인하기 위해서.
그를 위해 책상 위에 탑을 이룬 서류조차 뒤로하고 나왔건만, 기다리고 있는 이는 영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 에레즈 바우터가 미끼를 물 때까지 이와 같은 생산성 없는 기다림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네타로 하여금 한숨을 자아냈다.
일부러 우리 여기 있다, 하고 보란 듯이 앉아 있었던 보람이 결실을 맺은 건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드디어 왔군.”
멀리 보이는 인영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칼로스였다. 보이는 것이라곤 바람에 너울대는 희미한 분홍빛뿐인 가운데, 칼로스는 특유의 월등한 시력으로 그를 알아보았다.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고개는 돌리지 마.”
아네타와 세르세는 에레즈가 나타났다는 말에 돌아가려는 시선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그사이 에레즈는 그들을 발견했고, 아네타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가린 채 속삭였다.
“뭐 하고 있어, 칼로스. 어서 즐겁다는 듯이 웃어.”
“……정말 미끼라는 게 이런 의미였어?”
“그래. 당신 미소 한 번이면 가던 걸음도 멈추고 돌아올 테니까.”
에레즈가 그렇게 무안과 무시를 당하면서도 칼로스를 포기하지 않는 건 그의 이름 아래 존재하는 재산이나 명예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얼굴일 것이다.
“이른바 미인계, 라는 건가.”
세르세는 작게 중얼거리며 칼로스를 향해 안쓰럽다는 눈길을 보냈다.
제 일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눈빛이 달갑지 않으면서도, 칼로스는 지금의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다른 이가 그에게 이와 같은 요구를 했다면 얼음 비수와도 같은 눈초리와 말들이 온몸을 난도질할 듯 쇄도했겠지만, 상대는 아네타였다.
칼로스는 아네타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에레즈 바우터를 보며 웃으라고 한 것도 아니니 주저 없이 입매를 끌어올렸다.
시선은 아네타의 눈동자에 고정한 채였다.
굳이 억지웃음을 짓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칼로스의 입가엔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렸다. 아네타를 보면 저절로 웃음이 새는 까닭이었다.
푸른 심해를 마주한 금안은 곧 유혹스레 휘었다. 그를 본 아네타는 탄식을 삼켜야만 했다.
‘즐거운 듯 웃으랬더니 왜 유혹을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 덕분에 얻은 것은 있었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던 에레즈가 그 모습을 보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통한 건 미인계가 아닌 질투심 자극인 모양이네.’
못마땅하다는 듯 구겨진 얼굴은 지척에 다다라서야 아닌 척 풀어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보다 나아졌다 뿐이지 적대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네타는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의 잔재가 살갗을 찔러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그제야 에레즈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듯 시선을 건넬 뿐이었다.
“바우터 남작?”
“안녕하셨어요?”
에레즈는 낮은 단상처럼 한 계단쯤 높게 올라와 있는 그들의 공간에 발을 들이며 웃어 보였다.
세르세는 그 예법에 어긋나는 간결한 인사에 미간을 좁히는 것도 잠시, 능청스레 물었다.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볼일이 있어 눈에 띄는 위치에 자리까지 깔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었지만, 누구 하나 티 내지 않고 에레즈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봤는데, 세 분이 너무 즐거워 보여서 저도 잠깐 앉아 있다가 가려고요. 괜찮죠?”
에레즈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그에 맞추어 가볍게 흔들렸다.
과연 저게 자신보다 높은 신분을 가진 자에게 양해를 구하는 사람의 태도일까.
한 가문의 가주라고 하기엔 사람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그들이 일제히 같은 감상을 떠올리는 사이, 당연히 받아들여질 거라는 기대가 에레즈의 얼굴 위로 드러났다.
그를 본 아네타가 한 번쯤 거절해도 물러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칼로스가 입술을 떼었다.
“안 되겠는데.”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라 낸 투에는 진심 어린 감정이 실려 있었다.
“제가 방해가 될까요?”
에레즈는 서운하다는 듯 큰 눈망울을 깜빡였다. 녹음을 머금은 눈동자가 팔랑이는 속눈썹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길 반복했다.
처연함을 흉내 낸 눈빛은 차례로 아네타와 세르세에게 닿았다.
너희라도 어서 나를 잡으라는 듯이.
“아니, 괜찮으니 앉아요. 함께 어울리고 싶어서 온 사람을 내칠 수는 없죠.”
아네타는 에레즈의 소리 없는 요구를 눈치채지 못한 척 들어주었다.
곧이어 칼로스와 세르세의 이름을 부르자 그들은 눈치껏 동의하고 나섰다.
“당신이 그러길 원한다면야.”
“나도 별로 상관없어.”
아네타에 의해 칼로스의 대답이 바뀌자, 에레즈는 질투에 이를 갈면서도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잽싸게 남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일부러 비워 둔 칼로스의 옆자리가 채워지자, 아네타와 에레즈는 자연히 마주 보는 구도로 앉게 되었다.
어째서 나를 도와주었을까. 그리 말하듯 의구심을 품은 눈초리가 닿아 왔지만 유감은 없었다.
유인에 성공했으니 남은 건 목적을 이루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