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덫을 놓다 (1)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로스의 얼굴 위로 놀라움과 기쁨이 뒤엉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네타의 부탁’이라는 사실에 그는 마음을 빼앗긴 지 오래였다.
“들어줄게. 그게 무엇이든.”
아네타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는 듯 결연함을 내보이는 칼로스를 보며 러셀은 헛웃음을 지었다.
사랑에 빠진 아우는 가끔 이렇게 제 연모의 대상에게 앞뒤 가리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쥐여 주고 싶어 안달한다.
순애보도 이런 순애보가 없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걱정 하나 없는 이유는 뭐든 해 주겠다는 말에 기뻐하기는커녕 한껏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아네타 덕분이리라.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
“그래. 아데나워 후작이 황위라도 가지게 해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날 끌어내려서라도 안겨 줄 테냐?”
아네타의 말을 이어받은 러셀이 장난스레 묻자, 칼로스의 금안이 때에 따라 다른 온도를 품어내는 금속처럼 따스한 총기를 머금는다.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으니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럼 그에 대한 대화는 둘이 함께 돌아가는 길에 나누면 되겠군. 너무 오래 잡아 두어 미안하다. 고된 하루를 보냈으니 이제 그만 돌아들 가 봐.”
명백한 축객령이 내려지자 아네타와 칼로스는 주저 없이 몸을 일으켰다. 피곤한 건 피차일반인 상황에서 부러 버티고 앉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찌 보면 서로를 위한 선택인 셈이었다.
인사를 남긴 채 황제궁을 나선 두 사람은 아까와 달리 인적이 씻겨 나간 길을 나란히 걸었다.
발치에 깔린 달빛이 내딛는 걸음에 자박자박 부스러지는 광경만이 요란한 가운데,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아네타였다.
“아까 집무실에서 말했듯이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거절하고 싶으면 편하게 거절해도 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뭐든 다 들어주겠다고 했던 말, 진심이었어.”
“알아. 하지만 나는 당신이 들어 보고 결정해 줬으면 좋겠는데.”
“당신이 그걸 바란다면야.”
칼로스는 아네타의 단호한 태도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당신이 그랬지? 영광을 완벽하게 컨트롤하려면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그랬지.”
“내게도 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아네타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한 걸음 앞서 가로등 불 아래로 발을 들인 그가 뒤를 돌아보자, 서로를 담은 시선이 허공에서 엉켜들었다.
“괜찮다면, 당신이 나를 좀 도와주었으면 해.”
“아네타. 혹시 에레즈 바우터의 능력 때문에 그래?”
“부정하진 않을게. 가장 큰 이유는 통제의 힘에 대응하기 위해서가 맞으니까.”
아네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미간을 좁히던 칼로스의 물음에 일단 긍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당신에게 지금과 같은 부탁을 했을 거야.”
“이유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지키려면 쥘 수 있는 힘은 모조리 손에 쥐어야 하니까.”
목표를 이루겠다는 결연함은 아네타도 칼로스 못지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고,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다.
걸음을 물리는 순간 여지없이 끝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거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뒤로 물러나 있는 건 더는 그만하고 싶거든.”
지켜지는 사람보다는 지키는 사람이 되어 삶을 꾸려 가고 싶었다.
아네타는 지금껏 키워온 자신의 바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의 머리 위로 비추는 빛에도 굴하지 않고, 그보다 따스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도 당신이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 중 하나인가?”
“맞아.”
아네타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본인 면전에 대고 하기엔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는가. 부러 감출 이유는 없었다.
“그럼 좋아. 도와줄게.”
돌아오는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처럼 산뜻했지만, 그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대신 당신은 나 하나만 지켜 줘.”
진중한 표정의 칼로스는 아네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그러곤 제 숨을 앗아갈 유일한 수단인 그녀의 손끝에 감출 수 없는 경애를 표하듯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는 당신과 당신이 지키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지킬게.”
잇달아 바람이 불었다.
***
일시적인 침묵에 잠겨 있던 황궁은 날이 밝아 오기 무섭게 소란을 되찾았다.
떠오른 해가 중천에 가까워질수록 지난밤의 소란에 대해 떠들어 대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져 갔고, 발이 없는 소식은 민가에까지 닿았다.
대다수의 신문사에서는 이에 대해 대서특필하고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렸다.
아네타의 능력에 대한 기사 역시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관통의 능력을 발현하는 모습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보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적에 대해 떠들어 대고 있을 것이 불 보듯 뻔했지만, 그에 대한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다만 다른 것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만약 이 세계가 처음부터 이적이 존재하는 세계였다면, 이적은 어째서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역시 목걸이가 가주가 아닌 안주인들의 손에 물려져 내려왔기 때문일까.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진 추측에 아네타는 즉시 가위표를 쳤다.
목걸이는 가문의 보물 중 하나였다. 물려받은 이가 누구든 가주의 손을 거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렇다면 이적은 역시 자신의 의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아네타는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드는 것을 느끼며 테이블 위를 차지한 신문 더미 위로 마지막 하나를 올려 두었다. 그러자 때마침 이사벨이 들어와 기다리고 있던 이의 도착을 알려 왔다.
“각하, 발티모어 공작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아네타는 고개를 돌려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다음 날 일정을 잡아 버린 칼로스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아네타.”
“어서 와, 칼로스.”
아네타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며 몸을 일으켰다. 이쪽으로 앉으라는 말과 함께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자, 성큼 안으로 들어선 그가 맞은편에 앉았다.
칼로스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차를 내오는 시녀를 가벼운 손짓으로 물렸다.
손수 찻주전자를 들어 능숙하게 찻물을 따른 그는 아네타의 앞에 찻잔을 놓아 주며 입을 열었다.
“각오는 했어? 나는 당신 생각보다 엄한 스승인데.”
“걱정 마. 당신이 엄한 스승이면, 나는 그 스승이 가진 것들을 악착같이 훔쳐 낼 제자니까.”
아네타는 느긋하게 손을 뻗어 찻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었다. 되받는 말은 손끝에 닿아 오는 감촉처럼 매끄러운 흐름을 타고 나왔다.
“이미 한 번 겪어 봤잖아. 잘 알고 텐데?”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계약 결혼 직후, 그러니까 그에게서 가주로서의 업무를 배울 때를 언급하자 과거의 그녀를 떠올린 칼로스의 얼굴에 만족감이 떠올랐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나는 당신이 하루빨리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익히길 바라거든.”
가르치는 족족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제 것으로 만들던 그녀라면 이 역시 훌륭하게 해낼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속내를 드러내자 머금은 찻물을 삼킨 아네타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그래야 날 지켜주지.”
자신을 지키라는 말이 또 한 번 그의 입을 타고 나오자 아네타는 찻잔을 든 상태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무리일 것 같은데. 당신은 지키고 싶은 사람이긴 하지만,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아니거든.”
검술만큼은 테르사 부럽지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으니 어떤 상황이 와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 미루어 짐작하기 무섭게 칼로스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야. 그리고 그 방법은 아주 쉬우면서도 어렵지.”
쉬우면서도 어렵다. 그만큼 모순적인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아네타는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계속 내 곁에 머물러 주는 거. 그게 당신이 나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 당신이 내게 배우려는 것들은 그에 도움이 될 테고.”
“……그게 어떻게 당신을 지키는 방법이 된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네타는 칼로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과정에서 잔의 밑바닥과 받침이 부딪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누구 하나 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신이 곁에 있는 한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아니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내가 바란 건 처음부터 물리적인 보호가 아니었어.”
당신이 없으면 나는 분명 무너지고 말 것이다. 칼로스는 아네타에게 그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칼로스는 이혼 직후 아네타가 떠났을 때와 같은 상실감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지켜줄게.”
아네타는 칼로스의 의도를 확실히 이해했다. 때문에 퍽 초조한 얼굴로 저를 보는 그에게 선뜻 원하는 답을 돌려주었다.
그가 원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이미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진심이야?”
“이제 와서 물린다고 해도 당신, 받아 주지 않을 거잖아. 내 말이 틀려?”
“틀리지 않아.”
언제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냐는 듯, 칼로스의 얼굴이 밝게 피어났다. 아네타는 만면 가득 드리운 미소를 보며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당신, 당장 오늘부터 제어 연습을 시작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려고 했는데, 오늘은 그냥 넘어가고 싶군. 당신이 너무 예뻐서.”
“……이거 직무 유기 같은데. 아무래도 선생님을 잘못 택한 것 같아.”
이제라도 바꿔야 하나. 그리 중얼거리자 칼로스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찻잔을 매만졌다.
큰 손 아래 들어간 잔은 분명 그녀의 것과 같은 것임에도 상대적으로 더 작아 보이는 느낌이었다.
“아네타. 난 분명 물러 주지 않을 거라고 했어. 그리고 첫날은 이렇게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끝내는 게 좋잖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아네타가 조용히 항변하자, 칼로스는 살풋 웃으며 뜻을 물렸다.
“그래. 그럼 본래의 계획대로 하자. 당신이 그걸 원하는데 내가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지.”
“어쩐지 학생보다 선생님이 말을 더 잘 듣는 것 같네.”
“그 선생이 학생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라서 그래.”
칼로스는 소매를 걷어 내어 그 아래 감추어져 있던 창공을 드러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풀어낸 그것은 곧장 그녀의 앞에 놓여졌다.
아네타는 테이블 위에 올라온 창공의 영광을 내려다보았다. 조명 아래서 은빛 몸체를 반짝이는 그것은 그녀에게도 아주 익숙한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칼로스는 한시도 창공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으니까. 그를 마주한 시간과 창공을 마주한 시간이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적이 다른 영광의 능력을 어디까지 끌어낼 수 있는지 확인하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