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사냥 (5)
황제를 알현하여 프리마 녹테에 대해 알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에레즈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모든 이들의 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될 거라고.
기대와 더불어 칼로스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상상 속의 그는 사랑을 속삭이며 누구보다 소중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처한 현실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에레즈는 아무런 공치사 없이 입을 닫아 버린 러셀에게 불만을 느끼며 입술을 짓씹었다.
숨은 공신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에레즈의 눈에는 모든 게 불합리해 보였다.
하다못해 저깟 사냥 대회에서도 우승을 하면 포상을 내리는데 자신에게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불만과 함께 에레즈를 휩쓴 것은 불안이었다.
‘혹시 내가 한 거짓말을 눈치챈 건 아닐까?’
에레즈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단상 위를 응시했다.
러셀은 노기 하나 없이 멀끔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여유롭기 짝이 없는 모습을 눈에 담고 나서야 불안이 가셨다.
‘그래. 눈치챘을 리가 없지.’
능력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 이렇게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울렁이는 가슴을 달랜 에레즈는 마침 사냥감과 함께 나타난 칼로스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조연인 테르사 따위는 가뿐히 이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결과는 예상과 다르게 이어졌다.
응당 그의 손에 쥐여져야 했을 승기가 엉뚱한 사람에게 가 버리자 에레즈는 분개했다.
‘원작이 틀어져도 정도가 있지. 칼로스가 겨우 조연 따위에게 지다니, 이게 말이 돼?’
에레즈는 칼로스와 테르사가 악수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탄식을 삼켰다. 그의 눈에는 지금 칼로스가 웃고 싶지 않음에도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네타보다 먼저 나서서 상심한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그리하면 그에게 이제라도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으리라.
에레즈는 기대를 품으며 칼로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 중 하나가 아네타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우쭐한 기분이었다.
“괜찮으세요? 저는 분명 공작 전하께서 우승하실 줄 알았는데. 아쉬워요. 정말 간발의 차였잖아요.”
“정정당당한 승부에서 패했으니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지.”
눈꼬리를 내리며 안타까움을 드러냈으나, 칼로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이미 결정지어진 승패보다는 아네타에게로 향하는 일이 더 급했다.
“할 말이 더 남아 있나?”
“네?”
“없으면 길 막지 말고 비켜.”
에레즈를 대하는 칼로스의 태도는 건성이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에레즈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칼로스는 태도만큼이나 냉한 바람을 일으키며 그의 곁을 스쳤다.
다른 이들이 대담했던 에레즈의 행동에 대해 수군거리거나 말거나, 막힌 길을 뚫은 칼로스는 당연하다는 듯 아네타의 곁으로 다가갔다.
“각하, 명하신 것들을 준비해 왔습니다.”
아네타의 지시를 받고 떠났던 시종이 돌아온 것도 그때였다.
칼로스는 그녀가 명한 것이라는 말에 반응하여 시종의 손에 들린 물건을 살폈다. 온수가 담긴 대야와 수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날 위해 준비한 거야?”
감격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에레즈를 대할 때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그 선명한 온도 차에 아네타는 힐끗 에레즈가 있는 쪽을 살폈다.
에레즈는 입술을 엉망으로 짓씹으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모습을 보니 안도가 되었다.
“그래. 당신 아니면 이걸 누가 쓰겠어.”
아네타가 택한 건 언제나와 같은 부정이 아닌, 긍정이었다. 그에 칼로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마워, 아네타.”
칼로스는 그녀의 배려만큼이나 따스한 물에 손을 담가 짐승의 피를 닦아 내었다. 그 일련의 행동은 성물을 다루는 신자처럼 조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수상은 피가 녹아든 물을 치우기 무섭게 시작되었다.
테르사의 공을 치하하는 러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아쉽지?”
아네타는 그가 에레즈에게 드러내지 않은 진심을 기민하게 꿰뚫었다. 살을 맞대며 살던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듯, 그가 내보이지 않은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래. 당신에게 지켜봐 달라는 말까지 했었으니까.”
결과는 나쁘지 않지만 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돌아볼 만큼 멋진 모습을.
“내 눈에는 오늘 당신이 테르사보다 멋있어 보였어.”
그런 그의 속내를 꿰뚫듯, 아네타는 또 한 번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을 건네었다.
“……오늘, 무슨 특별한 날이었던가?”
그의 얼굴이 당연한 수순처럼 붉게 물들었다. 두 손으로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는 모습을 보던 아네타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부끄러워?”
칼로스는 더욱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기 급급하여 아네타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미처 가리지 못한 귀 끝만이 붉게 물들어 그의 마음을 대변할 뿐이었다.
***
이튿날 저녁. 황궁에 도착한 아네타는 마차에서 내리기에 앞서 목에 걸린 어머니의 목걸이를 매만졌다.
시녀들은 그녀가 오늘만큼은 다른 목걸이를 착용하길 바라는 마음을 은연중에 드러냈지만, 아네타는 모르는 척 그에 응해 주지 않았다.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어제까지만 해도 다른 목걸이를 착용할 생각이었으니까.
생각이 바뀐 것은 목걸이를 풀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이음새에 손을 올리는 그 찰나의 순간, 아네타는 그것을 몸에서 떼어 놓아선 안 된다는 기묘한 직감을 느꼈다.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턱이 없으나, 은밀하게 피어오른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참 이상하지.’
저를 사로잡은 감정을 깊게 파고들려 해 보아도 무언가에 가로막힌 양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한숨을 삼킨 아네타는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황궁은 연회 참석을 위해 모여든 귀족들로 북적였다.
한껏 멋을 내고 나타난 그네들이 입장을 기다리는 가운데, 아네타는 영광의 주인이란 이유로 늘어진 줄의 앞머리에 설 수 있었다.
그녀가 제 등 뒤로 닿아 오는 익숙한 시선을 인식한 것도 그때였다.
힐끗 고개를 돌린 아네타는 시선의 주인이 지금 막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 칼로스임을 확인한 뒤 도로 정면을 응시했다.
“내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네, 전남편 씨.”
칼로스의 시선이 닿은 곳이야 뻔했다. 아네타는 열린 문 사이로 발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아네타가 이번 연회에 입고 나온 드레스는 하얀 레이스와 작은 다이아몬드가 탑을 감싼 서클백 드레스였다.
칼로스는 뒤가 둥글게 트인 드레스를 철천지원수 보듯 노려보았고, 아네타는 그 사실을 무던한 투로 꼬집었다.
“그렇게 노려본다 해도 없는 천이 생겨나거나 하지는 않는데 말이지.”
“아네타. 나는 그저 당신을 함부로 눈에 담을 놈들이 못마땅한 것뿐이야.”
칼로스는 어제 아네타의 주위를 맴돌던 날벌레들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그가 그녀의 손목에 손수건을 매어 주고, 보란 듯이 손등에 입을 맞춘 것은 모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이혼을 했든 안 했든 내가 당신 옷차림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어. 당신이 뭘 입든 그건 당신 마음이니까.”
칼로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며 들끓는 속을 가라앉혔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맞물리는 것과 동시에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멀리서 어깨 높이로 손을 올리며 알은척하는 사람은 테르사였다. 곁에는 세르세와 버논, 크리스도 함께였다.
“저 넷, 의외의 조합인데.”
“동감이야.”
아네타는 칼로스의 말에 동의했다. 외모부터 성격, 풍기는 분위기까지 천차만별인 그들의 만남은 결코 눈에 익지 않은 류였다.
접점은 있어도 인사 외에 사담을 나누지는 않는 관계. 딱 그 정도에 머물러 있었고, 머물러야 했을 이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묘한 감상이 일었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꽃들을 하나의 꽃다발로 엮어 놓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보기 좋네.”
“어쩌면 당신을 사이에 두고 이어진 관계가 아닐까 싶은데.”
“그건 너무 비약적이야.”
“과연 그럴까.”
칼로스는 눈에 보이는 사실을 부정하는 아네타의 뒤를 당연하다는 듯 따랐다. 그 과정에서 세르세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것은 인사가 아닌 명백한 견제였다.
‘또 저런 얼굴이군.’
아무리 아네타의 친구라고 해도, 칼로스는 세르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 관심 없는 얼굴로 살던 이가 아네타를 마주하는 순간마다 낯빛을 달리하는데 어찌 곱게 볼 수 있을까.
‘차라리 다른 이들처럼 아네타의 부를 노리고 접근하는 자였다면 처리가 한결 수월했을 텐데.’
어느 모로 보나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해가 될 인물은 아닌지라 칼로스는 묵직한 한숨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저를 반겨 주는 이들과 인사를 마친 아네타는 무감한 눈으로 회장을 훑었다.
잡아들인 짐승의 피비린내로 얼룩진 어제의 분위기가 호전적이고 열성적이었다면, 오늘은 정반대였다.
곳곳에서 피어오른 분홍빛 기류는 연신 단내를 풍겨 댔다.
그런 달착지근한 분위기 속에서 지루한 표정의 아네타가 발견한 것은 살살 눈을 접어 웃고 있는 에레즈였다.
그는 어제 당한 무시 때문인지 칼로스에게 접근할 생각은 않고 저를 둘러싼 이들을 상대하기 바빴다.
평소 시끄럽게 굴던 이가 얌전히 있으면 ‘아, 오늘은 별일 없이 지나갈 수 있겠구나’ 하고 안도하게 될 법도 하건만. 어째 더 불안해지는 것 같다고 느끼며 아네타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자 때마침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회장을 울렸다.
“제국의 자비로운 태양,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러셀은 모두가 몸을 낮추는 가운데 당당한 위용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막힘없는 걸음걸이로 붉은 카펫 위를 걷던 그는 곧장 단상에 오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무료함을 감출 생각이 없는 아네타 앞에 멈추어 섰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지루해 보이는 얼굴이군, 아데나워 후작.”
“오해십니다, 폐하.”
아네타가 여상한 투로 부정했지만, 러셀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마 연회를 즐길 수 있는 건 잠시뿐일 거다.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두도록.”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곧 알게 될 거다.”
러셀이 말을 아끼자 아네타의 시선은 곧장 칼로스에게로 날아들었다. 아네타는 답을 요구하듯 칼로스를 보았지만, 그는 자신 역시 아는 바가 없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러셀은 때때로 칼로스에게조차 일말의 언질 없이 판을 벌이곤 했다.
아네타는 아침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이유 모를 불안감이 이 때문임을 확신했다. 때문에 다시 한번 물음을 건네고 싶었으나, 할 말을 마친 러셀은 더는 볼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당연하다는 듯 따르는 건 칼로스였다. 러셀은 제 꼬리처럼 따라붙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칼로스. 아데나워 후작 곁에 남고 싶으면 그리해도 된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또 한 번 무언가를 암시하듯 은근한 투로 하는 말에 칼로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칼로스 역시 마음 같아선 연회 내내 아네타의 곁에 붙어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풋내기처럼 치기 어린 선택을 할 만큼 어리지 않았고, 의무를 저버리고 싶은 충동을 말 그대로 충동으로만 남겨 둘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네 마음 가는 대로 하도록.”
괜찮다고 말하는 이에게 무엇을 더 권할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러셀은 단상 끝에 자리한 황좌에 앉았다.
정체불명의 굉음이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