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사냥 (9)
바람을 닮은 서늘함이 발목을 감싸왔다. 아네타는 생경한 감각에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그 작은 떨림을 느끼지 못할 칼로스가 아니었으나, 물러나는 일은 없었다. 타고난 눈치가 그녀가 보인 반응에 거부가 담겨 있지 않음을 속삭인 탓이다.
“당신은 정말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어.”
칼로스는 달래듯 부드러운 손길로 가느다란 발목을 어루만졌다. 사심을 담은 손끝이 아담히 불거진 복사뼈 위를 뭉근히 노닐었다.
그 적나라한 손길이 거두어질 무렵에는 벗은 발끝에 구두가 닿아 왔다.
아네타는 그 일련의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착하게 굴겠다던 사람은 어디 갔을까.”
“글쎄. 그 사람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은데.”
왼발에 이어 오른발까지 차례로 구두를 신겨 준 칼로스는 뻔뻔한 낯으로 대꾸하며 고개를 숙였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말캉한 감촉이 발등에서 느껴지자 아네타는 소리 없이 헛숨을 들이켰다.
“당신이 이렇게 예쁜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응? 하고 되물으며 드러난 다리에 입을 맞추며 올라가는 칼로스의 행동에 아네타는 쉬이 발을 뺄 수 없었다.
잘못 움직였다가는 저 뻔뻔하리만치 잘난 얼굴에 상처를 남기게 될까 봐.
칼로스는 바로 그 점을 이용했다.
끊임없이 아네타와 시선을 맞추고, 드레스 자락이 엉망으로 끊긴 무릎 부근까지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그 집요한 시선에 아네타는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다른 때보다 더욱 짙게 번들거리는 금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아네타는 이제 그만 칼로스를 저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불시에 열리는 문으로 인해 벌어진 입술은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미안하다. 생각보다 처리가 늦어졌…….”
돌아온 집무실 주인은 눈에 보이는 풍경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제 공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르게 파악한 러셀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두 사람. 여기가 어딘지 잊은 건 아니겠지?”
황제의 집무실에서 애정 행각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러셀은 담도 크다는 생각과 함께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어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그래. 오긴 왔는데, 원한다면 다시 나가 주지.”
“원할 리가요. 괜찮습니다.”
칼로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러셀은 자신이 방해꾼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떨떠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자리에 앉았다.
그들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분위기는 대화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멸했다.
러셀은 두 사람에게 오늘 습격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부터 표적이 누구인지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정보의 출처는 언제나 그랬듯 그의 직속 정보원들이었다.
다른 귀족들을 노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들 사이에 그림자를 배치한 것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아네타가 눈여겨보았던 꽃 기둥 역시 그녀가 생각한 용도로 설치된 것이 맞았다.
“습격을 사주한 범인은 귀족파의 기스턴 백작이더군. 폴터 자작과 내밀한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친밀하게 지냈던 자지.”
습격을 사주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친분이 두텁던 자의 처형과 영광의 가문에 대한 질투, 그리고 열등감.
러셀은 전자의 이유가 후자의 곁다리에 불과하며, 후자에 불을 붙인 것은 에레즈의 등장이라고 말했다.
별 볼 일 없던 바우터 남작가가 영광을 소지하게 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 이름이 격상되자, 얄팍하기 짝이 없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이다.
기스턴 백작과 그의 열등감이라면 아네타도 익히 아는 바가 있었다.
재력은 가졌으나 명예는 가지지 못한 자. 그러나 그 재력마저 아데나워에 미치지 못하여 언제나 그 두 가지를 온전히 거머쥐고자 안달하고 욕망하던 자.
‘결국 그 욕심을 덜어 내지 못해 목 위의 머리 무게를 덜어 내게 생겼네.’
어리석은 백작을 향한 아네타의 감상은 가차 없었다.
“기스턴 백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사이 칼로스가 물었다.
“습격 정보를 입수하는 즉시 기스턴가의 별장에 구금해 두었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백작이 그곳으로 요양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지.”
아네타는 당신께서 그리 보이도록 손을 쓴 것이 아니냐는 물음은 건네지 않았다. 돌아올 답이 뻔한데 부러 물어 뭐 하겠는가.
“그 뒤에는 정보원 하나를 백작의 대리인인 척 보내서 그가 습격을 의뢰했다는 증거를 확보했지. 침입할 루트나 작전에 대한 정보 역시 같은 방법으로 입수했고.”
증거는 넘쳐났고,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을 명할 수도 있었지만 그때의 러셀에겐 얻을 것이 남아 있었다. 때문에 그는 이 일을 도운 정보원에게 불온 분자 소탕 대신 다른 명령을 내렸다.
타깃 외의 다른 인물을 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추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괜히 건드려 봤자 귀찮아지기만 한다는 말과 함께 추가금을 건네자, 살수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돈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전자의 말보다 그 뒤에 건네어진 돈을 믿는 게 틀림없었다.
“우리는 창공이나 관통 하나만 있어도 안전하니 걱정하지 않았는데, 하필 그와 관련해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더군.”
“그 변수가 에레즈 바우터의 진짜 능력이군요.”
아네타가 입을 떼자,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 듯 미간을 찌푸린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목소리를 낸 이는 칼로스였다.
“역시 능력을 확인하고자 습격을 막지 않으신 겁니까?”
“그래. 에레즈 바우터가 무슨 수로 예언이니 뭐니 하며 앞일을 떠들어 댄 건지는 몰라도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아서 말이지.”
러셀은 확증을 얻고자 했다. 에레즈가 예지 능력은 거짓이 아니지만, 공을 세우고 싶다는 욕심에 보지 못한 것을 보았노라 거짓말했다고 우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로써 확실해졌다. 에레즈 바우터의 능력은 예지가 아니라, 다른 영광을 무력화시키는 통제야.”
통제(統制). 에레즈가 등장하는 시점에서 진즉에 나왔어야 했을 이름이 지금에서야 나왔다. 아네타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데나워 후작에겐 그 능력이 통하지 않는 것 같더군.”
러셀은 남다른 통찰력으로 단번에 본질을 꿰뚫었다. 그는 확신하는 투였지만, 아네타는 차마 긍정만을 남긴 채 입을 다물어 버릴 수는 없었다.
“네. 하지만 에레즈 바우터의 능력에 대한 정보가 없는 만큼, 결론을 내리는 건 다음으로 미뤄 두어야 할 것 같아요. 또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요.”
통제의 영광은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영광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봉인한다. 대상을 골라 능력을 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네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여지를 남겨 두었다.
또 다른 특성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에레즈는 자신이 알고 있는 능력에 한하여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런 그가 이적의 능력을 알게 된 지금, 여전히 통제의 능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네타는 그에 대한 답을 도출할 수 없었다.
“그럼 그 문제에 대해서는 차차 확인을 해 보는 걸로 하지. 너무 서둘렀다간 낌새를 눈치채고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적당히 모르는 척하고 있어.”
“테르사와 세르세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분명 에레즈의 능력에 대해 눈치챘을 텐데요.”
다른 이들은 몰라도 영광의 주인들이라면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눈치챘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는 상대였지만 아네타는 의례적으로 물었다.
“그들에겐 내가 말을 전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아네타의 대답과 함께 러셀의 시선은 흐르듯 떨어져 그녀의 목에 걸린 이적에게 가 닿았다.
관망의 영광을 통해 겨우 존재만을 인정받았던 것을 자신의 대에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던 그는 어쩐지 생경한 기분이 들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이적이란 말이지. 본래의 이름에 또 다른 의미가 더해진 셈인가.”
행적이 묘연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적(異跡). 그 이름 아래에는 ‘기이한 행적’이라는 본래의 의미 외에 또 다른 뜻이 존재하는데, 바로 ‘기적’이었다.
아네타는 결국 두 가지 뜻을 모두 이룬 영광에 손을 올리며 말없이 입술을 맞물렸다. 누구보다 기적이라는 이름을 깊고 절실하게 통감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없던 영광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기적에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사람이었다. 영광의 부재에 대한 비밀을 끌어안고, 남몰래 상한 속을 감춰야 했던 만큼 가슴 한구석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기이한 행적도, 기적도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광을 찾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는지. 아네타는 불쑥 고개를 든 진심에 자조하며 한숨을 삼켜 냈다.
다행히 겉으로 드러낸 감정은 없었다.
“폐하, 남은 일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숨이 붙어 있는 살수들을 적당히 심문하는 척하다가 남은 잔당들과 기스턴 백작의 즉결 처분을 명할 생각이다. 그 뒤엔 당연히 재산 몰수와 작위 회수가 이루어지겠지.”
“저도 돕겠습니다.”
기스턴가의 재산이라면 못해도 몇몇 부서의 몇 달치 예산 정도는 되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굴리던 러셀은 눈을 들어 궂은일을 자처하는 칼로스를 응시했다.
“아니. 네가 도울 일은 없다.”
의외의 답이 칼같이 떨어졌다.
“내가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야. 그런 상황을 겪게 한 걸로도 모자라 뒤처리까지 공작의 손을 빌릴 수는 없지. 안 믿겠지만, 일단은 나도 염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이유라면 저는 괜찮습니다. 도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내가 안 괜찮으니 못 들은 걸로 하지.”
거듭되는 청에도 러셀은 단호하기만 했다. 아네타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공작이 도울 일이 없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이번 일을 통해 거둔 득에 비하면 실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연회장으로 사용되던 아렐 궁 벽은 기스턴 백작의 재산을 몰수해 고치면 그만이었고, 심문이야 루이사에게 맡기면 된다. 부상을 당한 기사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요량이었다.
러셀은 처리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언급하며 칼로스에게 자신을 돕는 것 외에 가장 적절한 일을 주고자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 은근한 표정은 아네타에게 있어 하나의 신호와도 같았다.
“게다가 공작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아데나워 후작?”
“……네.”
아네타의 이름은 어김없이 언급되었다. 속내를 꿰뚫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물어오는 그에게 아네타는 긍정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로스에게 부탁을 할까 고민하던 것이 있었으니까.
러셀이 그것을 어떻게 눈치챘느냐에 대해서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제 아래에 두고 있는 황제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곤 했기에.
아네타는 그에 대해 묻기 보다는 솔직하게 입을 여는 걸 택했다.
“부탁할 게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