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38화 (38/122)

38화. 사냥 (2)

폴터 자작의 공개 처형이 진행된 지 사흘이 지났다. 그가 저지른 일들은 빠르게 수습되었고, 어느덧 크리스와 만나기로 한 주말 아침이 밝아 왔다.

아네타는 잠기운이 달아난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떠나가는 어머니와 행복하게 웃고 있는 칼로스. 반복되는 두 가지의 꿈 중에서 오늘 꾼 것은 후자였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어머니가 꿈에 나오는 건 진전 없는 화가 찾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칼로스는?’

자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칼로스가 다른 여인과 웃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생 나만 바라볼 것처럼 굴더니.”

아네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화들짝 놀랐다. 자조 어린 웃음이 떠오른 건 그다음이었다.

그의 마음을 받아 주기는커녕 밀어내기 바빴던 주제에 잘도 그런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것은 단순한 꿈이지 않은가.

아네타는 꿈을 허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워 마른세수를 했다.

똑똑.

“각하, 이사벨입니다.”

아네타를 생각의 늪에서 끌어낸 것은 이사벨의 목소리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아네타는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외출 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사벨의 뒤를 따라 들어온 시녀들은 서둘러 단장 준비를 시작했다. 아네타는 그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이사벨에게 물었다.

“에티엔 예약은 어떻게 됐어?”

“말씀하신 시간대에 해 두었습니다.”

“수고했어.”

제국 최고의 의상실 에티엔.

왕관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그곳은 세르세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보물이자 전부였다.

세르세가 디자인한 드레스와 장신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때나 의상실 문을 열지 않았고, 수량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아네타는 그곳으로 크리스를 데려가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것들을 잔뜩 사 안길 작정이었다.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크리스는 집 앞에 도착한 아데나워가의 마차에 올랐다. 목적지에 대해 물은 것은 의상실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에티엔으로 가고 있어.”

아네타는 순순히 목적지를 말해 주었다. 어차피 마차에서 내리면 알게 될 테니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 그럼 혹시 저를 데리고 나오신 이유가 사냥 대회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서인가요?”

“맞아.”

나 말고 네가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 거지만. 뒷말을 삼킨 아네타는 태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사냥 대회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지?”

“네. 듣기로는 점수를 매긴다고 하던데,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요?”

얼마 남지 않은 사냥 대회에 대해 묻는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아네타는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에 웃음을 머금었다.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참가자가 우승을 거머쥐는 식이야. 사냥한 짐승의 크기가 클수록 점수는 높아지지. 잡을 수 있는 수는 한 사람당 다섯 마리로 한정되어 있어.”

오직 우승자만이 황제가 내리는 후한 포상을 받을 수 있다.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가 둘이나 있지만, 아네타는 관전의 재미를 위해서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대회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연회가 열려. 전날 잡은 짐승들은 여기에 쓰이지. 아마 다른 때보다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을 거야.”

“어쩜 좋죠? 벌써부터 기대돼요.”

이어진 설명에 크리스는 두 눈을 반짝였다. 아네타의 입장에선 지루하기 짝이 없는 행사였지만, 저리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참석해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에티엔은 건물 외관부터 화려했다. 정말 저 안으로 발을 들여도 되는 걸까. 크리스가 망설임 가득한 얼굴로 주춤대자, 지켜보던 아네타가 뒤로 다가섰다.

어깨 너머로 뻗어진 손은 그대로 문을 밀어냈다.

딸랑. 맑게 울린 도어벨 소리가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뭐 해? 어서 들어가지 않고.”

아네타는 부드럽게 크리스의 등을 밀었다. 괜찮다는 듯 토닥여 주니 크리스는 금세 긴장의 끈을 놓았다.

“어서 와.”

“네가 직접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을 맞이한 이는 세르세였다. 아네타는 직원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그를 보며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당연히 와 봐야지. 무려 아데나워 후작 각하께서 친히 납신다는데.”

장난스럽게 대꾸한 세르세의 시선은 곧 크리스에게로 닿았다. 단시간 내에 아네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소문의 주인공을 마주하니 흥미가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의상실까지 왔나 했더니. 이유를 알 것도 같네.”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 이유가 맞을 거야. 모쪼록 최선을 다해 협력해 주길 바라.”

“맡겨 줘.”

세르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직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직원들이 드레스가 걸린 행거를 끌고 다가왔다.

놀란 토끼 눈을 한 크리스의 몸에 색색의 드레스가 대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아네타와 세르세는 그 앞에 나란히 서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었다.

의견은 대부분 일치했다. 덕분에 두 사람의 선택을 받은 드레스가 한쪽에 수북이 쌓였다.

‘저 정도면 되겠지.’

아네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금 고른 거 전부 살게. 팔 거지?”

“원한다면. 대금은 후작가로 청구하면 돼?”

“응.”

제대로 확인도 않고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같은 말을 하는 건 세르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아네타는 깔끔히 골라낸 것만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가격이었기에, 놀라 넋을 놓고 있던 크리스는 서둘러 두 손을 휘저었다.

“잠깐, 잠깐만요. 이곳에 온 건 아네타 님의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서였잖아요.”

“아니. 우린 네가 입을 드레스를 사러 온 거야.”

“하지만 분명 마차에서…….”

“정확히 누구의 것을 산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널 속인 건 아니지.”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세르세는 어딘가의 사기꾼 같은 말에 웃음을 참았다. 크리스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하니 아네타가 몹쓸 짓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건 너무 많아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솔직히 부담스러워요.”

“그러지 말고 받아 줘, 데번 남작. 아네타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니까.”

포기하라는 식으로 말을 건넨 이는 아네타가 아닌 세르세였다. 분위기를 보아 직원들을 물린 그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었다.

“스트레스 해소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선물을 사다 안긴 뒤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거지. 나도 몇 번 겪은 일이야.”

“그런 거라면 차라리 아네타 님께서 갖고 싶은 물건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대리만족보다는 그편이 나을 것 같아 의견을 냈지만, 아네타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런 거.”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진작 다 가졌겠지. 저 집안은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크리스는 짜하게 퍼진 소문대로라면 그러고도 남겠다며 세르세의 말에 납득했다.

“그렇다 해도 저는 지금껏 아네타 님께 많은 폐를 끼쳤어요. 그런 주제에 선물까지 받을 순 없죠.”

“폐라니? 무슨 폐?”

크리스가 한숨을 푹 쉬며 꺼낸 말에 아네타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제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써 주시고 채무까지 인수해 주셨잖아요.”

“누가 들으면 내가 없던 자리까지 만들어서 널 고용한 줄 알겠어.”

사실 정말 그런 것이었지만, 아네타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단지 일 시킬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고, 마침 네가 나타난 거야. 게다가 채무는 다달이 변제하고 있잖아?”

거짓말을 줄줄이 늘어놓으면서도 아네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뻔뻔함이 세르세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지만, 크리스의 경우는 달랐다.

“난 네가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받아 둬. 거절당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다음 달부터 이자를 요구할지도 모르거든.”

장난스러운 음성에 크리스의 몸이 움찔 떨렸다. 계약서가 존재하기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이자라는 말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방금 그 말은 농담. 하지만 마음이 아플 거라는 말은 진짜야.”

아네타는 크리스가 거의 넘어왔음을 눈치챘다.

채근하지 않고 답을 기다리자, 잠시 망설이던 크리스의 입에서 바라던 대답이 나왔다.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고마워.”

아네타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한데 뒤섞인 결정에 미소를 보였다. 그에 크리스는 가슴 한편이 따스한 빛으로 물드는 것을 느꼈다.

부담스럽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실은 기뻤다. 자신을 아껴 주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져서.

크리스는 결국, 드레스보다 아네타의 마음을 받은 걸로 하기로 했다. 아마 드레스를 입을 때마다 그녀가 떠오르지 않을까.

나날이 쌓여만 가는 은혜에 보답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받은 도움을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크리스는 목표를 가슴에 더욱 단단히 새겼다.

“자, 이제 남은 건 치수 재는 일뿐이야. 저쪽으로 가면 돼.”

“알겠어요.”

크리스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세르세가 일러준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번 열리고 닫힌 문 뒤로 직원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까 말한 거, 다 거짓말이지?”

“이런. 확실한 입막음을 위해서라도 돈을 더 쓰고 가야겠는데.”

둘만 남기 무섭게 들려오는 말에 아네타는 여상히 반응했다. 그가 함부로 입을 열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걱정은 없었다.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구두랑 액세서리도 보여 줘.”

“이쪽으로 와.”

세르세는 굳이 아네타를 말리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핑계일 뿐이란 걸 알기에 그녀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 줄 뿐이었다.

“데번 남작, 괜찮은 사람 같더라. 네가 왜 곁에 두려고 하는지 알겠어.”

지금껏 아네타의 곁을 차치하려 들던 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세르세는 아네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녀가 조금은 부러워졌다.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네타는 눈에 든 구두로 손을 뻗다 말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관심이라도 생겼어?”

“조금.”

“……미리 말해 두지만 그 아이,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게다가 한쪽의 일방적인 감정도 아니다. 아네타는 그것까진 언급하지 않았다.

“걱정 마. 이성적으로 관심 있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래? 다행이네.”

그런 거라면 상처받지 않겠다 싶어 아네타는 다시 눈을 돌렸다. 구두를 서너 켤레 고른 그녀는 장신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게 끝이야?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그 뒤를 따르며 세르세는 은근한 투로 물었다. 더는 관심을 갖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섭섭하기까지 했다.

“딱히. 넌 그 예쁜 얼굴이 무기라 알아서 잘 할 것 같아.”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앞으로 더 열심히 가꿔야 할 것 같은데. 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세르세는 의미 모를 웃음을 짓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쇼윈도 너머로 익숙한 인영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세르세는 스치듯 눈을 돌렸다. 아직 저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아네타는 무언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보란 듯이 웃으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자, 그녀는 고민하던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거.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 생각나서.”

블루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의 커프스 버튼. 소중한 작품들 중에서도 꽤나 정성을 들여 디자인했던 것을 바라보는 세르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살 거야?”

“어. 이건 바로 가져갈게.”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라는 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팔고 싶지 않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세르세는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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