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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33화 (33/122)

33화. 간호 (1)

잠에서 깨어난 칼로스는 습관적으로 옆자리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 머물 온기를 기대했으나, 차가운 냉기만이 손끝에 감겼다.

언제나와 같은 아침이었다.

눈을 뜬 그는 낙심한 채 상체를 일으켰다. 등받이에 기대어 비어 버린 자리를 찬찬히 더듬어 보았다. 아네타와 같은 침실, 같은 침대에서 잠들던 때가 꿈처럼 느껴졌다.

그에게 남은 것은 얄팍하게 흉내 낸 그녀의 향기뿐이었다.

칼로스는 그 사실을 퍽 아쉬워하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다를 것 없으리라 여겼던 하루의 시작이었다.

벗은 옷을 성격대로 말끔하게 정돈하여 놓아둔 그는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 섰다.

물에 젖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무성의하게 뻗은 손으로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던 감촉은 곧 물에 씻겨 내려갔다.

칼로스는 단단한 몸의 굴곡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느낄 새도 없이 아네타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쩌다 그녀를 이토록 사랑하게 되었을까.’

지난 기억을 더듬자, 그의 기억이 물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아네타에게 품은 첫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부어오른 뺨에 피어오른 통증과 함께 눈물을 참아 내던 그녀의 모습이 뇌리에 깊이 박힌 탓이다.

좀처럼 타인에게 관심이 없던 그가 아네타 아데나워라는 존재를 의식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호기심은 결혼과 동시에 우정으로 변했지만, 곧 그마저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틀었다.

낯선 감정의 씨앗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꽃으로 피어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네타는 항상 그를 대해야 하는 태도가 정해져 있다는 듯 행동했지만, 칼로스는 때때로 그녀가 내보이는 순간의 표정과 눈빛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가끔 보이는 웃음 한 자락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녀가 떠나갔을 땐 열병을 앓으며 끙끙대기도 하고, 멍하니 결혼반지만 들여다보다 하루를 통째로 보내기도 했다.

칼로스는 이러한 변화가 싫지 않았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인내하고 견뎌 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곁에 머물 수만 있다면 무엇을 못하랴.

느리게 샤워를 마친 칼로스는 수건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머금은 물기를 털어 내며 욕실을 나섰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는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엔 온통 아네타 생각뿐이었다.

함께 쓰던 침대, 마주 보고 앉아 식사했던 식탁, 서로를 배웅하고 맞이하기도 했던 대문 앞. 차례로 걸음을 옮겼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이제 슬슬 현실을 받아들일 만도 하건만 그는 여전히 발티모어가에 머물던 그녀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칼로스는 걸음을 돌려 정원으로 향했다. 제국에 둘밖에 남지 않은 공작가라는 위엄에 걸맞게 드넓은 정원엔 천자만홍의 화려한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중 칼로스의 발길이 닿은 곳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유리온실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온실은 오직 아네타만을 위한 것이었다.

집무실 화병에 꽂힌 꽃이 시들 기미가 보일 때마다 그는 이곳으로 와서 손수 그녀를 위한 꽃을 꺾었다.

그 외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꽃을 돌보았고, 그녀가 보고 싶을 때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다.

꽃잎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겹쳐진 꽃들을 바라보던 칼로스는 문득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음을 알리던 부하 기사를 떠올렸다.

“꽃을 들고 찾아가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하는데…… 그녀가 받아 줄까요?”

떨리는 음성으로 묻던 그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기사가 맞이한 결말이 아닌, 아네타를 찾아갈 구실을 찾은 것이었다.

“가 볼까…….”

작게 중얼거린 칼로스는 결심과 함께 꽃을 꺾기 시작했다.

꺾은 꽃은 아네타가 손재주가 좋다고 칭찬했던 시녀에게로 가져갔다. 익숙한 꽃을 본 시녀는 당연하다는 듯 아네타의 취향에 맞추어 그럴싸한 꽃다발을 만들어 냈다.

“이 정도면 될까요, 공작 전하?”

“아네타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군. 수고했다.”

칼로스는 전문가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솜씨에 흡족한 기색을 보였다. 시녀가 입가에 떠오른 웃음에 놀라거나 말거나, 그는 린든에게 보상을 명한 뒤 마차에 올랐다.

아네타가 나고 자란 저택은 공작저에 필적할 만큼 호화롭기 그지없는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가문의 부와 명예를 내보이듯 푸른빛을 뽐내며 당당히 서 있는 저택은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했다.

공작가의 깃발이 달린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추어 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철옹성같이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렸다.

열린 문 틈 사이로 걸어 나온 이는 이사벨이었다.

“창공의 영광, 발티모어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그런데 어찌 아시고 문병을 오셨는지요?”

잰걸음으로 다가와 칼로스를 맞이한 이사벨은 그의 품에 소중히 안겨 있는 꽃다발을 보며 정중히 물었다. 아직 황궁에 기별을 넣기 전이었기에 의문이 앞섰다.

“문병? 지금 문병이라고 했나?”

질문하기 무섭게 칼로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품 안에서 미끄러질 뻔한 꽃다발을 반사적으로 붙잡았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한 꽃잎 몇 장이 팔랑이며 발밑에 떨어졌다.

“각하께서는 과로에 감기 몸살을 앓고 계십니다. 알고 오신 게 아니셨습니까?”

꽃다발 때문에 착각을 한 모양이다. 이사벨은 뒤늦은 깨달음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내일 출근하면 알게 될 일이지만,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

“아네타는 지금 어디 있지? 침실에 있나?”

“예.”

“안내를 부탁하지.”

아네타에게 의사를 묻기엔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다. 이사벨은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칼로스 발티모어였다. 그가 아네타에게 해를 끼칠 리 없다고 판단한 이사벨은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 주었다.

대문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문을 닫고, 칼로스는 이사벨의 안내를 받아 아네타의 침실로 이동했다.

“각하께선 여기에 계십니다.”

저택의 내부 풍경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칼로스는 이사벨이 손바닥을 보이며 정중히 가리킨 문을 서둘러 열었다.

이사벨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네타의 상태를 살피고 있던 시녀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예고 없이 등장한 손님에게 예를 갖추었지만, 칼로스는 대답 없이 스쳐 지나갔다.

침대에 가까이 다가서자 열에 들뜬 몸에서 후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붉은 뺨에 손을 올린 그는 느껴지는 체온에 제가 더 고통스럽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어제는 아무 이상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늘 기침하시는 시간에 와 보니 열이 올라 있었습니다.”

다행히 약이 잘 들어 지금은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된 것이라고 이사벨은 덧붙였다.

“이게 나아진 거라고?”

“예.”

지난밤에는 혼자 얼마나 아팠을까. 칼로스는 끙끙 앓고 있는 아네타를 보다 이사벨과 시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간호는 내가 하지. 나가 봐도 좋다.”

아무리 그의 신분이 높다고 하더라도 그녀들의 고용인은 따로 있었다.

시녀는 아네타의 허락 없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이사벨을 올려 보았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

“우리 예쁜 딸, 하루 빨리 나았으면 좋겠는데.”

부드러운 손이 땀에 젖은 이마를 어루만졌다. 익숙하면서도 다정한 음성에 눈을 뜨자 그리움의 대상이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앓아 주고 싶어…….”

아네타는 놀라 휘둥그레 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걱정 어린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둑 터진 댐처럼 꾹꾹 눌러 왔던 감정이 흘러나왔다.

엘레나, 어머니.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요. 당신이 내려주던 상냥한 빛을 되찾고자 얼마나 방황했는지 몰라요…….

다시는 하지 못할 말을 전하려 했으나,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절망에 물들 무렵, 엘레나는 그녀를 위로하듯 또 한 번 다정스레 손을 뻗었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감출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났다. 그 찬란한 빛에 물들어, 아네타는 어느새 어린 날의 그녀로 돌아가 있었다.

조건 없이 쏟아 주는 사랑은 여전했다. 그 마음을 외면하려 애쓰며 덧없이 흘려보낸 지난날이 죄스러울 정도로.

아네타는 이전에 해 보지 못했던 행동을 했다. 뺨에 닿은 손에 얼굴을 부비고 마음껏 어리광을 피웠다. 엘레나를 피하기 바빴던 때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에 엘레나는 아주 기쁘게 웃었다. 어머니의 웃음이 밝고 환하게 피어날수록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던 때에 갑자기 엘레나의 손이 거두어졌다. 예고도 없이 떠나가려는 모습에 아네타는 황급히 손을 뻗어 옷자락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에서와 달리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그녀를 향해 애처로이 빛나는 금안이 보였다.

“아…….”

꿈이었구나. 갈라진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거친 소리였다.

“아네타. 정신이 들어?”

수건을 식히던 물을 갈아오려고 했었는지, 작은 대야를 들고 있던 칼로스가 물었다.

그는 옷자락을 붙든 그녀의 손 때문에 이도저도 못하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마른기침 때문에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아네타는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급하게 뻗은 팔뚝이 쑤셨다.

“몸은 어때?”

칼로스는 들고 있던 대야를 협탁 위에 올려 두고 앉아 거두어지는 그녀의 손을 쥐었다.

검을 잡아 자연히 단단해진 손의 감촉이 닿자, 아네타는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뒤 목소리를 내었다.

“통증은 좀, 가라앉았어.”

열은 많이 내렸지만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는 여전했다. 아네타는 제 목소리가 머리에서 웅웅 울리는 걸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어?”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왔다가 당신이 아프다는 걸 알게 됐어. 어쩐지 눈뜨자마자 당신 얼굴이 보고 싶더라니.”

그 뒤로는 보다시피 열심히 간호 중이었다는 말에 아네타는 놀랐다.

“당신이 날 간호했다고?”

“그래.”

칼로스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그녀의 이마에 얹어져 있던 수건을 바꿔 주었다. 이미 몇 번이고 반복했던 일이다.

황제 다음 가는 이로 여겨지는 그가 할 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아네타는 할 말을 잃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한데 얽혀들었다.

“고마워하고 있는 거 알아. 그러니 계속 곁에 있게 해 줘.”

애정을 담아 보듬어 주던 손길이 어머니의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기대가 깨어진 후에도 실망은 없었다.

이 역시 어제 확신했던 변화와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을까.

아네타는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또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곁에 아무도 없었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노을이 진 하늘이 보였다. 갖가지 색으로 물든 하늘 위로 꿈에서 보았던 엘레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때 느꼈던 감정까지 되살아나 아네타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만약 어릴 때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이전과 달리 엘레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있을 리가.’

결론은 부정이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아네타는 끝없이 의심했을 것이다.

그것은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구분할 수 없는 세계에 갇혀 사는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낸 방어기제였다.

‘칼로스는 돌아갔을까.’

아네타는 눈을 굴려 침실 내부를 훑었다. 그녀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라는 듯 걱정하던 그가 떠오르기 무섭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다 아네타와 시선이 마주친 칼로스는 서둘러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마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애타는 표정으로 사과를 건넸다.

“혼자 둬서 미안해, 아네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당신이 깰 줄은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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