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사냥 (3)
아네타는 커프스 버튼을 품 안에 잘 챙겨 넣었다.
그가 선물을 받고 기뻐할 것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발밑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주워 건네도 그녀가 주었다는 사실 하나에 기뻐할 사람이었으니까.
크리스 몫의 액세서리를 고르는 건 세르세가 도맡았다.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것들을 고르는 움직임은 신중하면서도 빨랐다.
계산을 담당하는 직원이 선택된 물건의 가격을 셈하는 사이, 아네타는 한쪽에 마련된 긴 의자에 앉았다. 당연하다는 듯 그 옆을 차지한 세르세는 그녀처럼 시선을 정면에 두고 물었다.
“아까, 가지고 싶은 게 없다고 했지?”
“그랬지.”
“그럼 원하는 건 있어?”
“무슨 차이야?”
“어감의 차이지. ‘갖는다’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것들도 있으니까.”
가령 누군가의 마음이라거나, 사람 간의 관계 같은 거. 세르세는 예시를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아네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은 그와 같았다.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있는 것 같네.”
그녀는 잠시의 침묵 끝에 읊조리듯 목소리를 내었다.
“사실 바라지 않았어. 무언가를 원하는 것만큼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없으니까. 내겐 기대를 품을 여유도, 더는 물러설 곳도 없었거든.”
허물어진 기대를 붙들다 망가질 바에야 처음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게 나았다. 어차피 가지지 못할 거, 욕심을 버리면 될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자꾸, 시선을 사로잡더라.”
칼로스.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새긴 양 깊게 스미는 그 이름을 어찌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네타는 복잡한 얼굴로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역시 사람 마음이라는 게 생각대로 움직이진 않는 건가 봐.”
“동감이야.”
세르세의 가볍지 않은 동의가 이어지기 무섭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치수를 재고 나온 크리스는 어쩐지 조금 지쳐 보이는 낯이었다.
“끝났나 보네.”
아네타는 몸을 일으켰다. 나누던 대화는 애매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만 돌아가자, 크리스.”
어디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가 식사라도 한 끼 할까 했는데, 상태를 보니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계산서에 서명을 마친 아네타는 세르세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배웅은 안 나갈게.”
“그러던지. 참, 사냥 대회 때는 어떻게 할 거야? 이번에도 이틀 연속 불참인가?”
“그러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연회 참석만 할 거야.”
“그럼 그때 봐. 갈게.”
짧은 인사를 남긴 아네타는 곁으로 다가온 크리스와 함께 몸을 돌렸다. 배웅하지 않겠다는 말대로 세르세는 같은 자리에 서서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삼켜 낸 탄식이 가슴에 무게를 더했다.
***
건장한 사내 둘이 의상실 쇼윈도 끝에 붙어 있는 모습은 퍽 장관이었다. 몰래 안을 들여다보던 그들은 각자 다른 이를 향한 질투에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겼다.
몰래 따라나선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런 광경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르세와 눈이 마주치기까지 한 칼로스는 보란 듯이 이어지는 행태에 이를 갈았다. 질투의 대상이 둘이나 되는데 그중 가장 못마땅한 이가 도발을 해 온 것이다.
당장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고 싶었지만, 남아 있는 이성이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는 것뿐이었다.
“아네타.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치다니.”
곁에 있던 버논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는 아네타를 향한 질투에 손수건을 물어뜯었다.
선물을 건네는 족족 거절만 당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버논의 머리를 스쳤다. 그에 비해 아네타는 이번에도 그가 바라던 일들을 쉽게 이루어 냈다.
아껴 주는 건 고맙지만, 제발 자신이 나설 기회 좀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칼로스와 버논이 같지만 결이 다른 감정에 허우적대는 사이, 먼저 문을 열고 나온 이는 아네타였다.
어제보다 오늘 더 아름다운 그녀를 보며, 칼로스는 재빨리 쇼윈도에서 떨어져 나왔다. 반 박자 느리게 반응한 버논이 치사하다며 투덜대는 소리는 지나가던 마차 소리에 묻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라니?”
먼저 두 사람을 발견한 이는 크리스였다. 그녀가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잡아 주고 있던 아네타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호칭에 설마 했는데. 크리스의 시선을 따라가니 호칭만큼이나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두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우리 둘이 따로 만나라며. 네 말대로 했다가 우연히 마주친 거지. 우연히.”
기다렸다는 듯 줄줄 내뱉는 것을 보니 영 믿음이 가질 않았다. 아네타는 우연을 강조하는 버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칼로스. 방금 버논이 한 말, 사실이야?”
“아니.”
말없이 서 있던 칼로스에게 묻자 진실은 빠르게 밝혀졌다. 그가 긍정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버논은 날벼락을 맞은 심정이었다.
“이봐, 칼로스. 그걸 사실대로 말하면 어떡해?”
“아네타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거짓말을 한 나는 뭐가 돼!”
아네타의 뾰족한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버논은 배신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칼로스를 타박했다.
“뭐가 되긴. 당연히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지.”
아네타가 지극히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자, 곧이어 칼로스가 장난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어쩐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사람을 함정에 빠트리더라니.”
에레즈를 속인 일을 언급하는 게 분명했다.
버논은 어쩐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아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장소가 장소인 데다, 크리스가 보는 앞이라 제대로 따질 수 없어 억울함이 배가 되었다.
말 그대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크리스. 설마 저 둘이 하는 말을 믿는 건 아니지?”
졸지에 거짓말쟁이로 내몰린 버논은 조용히 웃고 있던 크리스를 붙잡고 해명을 시작했다.
설움을 토로하는 버논을 다독이는 건 오로지 크리스의 몫이었다. 그사이 아네타는 칼로스에게로 다가갔다. 손에는 따로 챙겨 두었던 물건을 꺼내어 쥔 채였다.
“칼로스. 잠깐 손 좀 이리 내밀어 볼래?”
칼로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네타의 요구에 착실히 응했다. 별거 아닌 말에도 가슴이 쿵쿵 울렸다.
내밀어진 손바닥엔 굳은살이 가득했다. 아네타의 시선은 손끝을 스쳐 단단한 손목에 다다랐다. 그의 것과는 달리 말랑한 손끝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한 손으로 다 감아쥘 수 없는 손목을 붙든 아네타는 느긋하게 그의 커프스 버튼을 풀어냈다. 딱히 누구의 취향도 아니었던 그것은 고스란히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아네타?”
아네타는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기존의 것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것을 채워 넣을 뿐이었다.
“역시 잘 어울리네. 생각했던 것 이상이야.”
발견하는 순간 그의 얼굴이 떠올랐으니 어울리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아네타는 생각보다 일찍 주인을 만난 커프스 버튼을 응시하며 만족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이건……?”
“선물이야.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내가 당신에게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서. 부디 마음에 들었길 바라.”
아네타는 짝을 이루는 나머지 하나를 그의 손에 쥐여 준 뒤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감격에 젖은 칼로스에게 아네타를 붙잡을 정신은 없었다.
아네타가 손 안에 든 물건의 존재를 깨달은 건 마차에 올라 크리스를 기다리던 때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들고 와 버린 그의 커프스 버튼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끼는 것도 아니니 가지고 있어도 상관없겠지.”
손끝으로 매끄러운 표면을 더듬는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
사냥 대회 당일.
개최 장소로 선정된 벨보트 산 입구에선 영식과 영애들이 마음에 둔 참가자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전해진 마음에 기뻐 웃고, 다른 누군가는 거절당해 눈물을 머금는 가운데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등장했다.
5년째 우승자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는 테르사와 칼로스였다.
그들의 등장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소수의 참석자들은 서로의 유일한 호적수인 두 사람을 두고 내기를 벌이기도 했다.
이번엔 과연 누가 이길까. 분위기가 점차 달아오르는 가운데, 아네타의 곁으로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아네타.”
“라일.”
테르사의 남편이자 로펠락 가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는 그는 아네타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상대였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름을 입에 담은 두 사람은 반가운 얼굴로 마주 섰다.
“그간 어떻게 지냈어요?”
“저야 늘 같죠. 아네타의 소식은 아내를 통해 들었어요. 바우터 남작의 환영식에도 참석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테르사가 폐를 끼치진 않았나요?”
“폐라니요. 오히려 도움을 받아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 걸요.”
인사불성이 된 칼로스를 옮겨 주었던 일을 언급하자, 라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어디서 실수하고 다닐 사람은 아니지만, 그날따라 술을 진탕 마시고 들어와서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그건 아마 폐하께서 브렌델 지방의 술을 내어 주셨기 때문일 거예요.”
좋아하는 술이 있어서 평소보다 무리한 거라는 말로 라일의 불안을 해소해 준 아네타는 시선을 돌렸다.
칼로스와 테르사는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배우자가 있건 없건 앞다투어 손수건을 건네는 인파를 본 라일이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저런 모습은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아요. 볼 때마다 질투가 난달까.”
“그만큼 당신이 테르사를 사랑한다는 뜻이겠죠.”
테르사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수건을 모두 거절했다. 그 모습을 라일이 당연하다는 듯 지켜보는 가운데, 아네타는 칼로스의 상황을 살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것도 그때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던 칼로스는 아네타가 제게 눈길을 주기 무섭게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테르사가 일일이 상대하며 거절하는 것에 반해, 칼로스는 누구 하나 상대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쉴 새 없이 뻗어지는 손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칼로스의 걸음은 아네타 앞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뒤이어 도착한 이는 그가 뚫어 놓은 길을 그대로 밟은 테르사였다.
“여기 있었네?”
테르사는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라일을 보며 능청스레 말했다.
“그래요. 여기 서서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둘러싸여 하하호호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죠.”
“미안해. 하지만 손수건은 모두 거절하고 왔어.”
“당연하지. 그걸 받아 오기까지 했으면 난 당장 이 자리를 떴을 거예요.”
새초롬한 눈초리가 꽂히자, 테르사는 아네타가 있는 쪽으로 눈을 굴려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아네타는 그녀를 도울 마음이 없었다.
요청을 외면한 건 칼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아네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미리 말해 두지만, 언제나 그랬듯 손수건은 가지고 오지 않았어.”
“그럴 것 같았어.”
칼로스는 의외로 실망을 내비치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듯 대꾸한 그는 오히려 품 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손목에 매어 주었다.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대회가 끝날 때까지 이걸 풀지 않는 거야. 그건 해 줄 수 있지?”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한 기색을 보이던 것도 잠시,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