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덫을 놓다 (3)
별다른 이유 없이 황궁에 출입해 기웃거리는 에레즈 바우터의 행각을 모를 수 없는 러셀이었다.
괜히 내버려 두었다간 확인해 보겠답시고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닐지도 몰랐다.
그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네가 원하는 답 받아가라, 하고 자진해서 눈앞에 대고 보여 주는 게 나았다.
“그리고 겸사겸사 이적이 통제의 영향을 받는지, 받지 않는지 확실히 결론지어서 오면 더 좋겠군. 아마 에레즈 바우터는 두 가지 모두 확인해 보려고 할 테니까.”
“확실히 가짜 능력에 대한 꼬리까지 잡힌 상황이니 확인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네요.”
아네타는 가슴 아래에 댄 팔 위로 다른 팔을 세워 턱을 받쳤다. 그녀가 받아들일 듯 긍정하자, 곧이어 칼로스가 반응을 보였다.
“확신은 어떤 방법으로 심어 주실 생각이십니까?”
“황궁에 구금되어 있는 살수들을 이용하면 될 거다. 영광을 일시적으로 봉인시킨 이가 그들이며, 그에 대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 고문하고 있다는 말만 흘리면 돼.”
그럼 에레즈는 자연히 황제와 가주들이 엄한 이들을 잡고 있음에 안도할 것이다.
그것이 러셀이 바라는 흐름이었다.
“살수들의 처분은 그 뒤에 하는 걸로 하지.”
“그들에게 순순히 자백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정말 용서해 주실 생각이신가요?”
칼로스의 말에 아네타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미간을 좁히자, 러셀의 얼굴에 지독히도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야지. 약속한 게 있으니까.”
일순간 주변이 순백으로 물드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 그 자비로운 미소는 아네타로 하여금 안도를 가져다주었다.
아,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내가 생각한 그 용서가 아니구나.
모르고 싶어도 절로 깨닫게 되는 미소였다.
“용서의 의미로 자백한 자에겐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 줄 생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러셀은 신전의 조각상보다 더 성스러운 얼굴로 살수들의 핏빛 미래를 언급했다.
그것이 그가 살수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자비였다. 애초에 자비란 악인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닌, 선인들에게 베푸는 것이니까.
그들에겐 그 이상을 바랄 자격이 없다. 러셀은 그러한 자신의 지론을 가감 없이 내보였다.
그에 아네타는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그녀의 걱정은 러셀을 상대로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아네타와 칼로스는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무런 말없이 자리를 지키던 세르세에게도 함께 나갈 것을 권했지만, 그는 황제에게 여쭐 것이 있다는 말로 거절했다.
인사를 건넨 두 사람이 집무실을 나가자, 문이 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러셀은 식어 버린 찻물을 들이켜며 물었다.
“그래. 내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표정만 봐도 무슨 질문이 나올지 짐작되었지만 러셀은 내색하지 않았다.
“어째서 저를 이 자리에 부르신 건지 궁금합니다.”
“이유는 이미 밝혔을 텐데.”
“그 이유만으로 저를 부르셨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엄연히 귀족파 소속이니까요.”
확실히 귀족파에 소속된 귀족에게 이와 같은 일들을 알게 하는 것은 위험했다. 그러나 귀족파라고 해서 모두가 황제를 적대시하는 건 아니었다.
영광의 가주라는 이름으로 귀족파 정점에 설 수 있음에도 묵묵히 신하의 역할을 다하는 헤첸 백작을 그 일례로 들 수 있었다.
러셀은 세르세 역시 그와 별다를 바 없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글쎄. 자작이 선대 라폴리 자작과 달리 무늬만 귀족파라는 것 외에도 이쪽을 배신할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있어서라고 해 두지.”
“이유라 하심은…….”
“내 입으로 듣고 싶지는 않을 텐데.”
러셀은 자세한 언급 없이 어느 한 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네타가 앉았던 자리였다.
세르세는 단번에 러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챘다.
“이용하시겠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노골적인 긍정보다 더 적나라한 의도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상대의 좁혀지는 미간을 보며 러셀은 능청스레 웃었다.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하자는 주의라서 말이지.”
황제란 그런 자리니까.
읊조리듯 이어붙인 말에 세르세는 백기를 흔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거절한다고 해도, 아네타가 부탁하고 나선다면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빙 돌아가 봐야 벗어날 수도 없고,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없었다. 세르세는 러셀이 원하는 답을 내어 주곤 집무실을 나왔다.
그 길로 그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정문으로 향했다.
거대한 문 앞에 서 있는 기사들의 곁을 지나기 무섭게 그보다 먼저 집무실을 나섰던 아네타와 칼로스가 보였다.
아데나워의 상징이 새겨진 마차에 올라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연회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자신은 번번이 아네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잡지 못했다 뿐일까.’
아네타가 돌발 행동을 했을 때에 그는 그녀를 만류하기는커녕 그 뒤를 쫓을 수조차 없었다.
그때 아네타가 남기고 갔던 말처럼 타깃이 모이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멍청하게 서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얼간이처럼.
‘만약 그때 아네타와 함께 있던 이가 발티모어 공작이었다면, 그 남자는 주저 없이 나와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세르세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마차는 빠르게 멀어져 하나의 점이 되어 버렸다.
***
세르세를 남겨 두고 나온 뒤,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 황궁을 나선 두 사람의 목적지는 오늘도 같았다.
칼로스는 자연스럽게 아네타의 마차에 몸을 실었고, 뒤따르는 발티모어의 마차와 함께 아데나워 후작저로 향했다.
내달리는 마차 안에서 내다본 풍경은 잡아 늘린 듯 길게 이어지는 잔상만을 남긴 채 빠르게 스쳤다.
물 먹은 물감 번지듯 섞여드는 그것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던 아네타는 문득 칼로스와의 퇴근길이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익숙해질 동안 아네타는 칼로스의 도움을 받아 세심한 제어 방법을 익히는 것은 물론 이적의 한계까지 확인했다.
가장 먼저 깨달은 한계는 이적을 통해 다른 영광의 능력을 발현하려면 반드시 본 주인이 주변에 있어야 하며, 그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제하고도 한계는 두 가지나 더 있었다.
아네타는 자신이 발현 과정에서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한다는 사실과 해가 지면 이적의 능력이 불안정해진다는 사실을 연이어 깨달았다.
전자의 경우에는 두 개의 능력을 동시에 발현하기 때문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추측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지금껏 이적과 교감할 수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통이 이루어진 것은 이적의 존재를 깨닫기 직전. 힘을 원하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 순간뿐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는 이적의 목소리는커녕 얄팍한 감정 한 자락도 느낄 수 없었어.’
처음에는 그저 영광을 다루는 데 미숙해서 그런 것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한계에 달했다.
제어 실력이 늘고, 두 영광과 동시에 접촉하는 횟수가 늘자 아네타는 자연히 깨달았다. 이건 능력 제어와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문제라고.
그렇다면 문제는 다른 곳에 있을 터. 아네타는 제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있는 이에게 그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자 했다.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부러 주의를 끌어올 필요는 없었다. 눈을 돌리는 즉시 마주하게 된 눈동자는 내리쬐는 태양 빛을 조각내어 심어 놓은 듯 반짝였다.
“칼로스. 당신은 영광과 소통할 수 없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아네타는 그 이상의 살은 붙이지 않았지만, 칼로스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굳이 당신 일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지를 담은 금안은 그녀가 묻고자 하는 바의 진의를 파악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르지.”
여상한 목소리는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듯 주저 없이 흘러나왔다.
이미 가진 자의 여유나 자만 따위로 보이지 않기 위하여, 그는 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전례 없는 행적을 보이는 존재인 만큼 이적을 다른 영광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에 대해 너무 마음 쓰지 마, 아네타.”
“……일리 있는 말이네. 고마워.”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처음부터 다른 영광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던 이적이다. 그런 존재를 아네타는 너무 자신이 알고 있는 틀에만 맞추어 생각하려고 했다.
엄연히 그녀의 실책이었다.
‘그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에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다른 이들과 같기를.’
아네타는 밀려든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후작저에 도착했고, 두 사람은 늘 그랬듯 본관이 아닌 저택의 뒤편으로 향했다.
첫날과 달리 가제보는 순백의 색을 되찾았다. 그 안의 테이블에는 간단한 요깃거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칼로스에게 영광을 건네받은 아네타는 몸을 푸는 개념으로 돌멩이 하나를 가지고 연습을 시작했다.
바람을 이용해 이리저리 밀어내다, 종국엔 그것을 터트리자 작은 굉음과 함께 파편이 튀었다.
불규칙하게 튀어 오르는 파편을 쳐내는 것 또한 하나의 연습 과정이었다.
칼로스가 당부한 대로 막을 두르듯 공기의 흐름을 막아 내자 파편은 무언가에 가로막힌 양 튕겨 나갔다.
아네타는 몸풀기가 끝나는 대로 칼로스의 요구에 맞추어 창공을 다루었다.
그는 늘 능력을 공격적으로 활용하는 방법보다는 보다 세심한 컨트롤을 익히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기본적인 것부터 가르치겠다던 말을 이행하고 있는 셈이다.
아네타는 배움에 열의가 있는 사람이었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오히려 가르치는 입장인 그가 걱정할 정도로 몰두하곤 했다.
그러나 모든 과정이 그녀가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다. 아네타는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를 슬며시 노려보았다.
성취욕의 기저에 깔려 있던 승부욕이 꿈틀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체력의 한계가 왔음을 알면서도 고집스레 버티던 아네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턱을 타고 흐르는 그것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칼로스는 젖은 이마에 머물던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느덧 해는 기울기 시작했고, 음영을 머금은 구름이 그 위를 지난다. 삽시에 주변이 어둑해지자 칼로스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끝을 알리는 목소리는 그녀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해를 가리던 구름이 걷힌 것도 그때였다.
해방된 빛이 쏟아지듯 지면을 비추자, 아네타는 형체 없이 너울대는 붉은빛에 휩싸였다. 알 수 없는 힘에 억눌린 듯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가운데, 능력마저 제어를 잃었다.
쾅!
일순간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새어 나와 줄곧 그녀의 주의가 집중되어 있던 바위를 터트렸다.
파편을 막아 낼 새도 없이, 그것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아네타는 놀라 홉 뜨인 눈으로 그 잔재를 바라보다 이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였다.
균형이 무너진 몸을 빠르게 지탱해 준 것은 서둘러 다가온 칼로스였다.
허리에 감긴 팔은 그녀의 몸을 단단히 지탱해 주었지만, 마주한 눈동자만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 역시 아네타만큼이나 놀란 까닭이다.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