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덫을 놓다 (2)
“당신도 알다시피, 창공의 능력은 조금 위험해서.”
침실 벽을 날리거나 바위 몇 개 터트리는 일 따위는 우습게 해내는 그였으니 그 힘을 잘못 다루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아네타는 조금만 삐끗해도 집무실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저택 부지 내에 적합한 장소가 있어. 그리로 가자.”
“창공은 당신이 가지고 가.”
“내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영광을 건네고, 접촉을 허락하는 모습은 테르사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내가 받는 신뢰가 이렇게나 컸던가.’
아네타는 새삼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머뭇거림을 보였다.
어제는 상황이 상황이었고, 관통 쪽에서 먼저 저를 잡으라는 양 신호를 보내왔지만 창공은 아니었던 탓이다.
영광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해 놓고 막상 때가 되니 긴장하는 것도 우습지만, 거부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능력에 대한 확신이 전무한 상황에서는.
“아네타. 창공만큼 당신에게 호의적인 영광은 없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한번 차 봐.”
그런 그녀의 긴장을 걷어 낸 것은 칼로스의 목소리였다.
“내가 당신에게 없는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잖아. 안 그래?”
“그렇지.”
아네타는 동의를 구하는 칼로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창공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린 빛을 뿜어내던 몸체를 손에 쥐는 순간 깨달았다.
칼로스의 장담이 거짓이 아님을.
이적을 찾은 뒤 접촉해 본 영광은 관통과 창공, 단 둘뿐이었지만 그 차이는 극명했다.
관통이 아네타에게 보인 반응이 배려였다면, 창공은 명백한 애정을 그녀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네타는 폐부 깊숙이 상쾌한 공기가 차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살가운 환영에 아, 하고 작은 탄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윽고, 아네타는 그것 보라는 듯 웃고 있는 칼로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 맞았네.”
“당연한 일이야, 아네타. 내 분신 같은 존재가 당신을 거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영광과 영광의 주인 사이에서는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진다. 대부분 전자가 후자의 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만큼, 창공이 아네타를 제2의 주인과 같이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칼로스는 아네타 역시 알고 있을 사실을 되뇌다 그녀의 손 안에서 공명하는 창공을 바라보았다.
“창공은 그저 인내하고 있었을 뿐이야. 당신이 다가올 때까지.”
지극히 저를 닮은 창공의 진심을 일러 주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
칼로스를 이끌고 저택 본관을 빠져나온 아네타는 후작저 부지의 북서쪽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은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부드러이 밀려들어 몸을 감싸 왔고, 아네타는 그 상냥한 감각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기해.’
창공과 교감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스칠 뿐이던 바람이 곁을 맴돌며 호의적으로 몸을 비벼 온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아양을 부려대는 느낌에 아네타는 여전히 놀라움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릴 적 타인의 눈을 의식해 읽었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으니까.
‘칼로스는 지금껏 이런 감각을 느끼며 살아왔던 걸까.’
부러움보다는 순수한 궁금증이 일었다. 힐끗 돌아본 그의 눈이 주변 풍경을 세세히 훑고 있어 주의를 끌어오진 않았지만.
아마 칼로스가 이리도 깊은 곳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지 않을까.
아네타가 지난 기억을 되짚는 사이, 그들의 발길은 잘 닦인 길에서 조금은 길게 자란 잔디 위로 옮겨 갔다.
아직 푸른빛이 가시지 않은 잔디는 창공이 불러온 바람에 얕은 물결을 이루며 일렁였다.
그 자체만으로 장관이라 할 수 있는 광경 위로 보이는 것은 눈에 익은 석조 가제보(Gazebo, 서양의 정자)였다.
아네타는 흔들리는 녹음의 파도 속에서 홀로 우직하게 서 있는 그것을 발견하곤 칼로스를 돌아보았다.
“다 온 거야?”
“어.”
아네타의 걸음이 멎자 덩달아 멈추어 선 칼로스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가제보를 탐색하듯 뜯어보았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그것은 호화롭기 그지없는 아데나워의 다른 조형물들과 달리, 별다른 장식 없이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네타가 연습 장소로 점찍어 둔 곳은 우아하게 양각된 가제보도, 그 안에 자리한 같은 소재의 테이블이나 의자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휴식 공간으로 염두에 두었을 뿐, 진짜는 그 뒤에 조성된 작은 숲과 넓은 공터였다.
“여기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
“적합한 장소 같아. 별다른 장애물 없이 탁 트여 있어서 능력을 발현하기 좋겠어. 후작저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나도 자주 찾는 곳은 아니야. 언제, 누구의 의도로 지어졌는지도 모르고. 이런 곳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는데 마땅한 장소를 찾다 보니 떠오르더라고.”
오래도록 찾지 않은 탓인지 가까이서 본 기둥의 틈 사이에는 검은 때가 져 있었다.
손을 뻗어 그 위를 가볍게 쓸자, 하얀 손끝에 잿빛 흔적이 묻어났다.
“조금 있다 사람을 보내서 한 번 닦아야겠네.”
아네타는 먼지 묻은 손을 탁탁 털어 냈다. 슬슬 시작하자는 말에 칼로스는 동의했다.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줄게. 무슨 일이든 기초를 다지는 게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
“그래.”
아네타는 칼로스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기초만 확실히 다져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배움의 연속인 삶을 살며 그 사실을 뼛속 깊이 통감한 그녀였기에 그의 결정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아네타가 칼로스에게 가장 먼저 부탁한 건 이적에 대해 확인하는 것이었다.
능력 발현의 조건을 따져 보면 이적은 엘레나의 목걸이가 분명하지만, 확실히 해 두어서 나쁠 건 없다는 데에 있어서 두 사람의 의견은 일치했다.
걸쇠를 푼 아네타는 목걸이를 칼로스의 손에 올려 주었다. 그녀 역시 앞서 영광을 건네었던 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영광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클로린 공작이 이 모습을 본다면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여 달라며 한탄하지 않았을까.
아네타는 조금은 보수적이나, 꽉 막히진 않은 중립 귀족들의 수장을 떠올리며 칼로스의 손에 들어가는 이적을 바라보았다.
역시 불안감이나 불쾌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변화는 목걸이가 손을 떠나는 즉시 찾아왔다. 주변을 맴돌던 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아네타는 손목에 걸쳐 놓다시피 한, 헐렁하기 짝이 없는 깃털 모양의 팔찌를 매만졌다. 창공은 여전히 그녀에게 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이적이 맞는 것 같네.”
칼로스는 확인을 마친 후에야 마음을 놓는 아네타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녀가 영광을 돌려받으려 하기 전에 선수를 치기 위함이었다.
“잠깐, 칼로스. 뭐 하려고?”
아네타는 예고도 없이 다가와 손을 뻗어오는 칼로스의 이름을 불렀다.
쉬. 아이 달래듯 길게 끌어낸 숨과 함께 그가 이적의 양끝을 잡고 그 사이의 간격을 벌렸다.
칼로스의 몸은 그대로 아네타 쪽으로 기울었다. 흩어진 바람결이 그가 내뱉는 숨결에 옮겨 붙은 듯 드러난 목덜미를 간질였다.
껴안듯 아네타의 목 뒤로 긴 팔을 넘긴 칼로스는 그대로 이적을 아네타의 목에 둘렀다.
손에 비해 걸쇠가 너무도 작아 헛손질을 반복해야 했지만, 칼로스는 잠시 헤맨 끝에 간신히 아네타의 목에 이적을 걸어 주는 것에 성공했다.
“굳이 이런 식으로 채워 줘야 하는 거야?”
아네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나는 칼로스에게 물었다.
“굳이 이런 식으로 채워 줘야 당신 마음이 나한테 흔들리지.”
“글쎄. 과연 그럴까.”
아네타는 칼로스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당장이라도 키스할 듯 다가서자 그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이 굳어졌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자, 그 선명한 움직임을 눈에 담던 아네타는 그의 옷깃을 바로잡으며 속삭였다.
“흔들린 건 당신 마음 같은데.”
“들켰네. 그런 김에 마저 이어서 할까?”
“아니.”
이윽고 그녀는 손을 올려 그가 온몸으로 내보이는 미련을 떨쳐 내듯 단단한 어깨를 툭툭 털어냈다.
“이 다음은 없으니까 하던 수업이나 마저 하시죠. 선생님.”
***
아네타가 칼로스에게 영광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운 지 어느덧 수일이 지났다.
그동안 수사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황제는 시일이 지나길 기다렸다는 듯 습격의 범인으로 기스턴 백작을 지목했다.
기스턴 백작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그를 두둔하던 귀족파는 버논이 황제의 명으로 공개한 증거들을 보고 발을 뺀 지 오래였다.
황제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는 역모에 해당한다. 자금줄 역할을 하던 이가 사라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역모의 죄를 입은 기스턴 백작을 변호하려 한다면 나란히 역적으로 몰릴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얄팍한 신의마저 사라지고, 그들이 언제 목소리를 높였냐는 듯 잠잠해지자 기스턴 백작에 대한 처분이 내려왔다.
러셀은 자신의 목숨을 노린 대가는 똑같이 목숨으로 받아내겠다며 즉결 처분을 명했다.
그때 백작가 별장에 구금되어 있는 기스턴 백작의 목을 치겠다고 나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루이사였다.
루이사는 기사로서 자신의 두 주군을 건드린 기스턴 백작을 제 손으로 처리하기를 희망했고, 러셀의 승인을 받아 그곳으로 떠났다.
루이사가 기스턴 백작과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면 남는 것은 황궁을 습격한 살수들이다. 자비와 관통의 공격을 받고 살아남은 자의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러셀은 아직 그들의 이용 가치가 남아 있다고 여겼다.
때문에 러셀은 황명이란 명분하에 칼로스와 아네타, 그리고 세르세를 조용히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하필 그 세 사람을 부른 이유는 특별할 것 없이 간단했다.
“그대들이 가장 손발이 잘 맞을 것 같아서 불렀다.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호출의 이유가 들려오기 무섭게 두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찾아왔다.
세르세가 한쪽 눈썹을 움찔대는 것으로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면, 칼로스는 다물린 입매를 더욱 딱딱하게 굳혔다.
러셀은 그것이 칼로스가 못마땅함을 느낄 때 보이는 습관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동요 없이 평온한 것은 아네타뿐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다 높낮이 없는 투로 목소리를 내었다.
“무슨 연유로 저희를 불러들이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아네타가 입을 열기 무섭게 두 남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은 감정의 잔재마저 지워 냈다.
급변하는 태도를 두 눈에 똑똑히 담아낸 러셀은 제 예상이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음에 자찬했다.
따로 두고 보면 물과 기름에 비할 수 있는 그들이지만, 그 사이에 유화제 역할을 하는 이만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 유화제 역할을 해낼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그들의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아네타뿐이었다.
이번 일은 그들의 관계성만 잘 이용한다면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러셀은 그리 결론지으며 아네타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아. 다름이 아니라, 에레즈 바우터에게 우리가 능력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확신을 심어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