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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37화 (37/122)

37화. 사냥 (1)

업무에 복귀한 아네타를 반기는 것은 짜하게 퍼진 소문과 폴터 자작이 황궁으로 압송되어 처형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칼로스와 관련된 소문이 퍼진 이유야 뻔했다. 아네타는 소문의 근원지가 황제임을 눈치채고 그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분명 에레즈에게 보여 주기 식으로 벌인 일일 테니까.

중요한 것은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아네타는 복귀와 동시에 입을 여는 칼로스에게서 모든 정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실행한 일은 바우터 남작을 시험하는 일이었어.”

“시험이라니?”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레녹스 열쇠를 쥐여 준 뒤 그림자를 붙였지. 바우터 남작은 열쇠를 받아 들기 무섭게 우리 집무실로 들어갔다더군.”

위조된 서류를 확인한 에레즈는 미래를 보았다는 주장과 함께 폴터 자작의 이름을 거론했다.

폴터 자작의 상황은 꿈에도 모르는 채, 한시바삐 해결해야 할 일인 양 떠드는 그에게 러셀은 물었다.

그것이 정녕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맞느냐고.

러셀의 속내를 모르는 에레즈는 그 말을 현실 부정으로 받아들였고,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답했다.

스스럼없는 긍정에 러셀은 에레즈의 능력이 거짓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를 내색하는 대신, 당장 폴터 자작을 압송하라며 노성을 내었다고 한다.

“폐하께선 지금도 바우터 남작의 능력을 믿는 척 연기를 하고 계셔. 우리가 앞서 행한 일들을 밝히지 않았으니 바우터 남작은 본인 덕분에 사건이 해결된 거라고 착각하고 있겠지.”

바우터가가 영광의 가문으로 이름을 올린 이상 증거 없이 처벌을 하기란 불가능했다.

러셀이 연기를 통해 에레즈 바우터의 진짜 능력을 확인하려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섣불리 나섰다간 러셀은 물론 이 일과 관련된 모두가 새로운 영광을 견제하고 매장하려 했다는 불명예를 입을 수 있었다.

영광이란 이름이 어떤 무게를 가졌는지 모를 수가 없는 아네타는 러셀의 선택에 신뢰를 보였다.

“판결은 어떻게 됐어?”

“폴터 자작가의 재산을 몰수하고 작위를 박탈하라는 명이 내려졌어. 자작 본인은 이틀 뒤에 공개 처형될 예정이고.”

아네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그리 놀랍진 않았다.

“너무 늦게 알려서 미안해.”

“……괜찮아. 날 위한 일이었다며.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덕분에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었으니까.”

원망을 들을 각오를 했던 칼로스는 예상과 다른 말이 들려 오자 놀란 눈으로 아네타를 응시했다.

“……왜 그렇게 봐?”

아네타는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시선을 피하며 시치미를 떼 보았지만, 그러한 기색을 눈치챈 칼로스의 입가엔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야,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낯간지러운 말은 넣어 둬.”

아네타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전해 들었으니 남은 건 폴터 자작의 몰골을 눈에 담는 것뿐이었다.

“폴터 자작은 지하 감옥에 있지? 들어갈 수 있게 해 줘.”

“만나 보려고?”

“그래야지. 처참히 추락한 모습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

인간 같지도 않은 자를 몸소 만나러 간다는 말에 칼로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네타가 쉬이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조건을 걸었다.

“좋아. 그 대신 나도 동행하게 해 줘.”

“마음대로 해.”

아네타는 칼로스의 조건에 토를 달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최악의 범죄자를 가두는 곳인 만큼 경비는 삼엄했다. 아네타는 칼로스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며 빈 감옥을 훑었다.

현재 지하 감옥에 투옥된 이는 폴터 자작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들어온 이들은 하나같이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목이 잘렸으니까.

아네타가 사형이라는 말을 듣고 폴터 자작의 위치를 확신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덕분이었다.

소름끼치는 냉기와 음울한 기운. 화려한 지상의 궁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곳이었다. 마치 죽음과 생을 가르듯 극명한 대비였다.

아네타는 얼마 안 가 비극의 주범과 마주할 수 있었다. 철창에 갇혀 버러지처럼 바닥에 나뒹굴던 폴터 자작의 몰골은 처참했다.

성치 않은 몸뚱이는 끔찍한 고통에 절여져 있었다. 값비싼 옷감과 보석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건 온갖 고문의 흔적뿐이었다.

여실히 드러난 징그러운 형태에 아네타는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폐하께서 곱게 목을 벨 리 없지.”

일말의 동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새어 나오자, 바닥에 뺨을 대고 간신히 숨을 쉬고 있던 폴터 자작이 눈을 떴다. 핏줄 터진 눈알이 형형한 안광을 발했다.

칼로스는 살기로 번뜩이는 시선을 차단하듯 아네타의 앞을 막아섰다.

감히 네까짓 놈이 눈에 담을 사람이 아니다. 그리 말하듯 조소를 흘리자, 혀가 잘린 입 안에서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폴터 자작은 쇠퇴하여 이울어지는 저만의 낙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끊임없이 현실을 부정했다. 그 끝에 형체를 드러낸 것은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을 향한 분노였다.

자작에게 있어 그들은 저를 낙원 밖으로 내친 사악한 악마이자 뱀이었다. 세 치 혀를 놀려 많은 이들의 인생을 망친 악마는 본인임에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후회가 아닌 분노와 살심으로 넘실대는 눈동자는 그가 뼛속까지 글러 먹은 작자라는 걸 증명했다.

아네타는 그런 그가 끔찍했다.

“저렇게 노려보는 걸 보니, 자작은 아직 자신을 잡아 가둔 게 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네.”

그런 자에게 죽음이란 관대한 처사가 아닐까. 아네타의 말에 칼로스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폴터 자작 공개 처형 당일.

예리하게 벼려진 단두대의 칼날만큼이나 서슬 퍼런 비난이 죄인을 향해 쇄도했다.

쏟아지는 것은 그의 저승길마저 편치 않길 바라는 저주뿐만이 아니었다.

낱낱이 밝혀진 폴터 자작의 죄에 분노한 국민들은 돌을 던졌다.

돌에 맞은 폴터 자작의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살갗이 터져 흩뿌려진 핏방울이 무수히 많은 피로 적셔졌던 처형대를 또 한 번 물들였다.

“폐하, 어찌할까요?”

이러다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죄인의 숨이 끊길지도 모른다. 곁에 서 있던 클로린 공작이 의중을 묻자, 러셀은 단호히 일갈했다.

“지금 민중이 보이는 분노는 정당하다. 그러니 누구도 저들을 제지하지 마라.”

타인의 인권을 유린한 죄인에게는 그 어떤 자비도 베풀어선 안 된다. 지극히 그다운 결론이 내려지자, 아네타를 비롯한 귀족들은 말없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처형대로 끌고 나와 무릎 꿇릴 때부터 성한 곳 하나 없던 그는 결국 날아오는 돌에 맞아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이제 예정대로 형을 집행하도록.”

러셀은 죄인이 국민들의 손에 단죄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명에 따라 시신을 단두대로 옮기는 이들을 바라보던 아네타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움찔움찔 떨면서도 폴터 자작의 모습을 똑똑히 눈에 담던 크리스는 차마 목을 자르는 장면까지 보지는 못하겠는지 잔뜩 겁을 먹은 눈치였다.

“굳이 너까지 볼 필요는 없어.”

아네타는 손을 뻗어 크리스의 눈을 가려 주었다. 예고 없이 행해진 행동에 놀란 크리스를 안심시키는 사이, 집행인은 단두대에 달린 밧줄을 당기고 있었다.

아네타는 목구멍을 비집고 나올 뻔한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토해 내지 못한 그것의 무게에 장기가 짓눌린 것처럼 속이 불편했다.

‘이제 저것만 놓으면, 모든 게 끝나.’

아네타는 마지막 과정까지 놓치지 않고 눈에 담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짐은 어느 순간 눈가에 드리워진 어둠에 의해 허물어졌다.

시야가 차단되자 자연스레 다른 감각이 예민하게 벼려졌다.

아네타는 입을 열었다.

“칼로스. 손 치워.”

뒤에서 끌어안듯 눈을 가린 이가 누구인지 모를 수 없었다. 감싸 오는 온기와 체향, 목덜미에 닿는 숨결마저 익숙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이 데번 남작에게 했던 말, 그대로 돌려줄게. 굳이 당신까지 볼 필요 없는 광경이야.”

볼 필요가 없다. 과연 그럴까. 아네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봐야 했다. 변화의 행적을 쫓기 위하여. 쫓고 또 쫓다 보면, 그것은 고스란히 그녀를 변화시키고 어느 순간 소중해진 이들을 지켜 낼 힘이 될 터였다.

“봐야 해. 그럴 이유가 있어.”

“그럼 내가 대신 봐 둘게.”

눈을 가린 그의 손목을 잡자, 여느 때보다 단단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내가 당신 대신 기억하고, 잊지 않을게. 그러니까 보지 마.”

칼로스는 그녀가 어째서 험한 광경을 눈에 담으려 하는지 아는 것처럼 말했다. 아네타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홀린 듯 손을 내렸다.

“……그래, 그럼.”

엉망으로 엉켜들던 속이 편안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 틈을 타 크리스가 슬쩍 옆으로 빠져나갔지만, 눈치챈 이는 칼로스뿐이었다.

집행인이 밧줄을 놓은 것도 그때였다.

덜컹. 칼날이 내려오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헛숨 들이키는 소리가 다발적으로 들려왔다.

툭.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아네타는 소리로 상황을 유추했다.

“끝났어?”

“그래.”

긍정하면서도 그의 손은 목이 잘린 시신이 수습될 때까지 거두어지지 않았다. 제법 각별해 보이는 모습에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불거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가…… 저기 있네.”

아네타는 시야가 트이는 순간 잊고 있던 크리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언제 자리를 옮겼는지, 크리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의미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거슬리는 게 있다면 부리나케 크리스의 곁을 차지하고 서 있던 버논의 표정이었다.

“쟤, 왜 저런 얼굴로 이쪽을 보는 거야?”

다 자란 자식을 보듯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어 아네타의 표정이 절로 떨떠름해졌다.

“우리가 잘 어울려 보여서 그런 거겠지.”

“…….”

아네타는 능청스레 건넨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칼로스는 그걸로 족했다. 오히려 이전처럼 단칼에 부정하거나 밀어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자그마한 변화에 감사한 그의 가슴에 기쁨이 차올랐다.

“나는 먼저 저택으로 돌아갈게.”

“벌써?”

아네타가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크리스와 함께 다가온 버논이었다.

“다른 일정이라도 있어?”

칼로스에게 힐끗 시선을 준 그는 이유를 물었다.

“일정은 없지만, 요즘 통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부족한 잠이라도 보충하려고.”

반복되는 꿈 이야기는 접어 둔 채, 아네타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삽시간에 얼굴을 굳힌 칼로스에게 걱정 말라는 시선을 보내며 돌아서던 그녀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아, 하고 탄성을 내었다.

“크리스.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크리스는 동그랗게 뜬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함께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괜찮다면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어딘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크리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타라면 어딜 가든 믿고 따를 수 있었으니까.

“어딜 가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도 주말에 시간 많은데.”

“크리스 외에 동행은 사절이야. 너도, 당신도.”

아네타는 말을 꺼낸 버논부터 칼로스까지 차례로 시선을 맞추었다.

함께 가고 싶다는 뜻을 열심히 피력해 보아도 아네타는 한결같이 고개를 저어 보일 뿐이었다.

“정 심심할 것 같으면 둘이서 따로 만나. 됐지?”

“전혀.”

“전혀.”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아네타는 이미 돌아선 뒤였다.

칼로스는 아네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버논에게로 조용히 눈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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