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사냥 (4)
얼마 지나지 않아 참가자를 불러 모으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일의 손수건을 손에 쥔 테르사는 정해진 수순처럼 그의 입술을 훔친 뒤 부리나케 달려갔다.
라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는 테르사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입가엔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당신은 안 가?”
아네타는 로펠락 부부를 보며 부럽다는 듯 눈을 빛내는 칼로스에게 물었다. 벌써 저만치 달려 나간 테르사와 달리, 칼로스의 발길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아네타는 칼로스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자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혹여 테르사와 같은 행동을 할까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의 입맞춤이 내려앉은 곳은 입술이 아니었다.
칼로스는 홍수와 같이 밀려드는 시선 속에서 기꺼이 허리 숙여 아네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순간 정적이 사위를 휘감았다.
기사가 충성을 맹세한 레이디에게 그러하듯 박동하는 핏줄 위로 뜨거운 낙인이 찍혔다. 가릴 수 없는 진중함이 공기 중에 녹아든 가운데 그의 눈매가 아찔하게 휘었다.
“다녀올게, 아네타.”
어디선가 숨을 급하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네타는 누군지 모를 이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실로 대단한 위력을 지닌 얼굴이었다.
“지켜봐 줘.”
칼로스는 그대로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자연히 저를 따르는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참가자 무리에 합류해서도 그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아네타에게 보였던 달큰한 눈빛은 이미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러셀의 등장과 동시에 주변을 경계하는 눈동자는 냉기를 머금은 금속처럼 차게 빛났다.
호위와 함께 나타난 러셀은 곧장 단상에 올랐다. 의례적인 축사는 행사가 무사히 끝나길 기원하는 말로 끝을 맺었다.
참가자들은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하늘을 가르자 함성과 함께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네타!”
아직 칼로스가 떠나간 자리에 머물고 있던 아네타는 소리 높여 알은척해 오는 누군가에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응시하자, 크리스와 함께 앉아 있는 버논이 보였다.
“이리 와서 앉아!”
버논은 미리 맡아 둔 자리에 그녀를 불렀다. 도움을 받은 이후 부쩍 그녀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한 그였다.
“라일. 괜찮으면 같이 갈래요?”
“아뇨. 저는 따로 어울리는 무리가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가 보세요.”
“알겠어요. 그럼 먼저 실례할게요.”
인사를 건넨 아네타는 권유를 거절한 라일을 남겨 둔 채 발길을 옮겼다.
버논이 맡아 둔 자리는 단상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크리스는 아네타가 가까이 다가가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네타 님! 언제 오시나 했어요.”
환한 미소를 만면에 드리운 그녀는 밝은 음성으로 아네타를 맞이했다. 듣는 이까지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목소리였다.
“오래 기다렸어?”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드레스 입은 모습을 아네타 님께 가장 먼저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장난스러운 투정은 그녀를 더없이 사랑스럽게 보이게 했다. 아네타는 그 모습이 기꺼워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저 오늘 어때요?”
감사 인사는 그날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차고 넘치게 들었다. 덕분에 오늘은 고맙다는 말 대신 수줍은 질문을 듣게 되었다.
아네타의 대답이야 뻔했다.
“평소에도 예뻤지만, 오늘은 배로 예쁜 것 같네.”
느낀 바를 표현하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은 비단 아네타만의 생각은 아닐 터였다.
크리스를 힐끔힐끔 훔쳐보는 영식들과 그런 그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는 버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네타와 크리스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은 연인의 대화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었다. 그렇기에 자연히 잊혀진 버논은 아네타를 부른 자신의 행동이 조금 후회가 되었다.
곁에서 재잘재잘 말을 이어 나가던 크리스는 이제 모든 감각을 아네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이 동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작은 질투심이 비죽 솟아났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쏘아진 화살이다. 이리 오라며 불러놓고 다시 가라며 등 떠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 쓸데없이 단내 풍기는 대화에 끼어들 수 있을까. 열심히 궁리하던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아네타였다.
“그런데 조금 의외네. 버논 너라면 이번에도 사냥 대회에 참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버논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야 뻔했다. 보나마나 크리스에게 접근하는 이들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네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부러 물었다.
그러자 그토록 원하던 크리스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아네타는 순간 밝아지는 버논의 얼굴을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기뻐하던 버논은 순간 가슴이 선득해지는 걸 느꼈다. 몸을 지킬 수단 하나 없이 시커먼 꿍꿍이를 숨긴 악당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너, 진짜 어디 가서 그렇게 웃지 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지.”
버논이 질색하며 하는 말에도 아네타는 개의치 않았다.
“나가 봤자 허탕 아니면 토끼 한 마리가 고작일 텐데 뭐 하러. 차라리 여기서 마음 편하게 관전이나 하는 게 낫지.”
몸 쓰는 일과는 영 연이 없는 버논은 지난 성적을 떠올렸다. 총 여섯 번 중에서 네 번은 빈손으로 돌아왔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포기한 것처럼 보일 만도 하건만, 눈치 빠른 아네타는 녹록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없어?”
“당연하지.”
“그렇구나.”
뻔뻔하게 응수하던 버논은 아네타가 물러나자 안도의 숨을 삼켰다. 그녀가 진짜 이유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쉽게 입 밖에 내지 않으리란 건 알았다.
버논이 남모를 믿음을 품는 사이, 아네타는 크리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실망감이 스쳤던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빛을 찾았다.
“그러는 넌 아까 굉장하던데. 누가 보면 전쟁터라도 나가는 줄 알겠더라. 잠깐 헤어지는 것뿐인데 그리도 절절한 애정 행각이라니.”
버논은 아네타의 손목에 감긴 손수건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검은 손수건은 주인을 대신하여 그녀를 지키듯 선명한 존재감을 보였다.
“애정 행각까지는 아니지 않나.”
“아니긴. 이런 무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너도 나랑 별다를 것 없어.”
아네타는 손수건이 매듭지어진 부분을 만지작거리다 연이어 들려오는 나팔 소리에 반응했다.
사냥에 성공했음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온 이는 칼로스와 테르사였다.
나란히 멧돼지를 잡아 온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승부욕을 불태웠다. 두 사람의 경쟁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로 두 마리, 세 마리, 그리고 네 마리까지 접어들어 어느덧 마지막 한 마리만을 남겨 두고 있을 때였다.
칼로스의 점수가 근소한 차로 앞서고 있는 가운데, 테르사가 제안을 하나 해 왔다.
“마지막 한 마리는 영광의 능력을 이용해 잡아보는 게 어떨까요?”
테르사는 조급한 기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을 드러내며 내리쬐는 햇살 아래서 당당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발티모어 공작, 그대의 생각은 어떻지?”
두 사람의 불꽃 튀기는 경쟁에 중도 포기자가 속출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따라잡기란 무리였기에 러셀은 칼로스의 의중을 물었다.
“저도 좋습니다.”
칼로스마저 동의하자 러셀은 테르사의 제안을 허가했다. 창공과 관통 모두 공격 능력을 지니고 있는 영광이었기에, 좌중 사이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것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가 피어났다.
테르사는 어깨에 메고 있던 관통의 영광을 손에 쥐었다. 그에 맞추어 칼로스 역시 독수리로 모습을 바꾸었다.
날개를 펼친 검은 독수리가 공기를 밀어내며 날아오르자, 테르사 역시 말을 잡아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회는 오로지 둘 만의 무대로 변모했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처음부터 이리될 줄 알았다는 양 반응했다.
“아까 전쟁터 나가는 것 같다던 말이 현실이 됐네. 저 두 사람이 진심으로 맞붙기 시작하면 기가 질린다니까. 하여간 체력들도 대단해.”
“두 분 다 너무 멋있어요.”
버논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에 반해, 크리스는 순수한 감탄을 이어 나갔다.
아네타는 상반되는 둘의 반응을 보며 비어 버린 찻잔을 채웠다.
테르사가 영광의 사용을 제안하고, 그것이 수용되는 상황은 원작에 없던 일이다.
아네타는 이와 같은 변화를 마주할 때마다 이 세계가 더는 자신이 알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깊게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아네타는 앞으로의 일은 물론, 사냥 대회의 승자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검은 형태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수분이 흐른 뒤였다. 아네타는 그것이 칼로스의 귀환임을 알아보았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틀어쥔 것은 곰의 목이었다. 그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거대한 몸뚱이가 위태로이 흔들렸다.
칼로스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에 앞서 곰의 사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뿌연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착지와 함께 능력을 풀어낸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영광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나, 곰 한 마리를 통째로 들고 나르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핏줄이 툭 불거진 팔은 붉은 핏물에 젖어 엉망이었다. 칼로스가 방울져 떨어지는 그것을 대충 털어 내자, 아네타는 지나가던 시종을 붙잡았다.
“미안하지만 온수와 수건을 좀 가져다주겠어?”
“네. 준비되는 대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각하.”
시종이 인사와 함께 물러가자, 버논은 아네타를 보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방금 그녀가 한 부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수 없었다.
“그 표정은 뭐야?”
“칼로스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싶어서. 영 헛고생만 한 건 아니었나 보네.”
“헛소리.”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칼로스가 알면 분명 좋아할 테니까.”
아네타는 놀리는 기색이 다분한 말을 무시하며 칼로스의 사냥감에 점수가 매겨지는 과정을 눈에 담았다. 놀라 휘둥그레 뜨여진 눈들을 보니 퍽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이대로 가다간 발티모어 공작께서 우승하시겠는데?”
“큰 이변이 없는 이상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겠어.”
다른 이들의 생각 역시 아네타와 다를 바 없는지, 이미 과반수가 칼로스의 우승을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영 소식이 없던 테르사가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세상에, 다들 저길 좀 봐요!”
테르사가 등장함과 동시에 전에 없던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놀란 것은 내심 칼로스의 승리를 바라고 있던 아네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한 시간 10분을 남긴 채 돌아온 테르사는 거대한 호랑이를 들쳐 메고 있었다. 정확히 목을 노린 십여 개의 화살을 보며 아네타는 입 밖으로 탄성을 내었다. 여전히 감탄이 절로 나오는 실력이었다.
테르사가 사냥감을 내보이자 판도는 뒤집혔다. 목을 제외하면 어디에도 상처입지 않았기에 가죽의 상태는 가히 최상이라 할 수 있었다.
“결과가 나왔군. 이번 대회의 우승자는 테르사 로펠락 후작이다.”
러셀의 선포에 우승자를 위한 박수와 환호성이 하늘에 닿을 듯 울려 퍼졌다. 그중 가장 기뻐하는 이는 테르사가 이기는 쪽으로 내기를 감행했던 이들이었다.
아네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칼로스를 보았다. 원작의 우승자였던 그는 패배했다. 역시나 상황이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은 것이다.
“축하한다, 로펠락 후작. ……아, 손이 이래서 악수는 무리겠군.”
칼로스는 겸허히 패배를 받아들였고 테르사에게 사감 없는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악수를 위해 내민 손은 말라붙은 핏자국을 자각하는 즉시 거두려 했으나, 테르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덕분에 즐겁게 임할 수 있었습니다.”
“나야말로. 하지만 다음번엔 절대 지지 않아.”
“글쎄요. 내년의 저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예정이라.”
웃음기 띤 얼굴로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아네타의 위치를 파악해 둔 칼로스가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갑자기 나타난 에레즈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다가오는 칼로스를 지켜보고 있던 아네타는 그의 앞길을 가로막은 에레즈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에레즈가 칼로스의 곁을 맴돌며 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모습이 심히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