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간호 (4)
크리스가 병문안을 다녀간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휴일이 오길 기다렸다는 듯 저택으로 찾아온 크리스는 온갖 걱정의 말들을 쏟아 내다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아네타는 칼로스가 맡아야 했을 업무들이 또다시 버논에게로 쏟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넘겼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버논이 두 번씩이나 추가 업무를 떠맡겠다고 자처할 리 없으니까.
두 번째로 방문을 알려 온 사람은 세르세였다. 칼로스는 라폴리 자작가에서 서신을 보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것과 동시에 인상을 와락 구겼다.
크리스의 방문 요청을 들었을 때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거절하면 안 돼?”
세르세는 근래에 들어 부쩍 아네타와의 접점을 만들려 했다. 관심을 갖고 다가서기 시작한 것이 빤히 보여, 칼로스는 그에게 경계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당신이 무방비하게 있는 모습,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보는 게 싫어서.”
“아무리 그래도 술 취한 당신보다 더 무방비할까.”
아네타는 입고 있던 잠옷을 내려다보다가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그가 제 손으로 셔츠 앞섶을 뜯어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혼자 두기 불안했지.’
그때의 감상을 되살린 아네타는 헛웃음을 흘렸다. 술에 취한 칼로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방비함 그 자체였다.
“게다가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찾아오겠다는데 거절할 수야 없지.”
아네타는 그가 했던 말을 빌려 세르세를 칭했다. 장난스러움이 은근히 묻어나는 투였다.
“그렇게 절친했던 건 아니지만, 세르세는 내 소꿉친구이기도 하고.”
결론은 세르세의 방문을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칼로스는 둘의 만남을 막고 싶었지만, 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설 수는 없었다. 허울뿐인 관계를 유지하던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무엇보다 이곳은 그가 아닌 아네타의 저택이었다. 그녀의 허락하에 머무르는 객에게는 방문자를 거절하라고 말할 자격이 없었다. 그녀가 주제 넘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으리라.
슬픈 현실과 함께 잘못을 인정한 칼로스는 묘하게 풀죽은 얼굴이 되었다. 아네타가 그런 그에게 입을 연 것은 시녀를 불러 허락의 뜻을 전한 후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세르세가 당신보다 오래 이곳에 머물 일은 없을 테니까.”
무슨 뜻이냐는 시선이 뒤따랐지만, 아네타는 말을 아꼈다.
세르세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네타는 라폴리의 저택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그의 출입을 허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늦게 소식을 접한 것 같네.”
이사벨의 안내를 받아 들어서던 세르세는 잠시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아네타의 곁에 앉은 칼로스에게로 향해 있었다.
마치 제 저택에 머물 듯 간결한 차림새가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칼로스는 제게 닿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적수임을 깨닫는 건 아네타를 원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하나의 본능이었다.
먼저 인사를 건넨 이는 세르세였다. 칼로스는 마지못해 건네는 인사를 마찬가지로 마지못해 받아 주었다.
허공에서 맞닿은 두 개의 시선은 소리 없이 불타올랐다. 그들을 불태우는 연료는 같았다. 하다못해 열망까지도.
“왔어?”
그들의 신경전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은 아네타의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가를 때였다.
아네타는 그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입맞춤 사건 이후 처음 마주하는 자리이니 서로 불편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아네타는 사실과 다른 짐작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를 돕기 위해 칼로스가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르세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챙기는 모습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응접실로 갈까?”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 우리가 극진히 예를 차려야 하는 사이도 아니고.”
세르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하나로 올려 묶은 적발이 그의 고갯짓을 따라 목뒤를 간질였다. 은근히 그녀와의 친분을 강조하는 듯한 뉘앙스는 명백한 고의였다.
“그럼 이쪽으로 앉아.”
아네타는 침실 한쪽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소파는 모두 일인용이었기에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몸은 좀 어때?”
자리에 앉기 무섭게 차를 내온 시녀들이 물러가자,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이는 세르세였다.
“다 나았어.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출근하고 싶은데, 보다시피 감시인이 있어서.”
“그 감시인이라는 게 나야?”
“물론이지. 당신이 아니면 또 누가 있겠어, 칼로스.”
아네타는 설핏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시 칼로스를 향했던 시선은 다시 세르세에게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네가 병문안을 와 준 건 좀 의외네. 신작 디자인에 몰두하느라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급한 일은 다 끝내고 온 거야?”
“작업은 오늘 아침에 완전히 끝냈어. 그래서 간만에 사람답게 식사나 할까 하고 작업실 밖으로 나갔는데, 집사가 네 소식을 전해 주더라고. 그 뒤에 바로 서신을 보낸 거고.”
늘 그랬듯 배를 채운 뒤 쓰러져 자는 대신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아네타는 세르세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감추지 못한 피로가 엿보였다.
“와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아, 이건 병문안 선물.”
세르세가 내민 것은 꽃다발이었다. 품 안을 가득 채우는 그것을 안아 든 아네타는 그의 머리카락처럼 붉은 꽃봉오리가 낯익다고 생각했다.
“이건…….”
“밀라이아. 지난번 내 생일에 네가 보낸 거랑 같은 꽃이야.”
밀라이아. 붉은 꽃잎에 걸맞게 열렬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이었다.
세르세는 아네타가 꽃말까지 고려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꽃 이름을 언급한 건 칼로스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칼로스는 그의 언행을 자신을 향한 도발로 받아들였다. 세르세 라폴리는 진심으로 자신을 견제하고 있었다. 확신에 확신이 더해졌다.
그는 분명 아네타를 이성으로 여기고 있으리라.
또 한 번 서로에게 진득이 시선을 보내던 두 사람 중 먼저 눈을 돌린 이는 칼로스였다.
칼로스는 네게 눈을 두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발 빠르게 아네타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에 질세라, 세르세 역시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적당히 우러난 찻물을 잔에 따르고 서로 경쟁하듯 핑거 푸드를 권하는 칼로스와 세르세를 보며 아네타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딱히 그들을 말리지는 않았다. 손님인 그들이 알아서 척척 해내니 주인 입장에선 이보다 편할 수는 없었다.
“당신, 이거 좋아하잖아.”
“이것도 먹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놨…… 이런.”
종종 눈을 맞추며 서로 견제를 이어 나가던 중, 세르세는 일부러 자신의 옷을 더럽혔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를 저지르자, 바라던 대로 아네타의 반응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괜찮아? 어디 닦을 만한 게…….”
“이걸로 닦도록.”
칼로스는 아네타가 세르세를 위해 움직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자신의 손수건을 희생했다.
품 안에 있던 것을 꺼내어 떠넘기자, 저도 모르게 받아 든 세르세의 표정이 절로 떨떠름해졌다.
“두 사람, 이렇게 보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그런 상황에서 아네타가 뜬금없이 건넨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뭐?”
“농담. 칼로스가 누군가에게 자발적으로 물건을 빌려주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거든. 그래서 한 번 해 본 말이야.”
농담이라는 말에 두 남자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그녀가 하는 말이래도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런 반응 보이면 더 놀리고 싶어지는데.”
“제발 참아 줘, 아네타.”
아무리 서로를 적대시하던 두 사람이라도 이 순간만큼은 한마음 한뜻이었다.
***
휴가의 마지막 날이 밝아 오자, 칼로스는 더욱 지극정성으로 아네타의 곁을 지켰다. 곤히 낮잠을 청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칼로스는 세르세가 가지고 온 꽃다발을 손에 들었다.
첫날 그가 가져온 꽃이 시들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음 같아선 손에 쥐고 있는 가느다란 꽃줄기를 남김없이 꺾어 버리고 싶었지만, 꽃에는 죄가 없었다.
가까스로 자신을 달래 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멀쩡한 꽃봉오리를 잘라 버렸다.
툭 하고 떨어져 버린 것을 슬며시 치운 칼로스는 시간이 지나 시들해진 꽃가지를 쳐 냈다.
화병에 꽂으니 제법 그럴싸한 모양새가 나왔다. 능숙하게 일을 마친 칼로스는 주변을 정리하며 생각에 빠졌다.
지금 폴터 자작은 영지에서 제도로 압송되었고, 에레즈는 덫을 밟았다. 하지만 아네타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루 빨리 말을 전하는 게 좋겠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소식을 접하는 순간 그녀는 상황을 직접 보겠다며 나설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칼로스는 지금껏 그녀에게 상황을 전하지 않았다. 나중에 원망을 듣더라도 지금만큼은 그녀가 편안히 쉴 수 있었으면 했다.
진행 상황을 전하는 건 그녀와 함께 복귀하는 내일 아침으로 정해졌다. 그녀가 직접 나설 일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네타가 깨어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침대 앞에 앉아 책을 읽던 칼로스는 언제나와 같은 방식으로 그녀를 휘감은 잠기운을 몰아냈다.
“우리, 이러고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아네타는 낮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를 들은 것인지, 그가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됐어?”
“그래.”
스스럼없는 긍정이 흘러나오자, 그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고맙다는 말을 이어 하니 제가 더 고맙다는 말이 돌아왔다.
‘대체 이 남자를 어쩌면 좋아.’
그녀를 눈에 담느라 느리게 깜빡이는 속눈썹이 따스한 춘풍을 일으키는 듯했다. 아네타는 곱게 휘어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손끝이 저릿했다.
설렘이 아닌, 불안이 담긴 떨림이었다.
환히 웃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 꿈의 잔향이 짙게 맴도는 듯했다. 화려한 봄날의 정경 속에서 그는 지금처럼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있잖아, 칼로스.”
“응.”
“아무래도 당신의 미래에는 내가 없는 것 같아.”
충동적으로 뱉은 말에 그의 손이 움찔 떨렸다. 기쁨으로 가득했던 그의 눈동자에 괴로움이 범람하듯 차올랐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어.”
사실 말하는 그녀의 기분도 좋지 않았다. 가슴에 무언가가 얹힌 듯 답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말을 그에게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막연한 확신이었다. 본능이 이성을 거스른 것이다.
“아네타.”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그녀의 불안이 그마저 물들인 것이다.
아네타는 밀려드는 죄책감에 이대로 눈을 감고 싶었지만, 애원하듯 저를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를 두고 그럴 수는 없었다.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
아네타는 그가 자신의 말을 부정하길 바랐다. 그리고 그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가 바라던 답을 들려 주었다.
“나는 설령 이 생이 끝난다 해도 당신 곁에 머물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