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42화 (42/122)

42화. 사냥 (6)

“대체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거지?”

“글쎄요.”

아네타는 테르사가 의문스레 중얼거리는 말에 대꾸하며 눈을 굴렸다. 러셀이 몸소 예고까지 하고 나선 일이 무엇인지 예측하기 위함이었다.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은 평소와 다른 변화를 찾는 것이었다.

일의 경중이 어떻든, 러셀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니까.

분명 회장 어딘가에 그 일에 대비한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추측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빠르고 유동적으로 흐르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바깥쪽 벽과 결코 멀지 않은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는 꽃 기둥.

허리쯤 되어 보이는 높이의 그것은 좁은 틈새만을 남겨 둔 채 일렬로 늘어져 있었다.

‘……벽 쪽으로 가는 걸 막으려는 걸까?’

기둥 자체에선 특별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녀의 주의는 테라스로 옮겨갔고, 시선을 드는 순간 정체불명의 굉음이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쾅!

테라스 문이 어느 한쪽으로 엉망으로 처박히는 것과 동시에 벽이 무너져 내렸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세르세가 아네타의 앞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아네타는 그의 등에 가로막혀 앞이 보이지 않자, 발을 떼어 한 걸음 비껴 나왔다.

날아간 벽의 잔재를 짓밟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은 복면을 쓴 괴한들이었다.

바람이 벽의 부재를 틈타 안으로 밀려들자, 출처가 분명한 화약 냄새가 훅 끼쳤다.

“황제 폐하를 호위하라!”

무장한 기사들이 한발 늦게 들이닥친 것도 그때였다. 선두에 서 있던 루이사가 빠르게 달려 황제가 있는 단상으로 향하는 사이, 아네타는 상황을 파악하고자 애썼다.

황제가 모종의 이유로 저들을 고용하여 습격을 가장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세울 필요도 없었다.

러셀은 분명 닥쳐올 상황을 미리 보고받고, 그것을 도리어 이용하는 중일 테니까.

그렇다면 저 많은 이들을 고용한 것은 누구일까.

‘이번에도 에레즈 바우터의 짓인가?’

아니, 아니다. 아네타는 에레즈의 상태를 살피는 즉시 생각을 수정했다. 놀라 굳어 버린 낯에 깃든 선명한 공포와 경악은 사감을 제하지 않고 보아도 거짓일 수 없었다.

또한 현재 바우터가에는 저 많은 살수들을 고용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에레즈를 향한 의심을 접으면서도, 아네타는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을 고용한 게 에레즈가 아니라면 러셀은 대체 무엇을 노리고 습격을 묵인했을까.

의문의 실마리가 잡힌 것은 칼로스와 테르사가 살수 무리에 맞서려 하는 순간이었다.

겁에 질려 있던 에레즈가 돌연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는 순간, 영광을 겨누던 두 사람의 표정에 금이 갔다.

“……능력이 발현되지 않아.”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지금껏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는데.”

테르사가 낮게 중얼거리자, 분신의 영광을 통해 확인을 마친 세르세가 못을 박았다. 단상 위에 있는 칼로스의 상황도 다르지 않은지 영광을 거둔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이건 분명 에레즈 바우터의 능력이야.’

역시 에레즈 바우터의 능력은 바뀌지 않았다. 아네타는 통제의 영광을 이용해 가주들의 능력을 막고선, 저는 안전한 곳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에레즈의 작태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고운 뺨에 손자국을 새기고 싶다는 거친 생각마저 고개를 들었다.

‘생각이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짓이지?’

하지만 아네타는 끝내 에레즈의 뺨을 올려붙이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단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붉은 황제와 시선이 마주친 까닭이다.

줄곧 에레즈의 행동이나 표정 변화 따위를 살피고 있던 러셀은 아네타가 자신과 같은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네타는 그것이 에레즈를 건드리지 말라는 뜻임을 알아챘다.

당연하게도 반발 의사는 없었다. 아네타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그러는 사이 열댓 명의 살수들이 황제를 노리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이쪽으로 접근하려는 낌새를 보였다.

“내가 상대할게. 두 사람은 다치지 않게 뒤로 물러나 있어.”

“하지만 저들은 훈련된 살수들이에요, 테르사. 아무리 당신이라도 혼자 상대하는 건 무리예요.”

“걱정 마, 아네타. 이 테르사 로펠락이 겨우 저런 녀석들에게 당할 것 같아?”

테르사는 언제나와 같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치 빠른 귀족들은 칼로스에 이어 테르사마저 영광을 거두자 그들의 힘에 문제가 생겼음을 눈치챘다.

테르사는 그들이 살수를 보며 토해 내는 경악 어린 탄성과 비명 속에서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넋 놓고 있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과연 전장을 누비는 영웅다운 기개로 테르사는 등 뒤에 있는 이들을 지키듯 앞으로 나섰다.

날쌘 짐승처럼 돌진하는 그녀의 뒤를 따르는 건 겁에 질린 귀족들 사이에 섞여 있던, 처음 보는 낯선 사내 둘이었다.

그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건 둘뿐만이 아니었다. 아네타는 묘하게 경계 태세를 갖추는 몇몇을 보며 러셀이 귀족들 사이에 그림자를 심어 두었음을 짐작했다.

‘역시. 그냥 내버려 둘 분은 아니지.’

그나마 테르사가 저들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네타는 긴장으로 굳어졌던 몸이 조금이나마 이완되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루이사가 이끌고 들어온 기사들 뒤에서 마지막 보루처럼 버티고 서 있던 칼로스는 지금의 상황에 깊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역시 아네타와 마찬가지로 회장 내부를 살피며 갖가지 추측들을 늘어놓았지만, 거기에 영광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아네타와 떨어져 있어도 그녀가 제 눈에만 들어온다면 충분히 지켜 낼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지던 능력의 부재는 그러한 자신감을 으스러뜨렸다.

그러나 그에겐 으스러진 자신감을 붙들고 자책할 시간 따윈 없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저들을 처치하고 상처 하나 없는 아네타를 보며 안도하고 싶다는 일념하에, 칼로스는 검을 고쳐 쥐었다.

날카롭던 눈매가 날을 세운 맹금의 발톱처럼 더욱 매섭게 벼려졌다.

“칼로스 님,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아니. 나도 돕지.”

그를 눈치챈 루이사가 살수 하나를 베어 내며 만류했지만, 뜻한 바를 뒤로한 채 물러날 칼로스가 아니었다. 칼로스는 피 튀기는 교전에 뛰어들었고, 이어지는 것은 뻔했다.

횡과 종을 넘나들며 베고, 또 베는 것의 반복.

훈련받은 살수들을 상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칼로스는 검을 휘두르며 상대를 베어 내는 일에 망설임을 두지 않았다.

내 것을 빼앗길 바엔 상대의 것을 빼앗는다. 그를 수없이 반복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그에겐 불온한 목적을 가지고 습격을 감행한 이의 목을 베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칼로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뒤로 물러났다. 가슴이 낮게 오르내리는 가운데 검을 적신 피를 털어 내자, 발치가 붉게 물들었다.

그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칼로스는 서늘한 시선을 들어 아네타의 상황을 살폈다.

혹여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했으면 어쩌나. 걱정에 애가 닳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눈에 담는 순간, 악물린 잇새로 새어 나온 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었다.

등 뒤에 벽을 두고 몰린 세르세, 그리고 그 앞을 막아선 살수의 뒤통수에 있는 힘껏 화병을 던져 기절시키는 아네타.

누군가에게 지켜지기는커녕 도리어 위기에 처한 이를 구해 내는 모습이 퍽 그녀답다 여기는 가운데, 그와 마찬가지로 검을 털어 내던 루이사가 감탄 어린 투로 말했다.

“누구에게든 쉽게 당해 주실 분이 아니시군요.”

“그렇지.”

주어 없는 대화는 짧은 긍정으로 끝났다. 칼로스와 루이사는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쥐었다.

***

“조심해. 그러다 큰코다쳐.”

아네타는 세르세가 의뭉스럽게 웃으며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를 위협하던 살수를 쓰러뜨렸다. 그런 자신을 두고 단상 위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알 턱이 없는 그녀는 그저 두 손을 탁탁 털어 낼 뿐이었다.

“맷집이 세서 기절 안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깔끔하게 넘어가 버리네.”

“아무리 맷집이 세도 머리를 단련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너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에서 기인한 거지.”

아네타는 검은 다루지 못하지만, 주변에 있는 것들을 이용해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 지 오래였다. 아데나워의 후계자로, 주인으로 살아오면서 암살 위협을 겪어 온 탓이다.

목숨을 위협받았던 순간마저도 하나의 경험이 되어 버리고, 그를 통해 익힌 것으로 다음 위협에 대항한다는 사실이 퍽 서글프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이곳에서의 삶인 것을.

혀를 한 번 차는 것으로 입 안에 감돌던 씁쓸함을 걷어 낸 아네타는 가까이 있는 테이블에서 테이블클로스를 걷어 세르세에게 건넸다.

“이건 왜?”

“정신 차리기 전에 가진 거 다 빼앗고, 이걸로 묶어.”

“그 말 들으니까 도리어 우리가 악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인데.”

뒷골목 삼류 건달이나 할 법한 말이 아네타의 입에서 나오자, 세르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심문할 포로를 확보하는 것뿐이야. 저쪽은 그럴 정신이 없어 보이니까. 몇몇은 살아남겠지만 그래 봤자 죽는 것만도 못한 상태일 테고, 폐하께선 빠른 일 처리를 선호하시거든.”

러셀은 이미 습격을 벌인 이를 잡아넣을 증좌를 쥐고 있을 테지만 증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에 대해 언급하자 세르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보면 볼수록 대단한 것 같아.”

“칭찬 고마워.”

세르세가 기절한 살수의 몸을 단단히 묶고 몸수색을 하는 동안, 아네타는 손수건을 이용해 살수 근처에 흩어진 화병 조각을 치웠다. 천을 끊어 낼 수 있을 만한 물건을 곁에 두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저놈들 말이야. 묘하게 폐하와 우리만 노리는 것 같은데.”

“내 생각도 같아. 수가 빤히 읽힌다고 해야 하나.”

세르세의 의견은 타당했고, 잇따르는 것은 아네타의 동의였다.

살수들은 러셀의 그림자들보다 테르사를 향해 더 많은 공격을 가했고, 그들의 눈을 피해 빠져나온 이도 더 가까이에 있던 귀족들이 아닌 세르세를 노렸다.

칼로스의 상황을 살펴도 마찬가지다. 그는 루이사보다 더 많은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로 인해 확실해지는 건 하나다.

처음부터 타깃은 영광의 소유자들뿐이었다.

‘그래, 영광. 그것이 내게 에레즈 바우터에게 밀리지 않을 힘을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중한 이들이 눈앞에서 난전을 겪고 있다. 그 원인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아네타는 분함을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손을 놓고 있고 싶지도,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도 힘이 있었더라면.’

아네타는 지금껏 당연하다는 듯 배제되어 왔던 영광의 존재를 강하게 염원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을 원해?]

머릿속을 웅웅 울려 대는 목소리는 인외의 것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귓가를 통하지 않는 목소리가 또 한 번 머리를 울렸다.

[네가 원한다면 줄 수 있어.]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는 사람을 홀리는 알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아네타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지는 긍정은 이성을 거치지 않았다.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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