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사냥 (8)
“예.”
“존명.”
허리에 두른 검대에서 자비의 영광 커타나를 뽑으며 내려오는 러셀을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누구보다 먼저 그를 호위하며 나섰던 칼로스는 만류하는 기색 없이 검을 갈무리했고, 루이사 역시 황제의 명대로 기사들을 물리기에 바빴다.
제 목을 노리고 습격을 감행한 수십 명의 살수를 마주하면서도 러셀은 조금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저들이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자신이 저들을 죽이는 것이 더 빠르다는 확신을 품은 까닭이다.
러셀에겐 그 오만한 확신을 이루어 낼 힘이 있었다. 그 사실은 그가 커타나로 허공을 베는 것과 동시에 입증되었다.
날이 서 있지 않은 뭉툭한 검이 허공을 가르고 지난 자리에 생겨난 것은 은빛 궤적이었다.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검격은 매섭기 그지없는 기세로 살수들을 덮쳤다. 그 끝에서 솟구치듯 피어오르는 건 붉디붉은 피였다.
그토록 고전했던 것이 무색하게, 살수들의 수는 빠르게 줄어 갔다. 러셀은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고, 종국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으로 수십 명의 살수들을 쓰러뜨렸다.
황제의 명으로 물러나 있던 기사들을 그제야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러셀은 제 이름을 연호하는 귀족들의 함성을 들으며, 자비를 거두었다.
황제를 노리며 검을 휘둘렀던 살수들이 커타나의 검격에 베여 죽거나 전투불능이 되었다면, 아네타와 테르사를 공격하던 살수들은 빠르게 관통을 넘겨받은 테르사에 의해 화살받이 신세가 되었다.
테르사는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기는 즉시 손을 놓았다. 그녀는 일차적인 능력만 사용할 수 있었던 아네타와 달리 정확히 살수들만을 노려 화살을 꽂아 넣었다.
“커흑!”
테르사의 힘과 정확도, 노련함이 더해진 관통의 화살은 살수들을 고슴도치와 흡사한 몰골로 만들었다.
온몸에 가시가 돋아난 듯 화살을 꽂은 그들은 울컥 피를 토해 내며 나동그라졌다.
비명이 새어 나올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습격이 진압되고 난 뒤에 돌아본 연회장 내부의 광경은 참혹했다.
날아간 벽, 피 웅덩이 진 바닥, 농담으로라도 양호하다 말할 수 없는 상태의 살수들.
그 모든 것이 한데 모여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아네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에 러셀이 능력을 발현함으로 인해 더욱 짙어진 피비린내까지 더해지자 토기가 밀려들었다.
아네타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돌리자, 때마침 그녀의 곁으로 검은 독수리의 모습을 한 칼로스가 내려앉았다.
상황이 마무리되는 즉시 아네타의 곁으로 찾아든 칼로스는 재빨리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며 물었다.
“아네타, 왜 그래.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
조급함이 여실히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다친 곳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피비린내가 조금 역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뿐이야.”
아네타는 최대한 코로 숨을 쉬지 않으려 애쓰며 답했다.
“그럼 같이 밖으로 나가자.”
“가도 나 혼자 갈 거야. 당신은 상황 정리하는 걸 도와야지.”
바깥 정리야 한참 전에 끝났을 테니 걱정은 없었다.
“폐하께서 당신 데리고 먼저 집무실로 가 있으라고 하셨어.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칼로스.”
아네타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설득할 기색을 보이자,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테르사가 나서서 칼로스를 거들었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어서 가 봐. 안색이 안 좋아 보여.”
“테르사까지…….”
아무리 안색이 안 좋다 한들 살수들과 직접 검을 맞대고 싸운 두 사람보다 힘들고 피곤할까. 아네타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태도를 바꾸었다.
“알겠어요. 두 사람 말대로 할게요.”
그녀에겐 더 이상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일 기운이 없었고, 그것은 칼로스와 테르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괜한 일로 고집을 부려 피곤한 이들을 더 피곤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부탁하는 김에 저쪽에 잡아둔 포로도 부탁할게요. 다른 살수들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의 부상이니까 곧 깨어날 거예요.”
“포로는 또 언제 확보했어? 기특하네.”
“한 명이라도 고이 잡아 둬야 심문에 걸리는 시간이 단축될 테니까요.”
아네타는 뒷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살수를 보다 여전히 피 웅덩이를 만들어 내고 있는 다른 살수들을 눈에 담았다.
잔혹하다면 잔혹한 광경에 인상이 절로 써졌다.
“저쪽을 보니 그러길 잘한 것 같네요.”
저대로 영원히 눈 뜨지 못할 것 같아요. 아네타는 뒷말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오늘 하루 테르사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건넸다.
“오늘 여러모로 고맙고 미안했어요, 테르사.”
“미안하다는 말은 됐고, 고맙다는 인사만 받을게.”
“네. 그럼 조만간 또 봐요.”
아네타가 대화를 마무리 짓자, 칼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상체를 굽히며 팔을 뻗었다.
테르사는 이미 그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눈치챈 듯 장난스레 휘파람을 불었고, 아네타는 무릎 뒤를 받치며 들어온 팔이 몸의 중심을 흐트러뜨리자 당황하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기울어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맨발로 다니면 발 다치니까 이렇게 가자.”
아네타는 칼로스를 타박하기 위해 입술을 벙긋거리던 것도 잠시, 하려던 말을 한숨과 함께 삼켰다.
이번에도 백기를 흔든 건 아네타였다.
“그러시던지요. 기회주의자 씨.”
보는 눈이 많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네타는 자신을 신줏단지 모시듯 깊숙이 끌어안는 칼로스의 품에서 몸을 늘어뜨렸다.
벗어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기회주의자라니.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지금이라면 거절당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이러는 거잖아, 당신.”
돌이켜보면 그는 항상 그랬다. 아네타를 보며 당신 말이 세상의 진리라는 듯 한없이 유순하게 굴다가도, 기회가 엿보이면 이런 식으로 훅 치고 들어온다.
아무리 작은 틈새라도 집요하게 비집고 들어오니 당해 낼 수가 있나. 달관한 듯 헛웃음을 짓던 찰나, 잘 아는 얼굴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네타. 구두는 가지고 가야지.”
세르세는 익숙한 구두를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관통을 잡으러 가기 전 팽개치듯 벗어던졌던 그 구두였다.
“아, 고마워.”
아네타는 손을 뻗어 세르세가 내민 구두를 받아 들었다. 표면이 엉망으로 긁힌 것을 보니 저택으로 돌아가는 즉시 이사벨의 손에 처분되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신발이었기에, 아네타는 구두를 소중히 품 안에 넣었다.
아네타가 구두를 되찾고 나서도 칼로스의 품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은 칼로스와 세르세, 둘 모두에게 뜻밖의 일이었다.
특히 은연중에 아네타가 그의 품을 벗어나길 바라며 앞을 가로막았던 세르세는 아네타의 변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런 진전도 없던 지난날이 허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깊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그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했다.
세르세의 시선은 아네타를 감싼 칼로스의 팔에 닿았다가, 곧 올라왔다. 저를 여상히 담아내는 푸른 눈동자에 그는 쓰린 속내를 감추었다.
“걱정하고 있었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너도. 돌아가서 푹 쉬어.”
“그래.”
칼로스와 세르세의 시선이 마주친 것은 세르세가 대답과 함께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세르세는 연회 초반에 마주했을 때와 달리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고, 칼로스는 그 찰나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
상처받은 듯 어두운 낯에는 너무도 익숙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불안과 초조. 아네타의 마음이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을 때 그 역시 느꼈던 감정. 그것을 세르세에게서 보게 되었지만, 그를 두고 같잖은 승리감에 젖을 만큼 칼로스는 저열하지 않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네타.”
그러나 그뿐이다. 칼로스는 세르세를 상대로 동정심도, 동질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회장 밖으로 나오자 보이는 것은 황급히 황궁을 떠나려 하는 이들의 분주한 뒷모습이었다.
마음 같아선 저들이 지난 자리에 제 발길도 얹어 아네타를 데려다주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황제와 반목하는 세력이었다면 모를까,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입장에서 명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칼로스는 가만히 제 품에 안긴 아네타를 내려다보았다. 서늘한 공기가 살갗을 스치는 가운데 그녀와 맞닿아 있는 곳만은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의외로 잘 안겨 있네. 구두 찾자마자 내려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칼로스는 지금껏 품고 있던 의문을 입 밖에 내는 것에 망설임을 두지 않았다.
“스스로 고생을 자처하겠다는데 내가 뭐 하러.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는데 오히려 잘 된 거지.”
힘없이 기대어 있던 아네타는 슬쩍 눈만 들어 그를 응시했다.
“당신이 그렇듯이, 나도 굴러들어온 기회를 차 버리는 사람은 아니잖아.”
“그래. 그랬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다 확신이 들 때가 되어서야 손에 쥐지만.”
“어느 누가 그러지 않을까.”
아네타가 자명한 사실을 말하듯 어깨를 으쓱이자 칼로스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내가 손해 볼 거 없어서 허락한 거야. 그러니까 떨어뜨리지 마. 당신이 자처한 일이니까 힘들어도 끝까지 안전하게 모셔.”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두 팔이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당신 놓을 일은 없어.”
“깃털처럼 가벼워서 힘들 일 없다는 말은 안 하네.”
“그런 틀에 박힌 뻔한 멘트는 당신 취향 아닌 거 아니까.”
칼로스는 서슴없이 답했다.
“맞아. 잘 알고 있네.”
“말했잖아. 당신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이건 그 노력 중 하나에 불과해.”
또 한 번 자연스럽게 이어진 대답과 함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까의 소란이 거짓이라는 듯,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세상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아네타는 그 편안한 침묵을 틈타 이적으로 추정되는 목걸이의 펜던트를 쥐고 어루만졌다.
자연히 떠오르는 건 두 영광의 힘을 빌려 살수들을 꿰뚫었을 때의 일이었다.
자책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아네타는 자신의, 지인의, 주군의 목숨을 노린 이들을 제 손으로 쏜 것에 대한 죄책감 따윈 가질 생각이 없었다.
대응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쪽이 죽거나 다쳤을 테니까.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화살을 맞은 이들의 숨이 끊겼는지 어쨌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화살에 맞았다고 무조건 죽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더욱 차분해졌다.
아네타가 생각에 잠긴 사이, 칼로스의 걸음은 황제 궁에 다다랐다. 시종장은 칼로스의 존재에 아무런 연유도 묻지 않고 집무실로 안내해 주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그들에게 있어 인사를 나눈 뒤 자연스레 이어지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시종장은 다만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아네타의 상태를 살폈다. 그 세심한 눈길이 거두어진 것은 그녀가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결론을 내린 뒤였다.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정중한 물음에 칼로스는 아직 제 품에 안겨 있는 아네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젓자 돌아가는 답은 부정이 되었다.
“그럼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생기시면 불러 주십시오.”
허리를 굽혀 인사한 시종장은 그 길로 집무실을 나섰다.
아네타는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칼로스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 줘.”
“그래.”
칼로스는 조심스럽게 아네타를 내려주었다. 그가 앉혀 주는 대로 소파에 기대어 앉은 아네타는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웬일로 순순히 물러나실까.”
“사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려고 했는데, 당신 피곤해 보여서. 오늘은 조금 착하게 굴어 보려고.”
“기특한 생각을 했네.”
테르사를 따라하듯 건네는 말에 칼로스는 아네타의 손에 들린 구두를 부드럽게 뺏어 들었다.
그녀의 발치로 몸을 낮추며 한쪽 무릎을 땅에 대는 일조차 그는 서슴지 않았다.
“그럼 기특한 만큼 더 사랑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