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35화 (35/122)

35화. 간호 (3)

에레즈 바우터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손톱이 아니라 아네타 아데나워를 엉망으로 짓씹어야 이 울분을 삭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도는 온통 아네타 아데나워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누구의 조문도 허락하지 않았던 데릭 아데나워의 장례식에 칼로스가 참석했다는 소식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데나워가에는 사생아가 있을 수 없다는 것부터 칼로스가 휴가까지 내 가며 이틀째 앓아누운 아네타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에레즈는 거칠게 발을 굴렀다.

“……이 세계가 내게 이럴 순 없어.”

일파만파로 퍼진 소문은 에레즈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 그동안 잠자코 있었더니 이런 사달이 났다.

지금, 원작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틀어지고 있었다.

처음 에레즈의 몸에 빙의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여자가 아닌 남자의 몸을 하고 있었기에 어찌된 일인가 싶었다.

다행히 혼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았다. 그 뒤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의 성별을 유지한 채로 좋아하는 소설 속 남주인공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 테니까.

에레즈는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칼로스의 사랑을 받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칼로스를 만나기 위해 조부인 바우터 남작의 죽음을 앞당겼다. 거짓 능력을 앞세워 별 볼 일 없는 능력을 감추는 일 또한 서슴지 않았다.

에레즈는 그 모든 것이 자신과 칼로스의 사랑을 위한 노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 짜증 나는 여자가 다 망쳐 버릴 줄이야.”

에레즈는 잊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우연히 아네타의 휴무일이라는 말을 듣고 그의 집무실로 찾아간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칼로스는 첫눈에 반했다는 고백에도, 함께 밤을 보내자는 유혹에도 응하지 않았다. 상의 단추를 풀어 내는 자신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또다시 그 여자가 나타났다. 그러곤 칼로스로 하여금 자신을 내쫓게 만들었다.

그 당시 느낀 분노가 되살아나, 에레즈는 더욱 살벌한 기세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모든 건 아네타 아데나워 때문이야. 그 증오스러운 여자가 나를 방해하고 있는 거라고.”

에레즈는 제 앞에 깔려 있던 꽃길을 아네타가 엉망으로 헤집었다는 착각을 하며 이를 갈았다.

모두의 관심을 사로잡을 사람은 아네타가 아닌 자신이어야 했다. 감히 조연 따위가 주인공의 자리를 위협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잃어버린 관심을 되찾아 와야 해…….”

강박과도 같은 생각과 함께 에레즈는 머리를 굴렸다. 이혼한 두 사람이 다시 붙을지도 모른다는 헛소문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파급력이 큰 사건을 떠올려야 했다.

원작을 아는 것은 큰 힘이 되었다. 해결책을 강구하던 그는 곧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을 떠올렸다.

“그래. 내겐 그게 있었어.”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에레즈는 기쁨에 젖은 얼굴로 탁자를 내리쳤다.

프리마 녹테(Primae Noctis).

아네타를 대신하여 자신이 해결하게 되는 사건이다.

에레즈는 그것 말고는 적절한 게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황제에게 예언이랍시고 입을 열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먼저 원작이 틀어져 그 사건이 없어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능력이 가짜라는 사실을 들키면 목이 날아갈 테니까.

에레즈는 일단 현지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집사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왔어?”

바우터가의 집사 젠을 맞이하는 에레즈의 자세는 거만했다. 탁자에 얹어 둔 발을 까딱이던 그는 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요즘 모단 고아원의 사정이 어렵다는 소문을 들어서 말이야.”

얼마 없는 가산을 탕진하며 사치하기 바쁘던 에레즈가 답지 않게 남 일에 관심을 두자 젠은 불만스레 입꼬리를 씰룩였다.

또 귀찮은 일이 벌어지겠구나 싶었다.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에레즈는 자신의 꼼꼼함을 자찬하며 명령을 내리기 바빴다.

“은밀히 사람을 보내서 한 번 살펴보고 오라고 해. 아, 마을 분위기도 좀 보고.”

“네. 알겠습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는 건지는 몰라도 그게 옳은 일은 아닐 것이다.

뭐가 어떻든 한 배를 탄 이상 따라야겠지. 젠은 심심한 감상과 함께 침실을 나섰다.

젠이 물러가고, 홀로 남은 에레즈는 곧장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모단 고아원에서 보낸 청원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네타는 아직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 테니 집무실 어딘가에 있을 게 뻔했다. 마침 두 사람 모두 집무실을 비웠으니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문을 여느냐는 것인데…….’

에레즈는 레녹스의 관리실로 가 물건을 두고 왔다는 핑계를 대 볼까 고민했다. 그리하면 열쇠를 내어 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던 찰나 반가운 이가 말을 걸어왔다.

“바우터 남작?”

에레즈를 부른 건 황궁 문 앞에서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서 있던 버논이었다.

“아, 케이너 백작님.”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에레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원작의 에레즈와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아네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물. 그런 이의 등장을 못마땅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다.

“황궁 안으로 들어가려는 겁니까?”

“네. 잠시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백작님은 여기서 혼자 뭐 하고 계세요?”

자연스럽게 에레즈에게 다가간 버논은 자신을 향한 이유 모를 호감을 눈치챘다. 딱히 접점이랄 게 없어 의아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급하게 가 봐야 할 곳이 생겨서 퇴근하던 길이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버논은 탄성과 함께 열쇠 꾸러미를 하나 꺼냈다. 받으라는 듯 내밀자 에레즈는 얼떨떨하게 두 눈을 끔뻑였다.

“이게 뭐예요?”

“레녹스 관리실에서 빌려온 겁니다. 돌려주는 걸 깜빡하고 그대로 들고 나왔는데, 미안하지만 대신 반납해 줄 수 있을까요? 집무실 열쇠를 모아 둔 거라 아무에게나 부탁할 수 없거든요.”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 에레즈는 잽싸게 낚아채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혀야 했다.

저것만 있으면 아네타의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걸 제게 맡겨도 괜찮아요?”

에레즈가 남은 인내심을 모두 끌어모아 묻자, 버논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영광의 주인 중 한 사람이잖아요. 남작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요.”

영광의 주인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버논은 에레즈를 철석같이 믿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 알겠어요. 제가 대신 반납할게요.”

에레즈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열쇠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겉으로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승낙한 것처럼 보이리라.

“고마워요. 덕분에 안심하고 갈 수 있겠어요.”

버논은 오늘 일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하며 돌아섰다. 바쁜 척 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입가엔 의미심장한 웃음이 걸쳐져 있었다.

“임무 완료.”

에레즈가 황궁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보람이 있다.

버논은 에레즈에게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넘겨준 열쇠를 떠올리며 상황이 점점 흥미진진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아마 저 열쇠 꾸러미는 에레즈 바우터의 숨겨진 속내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한편, 자신이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모르는 에레즈는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을 들어 여섯 번째 열쇠를 돌렸다.

달칵.

잠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에레즈는 밝아진 낯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안으로 딛는 발걸음은 조급했다. 누가 볼세라 서둘러 닫은 문 앞에서 숨을 고르니 요란스레 뛰었던 심장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이곳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모두 버논 덕분이었다.

‘역시 버논 케이너는 내게 도움을 주었으면 주었지, 절대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야.’

에레즈는 섣부른 판단과 함께 아네타의 것으로 추정되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전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어 구분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불쾌한 기억이 또 한 번 떠올라 이가 갈릴 뿐이었다.

에레즈는 아네타의 책상을 눈빛만으로 태워 버릴 듯 노려보았다.

청원서는 어디 있을까. 딱히 숨기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첫 번째 서랍을 열자, 여러 개의 서류 봉투가 나왔다.

에레즈는 서둘러 그 봉투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청원서, 청원서.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작게 중얼거리던 그는 곧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것은 청원서뿐만이 아니었다.

모단 고아원의 상황이 상세히 기재된 서류를 본 에레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원작보다 피해가 더 커졌어.”

서류에 따르면, 모단 고아원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가는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어 상당수를 각지의 고아원으로 보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에 마음 아파하기는커녕 만면 가득 기쁨을 드리운 에레즈는 이전보다 명확히 드러난 사건을 발견하지 못한 아네타를 비웃었다.

“그 여자는 역시 내 적수가 되지 못해. 이 세계는 내 편이라고.”

***

이른 아침, 침실에 딸린 발코니로 나온 칼로스는 대기하고 있던 황제의 그림자와 마주했다.

그는 이틀간 자리를 비운 칼로스에게 어제의 일을 전하기 위해 러셀이 보낸 이였다.

“버논은 목적을 달성했나?”

“예. 열쇠를 받은 바우터 남작은 곧바로 두 분의 집무실로 들어가 청원서와 함께 조작된 서류를 확인했습니다.”

일부러 열쇠를 쥐여 준 뒤 동태를 확인한다.

허튼 짓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한 일에 에레즈는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폴터 자작의 영지로 떠났던 사용인이 수도로 돌아온 건 어젯밤이라고 합니다. 바우터 남작은 그에게 보고를 받는 즉시 새로운 미래를 보았다고 주장하며 폐하께 알현을 청했습니다.”

“알현은 언제로 예정되어 있지?”

“금일 오전 10시 경입니다.”

능력이 진짜이며, 미래를 보았을 경우 에레즈가 보여야 할 반응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해결된 일임을 알고 언급하지 않는 것. 더불어 영지 상황과 서류가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에레즈는 새로운 미래를 보았다며 나섰다. 자세한 건 알현 이후에나 알 수 있겠지만, 칼로스의 마음은 이미 에레즈의 능력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수고했다. 이만 돌아가 봐.”

“예.”

그림자는 대답과 함께 발코니 밑으로 뛰어내렸다. 사라지는 검은 인영을 보다, 다시 침실로 들어온 칼로스는 에레즈가 보았을 서류에 대해 떠올렸다.

능력이 진짜이고,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보지 못한 걸 보았다고 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그는 정보를 훔친 순간부터 위험 분자로 낙인 찍혔다.

경계해야 한다는 확신을 더욱 공고히 다진 칼로스는 아네타의 침실로 향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아직 잠들어 있는 그녀가 보인다. 서슴없이 다가간 칼로스는 몸을 낮추며 속삭였다.

“아네타, 아침이야.”

꿀에 절여진 듯 달큰한 목소리로 아침을 알린 그는 고귀한 존재를 숭배하듯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칼로스? 언제 들어왔어?”

경건한 입맞춤과 함께 깨어난 아네타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얼굴을 보며 멍하니 물었다. 삼일 동안 수없이 반복되던 일이라 이젠 그러려니 했다.

“방금.”

칼로스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따뜻한 손이 팔을 조물조물 주물러 오자, 아네타는 어제와 같은 말을 입 밖에 내었다.

“말했잖아.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 없다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부담 갖지 마. 몸은 좀 어때?”

“거의 다 나았어. 내일이면 출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목소리도 어느 정도 돌아왔고, 몸살기도 가셨다. 아네타는 익숙한 손길이 잠들어 있던 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을 느끼며 말했지만, 칼로스의 반대가 잇따랐다.

“안 돼. 적어도 일주일은 푹 쉬어야 해.”

“이사벨이랑 같은 말을 하네.”

“그럴 수밖에. 당신, 말은 안 해도 요즘 굉장히 무리했잖아. 보나마나 마음고생도 심했을 테고. 당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라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지. 그러니 이번 기회에 원 없이 쉬어.”

계획의 진척 상황을 알리는 건 미뤄둔 지 오래다. 칼로스는 그녀를 향한 염려와 사랑을 담뿍 담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당신과, 당신을 아끼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