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간호 (2)
“그런 일로 미안해할 필요 없어, 칼로스.”
아네타는 침대 옆에 몸을 낮추고 앉은 칼로스에게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여전히 미안하다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무얼 하다 왔는지 그의 손은 차게 식어 있었다. 극명히 느껴지는 온도 차였지만, 찬 기운이 그리웠던지라 밀어내지 않았다.
“방금 들고 들어온 건 뭐야?”
아네타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가 한쪽에 치워 둔 것을 언급했다.
“아. 당신 일어나면 주려고 만들었어.”
칼로스는 그제야 뒷전으로 미뤄 두었던 것을 그녀 앞에 보였다. 딸기 우유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의 액체가 투명한 잔에 담겨 있었다.
“딸기 셰이크?”
“당신이 몸 안 좋을 때마다 마시던 게 이거 맞지?”
칼로스는 확신을 담아 물었다. 아네타가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에게 만드는 방법을 일러 주는 걸 들은 기억이 있어 그걸 토대로 만들어 온 것이었다.
“……몇 번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용케 기억하고 있었네.”
“잊을 수 없지. 당신과 관련된 일이니까.”
칼로스는 아네타의 등 뒤로 손을 넣어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는 걸 도와주었다.
힘들게 침대 헤드에 기댄 아네타는 그가 천천히 마시라며 건네준 잔을 받아 들었다.
목이 부어서 그런지 넘기는 게 쉽지 않았다. 분홍빛 셰이크를 맛본 아네타는 잔에서 잠시 입을 떼었다.
“어때?”
“맛있어.”
칭찬을 기대하는 듯한 얼굴로 묻는 통에 아네타는 그가 바라는 대답을 해 주었다.
“사실 이거, 어머니께서 해 주시던 거야. 내가 어릴 때 유독 잔병치레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만들어 주셨어.”
아데나워 저택에 있을 때는 셰이크는커녕 비슷한 것조차 찾지 않았다. 이사벨이 듣고 마음 아파할까 봐. 그래서 발티모어가의 저택에 있을 때 몇 번 부탁했던 것인데 설마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아네타는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다시금 느끼며 매끄러운 잔 표면을 매만졌다. 잔의 크기를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그런데 당신…… 양 조절에는 실패한 것 같은데.”
그의 손에 있을 땐 몰랐는데 막상 제 손으로 들어오니 기가 질리는 양이었다.
이런 잔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큰 잔에 가득 담겨 있는 셰이크를 보며 아네타는 다 먹을 수 있을지 걱정했다.
“마시기 힘들면 남겨도 돼.”
“옆에 두고 천천히 마실게. ……고마워.”
분명 수프를 먹을 땐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는데 달달한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아네타는 셰이크를 조금 더 맛본 뒤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던 잔을 칼로스에게 넘겨주었다.
“나도 같이 마셔도 되나?”
“감기 옮아.”
“괜찮아.”
칼로스는 받아 든 잔을 보다 그녀의 흔적이 남은 쪽에 입을 대었다. 그에 아네타가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칼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내가 풍기는 액체를 입 안에 머금었다.
꿀꺽. 살짝 구김이 간 셔츠 위로 목울대가 움직였다.
툭 불거진 그것의 움직임에 아네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시선을 빼앗겼다.
“다네. 혀끝이 아릴 정도로.”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칼로스는 슬며시 눈매를 휘었다. 노골적인 시선이 꽂힌 곳이야 뻔했다.
“감기는 옮기면 낫는다더군. 그것만이라도 내가 가져가면 어떨까.”
“그 말을 믿어?”
“아니.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번 믿어 보고 싶어.”
금빛 시선이 닿은 곳은 분명 그녀의 입술이었다.
아네타는 열기가 가시지 않은 이마를 짚었다.
“그럴 기운 없어.”
“나도 당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어. 그래도…….”
끝맺지 않은 말과 함께 칼로스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물리려 했지만 머리가 띵하고 울려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칼로스의 입술이 빠르게 다녀갔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옅은 딸기향이 그의 코끝에 스쳤다 흩어졌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칼로스는 정당한 보수를 받았다는 양 웃었다.
그 뒤로도 칼로스의 간호는 이어졌다. 아네타는 그가 먹기 좋은 온도로 식힌 뒤 내미는 수프를 받아먹어야 했다.
제 손으로 먹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수프를 가지고 들어온 이사벨이 칼로스의 손에 승기를 쥐어 주는 바람에 아네타는 얌전히 집사의 결정에 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묽은 수프는 그나마 넘기기 수월했다. 아네타는 수프가 담겼던 보울이 빈 것을 확인한 뒤에야 침대 헤드에 기대어 늘어졌다. 몸이 물 먹은 솜이라도 된 것 같았다.
“힘들어도 조금만 앉아 있어. 먹고 바로 누우면 몸에 안 좋아.”
아네타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괜찮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작은 움직임에도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용한 식기는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가지고 나갔다.
닫히는 문을 바라보던 아네타는 시계를 확인했다. 짧은 시곗바늘이 어느덧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싫다는 그를 억지로 보내 식사를 하게 만들었지만, 그걸 휴식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네타는 그를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당신도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칼로스.”
“내가 있는 게 불편해?”
돌아가라는 말이 그리도 서운한지, 날카롭던 눈매가 축 처졌다. 눈을 살벌하게 번뜩이며 불순한 접근에 맞서던 이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불편한 건 아니지만, 당신도 피곤할 거 아니야.”
환자를 돌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네타는 그가 황금 같은 휴일을 자신 때문에 허비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불편한 게 아니라면 약 먹고 잠드는 모습만 보고 가게 해 줘.”
그깟 휴일보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중요한 칼로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처연함이 방울져 흐르는 목소리로 완곡히 말했다.
“부탁이야.”
마지막 한 마디에 아네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
잠결에 뒤척이다 깨어난 아네타는 칼로스가 돌아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눈을 감았다. 남아 있는 약 기운 덕분에 정신이 빠르게 흐려졌다.
짙어지는 어둠 속으로 일순간 기이한 빛이 번졌다. 미끄러지듯 허공을 가른 빛은 새하얀 섬광을 토해 냈다.
그 속에서 아네타는 또다시 꿈을 꾸었다. 이번엔 그녀가 그의 곁에서 사라지는 꿈이었다.
아네타는 꿈속 어디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칼로스는 행복해 보였다. 그녀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웃었고, 그의 품에는 다른 여인이 안겨 있었다.
언제나 그녀만을 향했던 미소는 이제 여인의 것이 되어 있었다. 어쩐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낀 아네타는 저도 모르게 칼로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앞서 꾸었던 꿈과 마찬가지로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뻗은 손이 그의 몸을 통과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네타는 또다시 꿈속에서 떠밀려 나왔다.
꿈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가슴께가 뻐근한 느낌이었다.
아네타는 의미 모를 감정이 새겨진 가슴에 손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움직임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제 상체를 휘감고 있었다.
아네타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머리가 울리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고개를 들자, 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얼굴이 보였다.
돌아간 줄 알았던 칼로스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채 단잠을 자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리는데, 그의 손이 팔뚝과 허리부근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이혼 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라 그리 당혹스럽진 않았다. 다만 이런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였다간 꼼짝없이 오해를 사게 되리라.
함께 보내는 밤이 이상치 않았던 때는 지났다. 아네타는 이사벨이나 시녀들이 들어오기 전에 그를 떼어 놓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곤히 잠든 칼로스의 상체에 두 손을 가져다 대자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굴곡이 손바닥 아래로 느껴졌다.
아네타는 적나라한 감각을 무시하려 애쓰며 자신을 감싼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허리에 감긴 팔은 벗어나려 할수록 더욱 깊숙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 탓에 그와의 간격은 멀어지기는커녕 더욱 가까워졌다.
그에 아네타는 확신했다. 칼로스는 지금 깨어 있다고.
그 사실을 입증하듯 익숙한 손길이 허리선을 어루만졌다. 아네타는 제지하듯 그 손을 잡아 쥐었다.
“칼로스.”
“으응…….”
이름을 불러도 그는 자는 척을 이어 나갔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목께에 파고든 입술에서 새어 나와도 아네타는 속지 않았다.
“안 자고 있는 거 다 알아.”
“들켰군.”
반대의 경우는 염두에 두지 않고 단호히 말하자 칼로스는 그제야 눈을 떴다.
그가 상체를 조금 물려 시선을 맞추자 졸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야, 아네타.”
싱그러운 아침 햇살이 맺힌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웃어도 소용없어.”
아네타는 능청스럽게 넘어가려는 시도에 응해 주지 않았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거야?”
“당신이 내 몸에 손을 댈 때부터.”
설마 자는 모습을 모두 지켜본 건 아니겠지 싶어 물었더니 은근한 뉘앙스가 풍기는 대답이 들려왔다.
“어감이 좀 이상한데.”
“아침부터 그렇게 거침없이 만지는데 깨지 않을 수 없지.”
“이상하다니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군.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이라.”
칼로스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려 했지만, 아쉽게도 미수에 그쳤다.
그의 이마를 눌러 입술의 접근을 막아 낸 아네타는 나머지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어서 비키라는 항의였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그녀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 왔다.
“거기, 민감하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
“몰라. 그런 건 다 잊어버린 지 오래야.”
이젠 기억할 필요 없는 일이다. 태연히 선을 긋자 칼로스의 입매가 비뚜름히 올라간다.
아네타는 못마땅함을 내보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능숙하게 화제를 돌릴 뿐이었다.
“분명 돌아간 걸 확인했는데. 왜 여기 있어?”
저택에 간 게 아니었냐는 눈빛을 쏘아 보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약속은 지켰으니 걱정 마. 잠깐 들렀다 온 것뿐이었지만.”
“침실엔 어떻게 다시 들어온 건데.”
다른 곳도 아닌 가주의 침실이다. 접근이 쉽지 않을 터였다. 순간 유력한 가설이 하나 떠올랐지만, 아네타는 부디 그것이 아니길 바랐다.
“창문을 통해서.”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빗나가지 않는 걸까. 예상대로 능력을 사용했다는 말에 아네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또 영광을 그런 식으로…….”
“어쩔 수 없었어. 내 침실 벽에 큰 구멍이 나서 말이야.”
목숨을 노리는 습격이 벌어졌다면 그가 이곳에서 한가롭게 잠을 청했을 리 없다. 습격자는 물론 그들의 뿌리까지 탈탈 털어 버릴 이가 그였기에 아네타는 확신을 담아 물었다.
“당신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지?”
“당신 걱정에 덜덜 떨리는 손을 잘못 가눠서 그만.”
돌아가라는 말을 했다고 그런 것이 분명했다. 아네타는 그 이성적이던 남자가 이런 행동을 저질렀다는 것에 깊은 숨을 토해 냈다.
“벽이 고쳐질 때까지 신세 좀 질까 하는데.”
“안 돼.”
아네타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고 여기며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또다시 어제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무방비한 곳에 날 방치해 두려고?”
“무방비?”
황궁 다음 가는 규모의 기사단을 가진 공작저가 무방비하다니. 아네타는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에겐 영광의 능력이 있지 않은가.
“당신이 가진 영광의 능력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어.”
그런 이에게 어느 누가 덤빌까 싶었다.
“사실…… 불안해. 당신이 이렇게까지 앓는 모습은 처음 봐서.”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아 저도 모르게 핑곗거리를 만들어 버렸다. 칼로스는 그리 고백하며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다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곁에서 돌봐 주고 싶어. 아네타, 부디 허락해 줘.”
“출근은 어쩌려고.”
“휴가 내고 왔어.”
기다렸다는 듯 하는 말에 아네타는 탄식을 삼켰다. 이번에도 작정을 하고 왔구나 싶었다.
아네타는 칼로스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았다. 그가 전해 오는 온기는 따스했다. 그래서 차마 곁에 있어 주겠다는 그를 뿌리칠 수 없었다.
아니,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방금 꾸었던 그 꿈의 영향을 받은 걸까. 아네타는 답을 구하지 못한 채 또 한 번 백기를 들었다.
“……일주일. 그 이상은 안 돼.”
암묵적인 허락에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허락해 주는 거야?”
“벌써 휴가까지 냈다며. 안 된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을 거잖아.”
소문 걱정을 할 때는 이미 지났다. 그동안은 그가 외사랑에 지쳐 떠나가길 바라며 그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아네타는 유독 그에게만 약해지는 것 같은 제 모습을 발견했다. 여기서 조금 더 그와 거리를 좁히면 정말 그에게 마음이 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거리를 벌려야 할까?’
아네타는 곧 그럴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더는 그에게 어떠한 감정을 품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원작은 이미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뒤틀렸고, 그녀가 아는 이야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