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리움의 조각 (3)
“일단 거기 앉도록.”
러셀은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턱선을 매만지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흥미를 읽어 낸 아네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지시에 따랐다.
“예나 지금이나 내게 직접 거래를 제안하러 오는 이는 후작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겠지?”
“폐하께선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시고, 저 또한 폐하께서 원하시는 걸 소유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다른 방법을 꾀하는 건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고 그것을 성사시킬 능력 또한 갖추고 있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아네타는 자신이 러셀을 배신하지 않는 이상 그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고 여겼다. 누구도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녀를 배제할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요구에 상응하는 대가를 준비해 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그럼요.”
양측 모두 손해 없는 거래일 것이 자명했기에 아네타는 스스럼없이 긍정했다. 은연중에 드러내는 자신감을 읽어 낸 러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들어 보고 결정하는 걸로 하지. 요구 사항 먼저 말해 보도록.”
“제가 청하고 싶은 건 오직 아데나워 가문만이 앙리엔 광산의 다이아몬드를 유통할 수 있도록 독점을 허락해 주시는 겁니다.”
설마 그게 끝이냐는 눈빛을 보내는 러셀에게 아네타는 당연히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또한 앙리엔 광산이 외화 벌이에 큰 공헌을 하는 만큼 불법으로 다이아몬드를 유통하거나 빼돌리는 자가 있으면 국법으로 보다 엄중히 처벌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제법 까다로운 요구를 하는군.”
아데나워 후작가가 앙리엔 광산의 다이아몬드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던 건, 세계적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는 물량 중에서도 월등히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기 때문이었다.
‘한정’이라는 말이 붙은 물건은 모름지기 사람의 소유욕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그중 따로 표식을 새길 정도로 가치가 높은 사치품을 노리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보석을 불법적인 루트로 사들일 수 있는 재력을 갖춘 이라면 필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대가는?”
러셀은 통제하기 힘든 대상의 처리를 제게 떠넘긴 아네타를 보며 물었다. 그럴 듯한 보상이 없다면 당연히 거절할 셈이었다.
“황가와 발티모어 공작가에 공급하던 철의 단가를 더 낮추겠습니다.”
“당연히 내가 만족할 만한 정도겠지?”
러셀은 사사로운 정에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네타는 새로이 수정할 가격에 대해서 이미 결정을 내렸다.
“이전의 절반이면 어떠신지요?”
손해 볼 것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이득이라면 모를까. 그녀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 낸 듯, 러셀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로군.”
러셀은 아네타에게 꺼내려 했던 말을 접어 두기로 했다. 이미 그보다 더한 이득을 얻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얻어 낸 이득은 그를 흡족하게 했다.
“발티모어 공작.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이미 승낙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음이 분명한데도, 러셀은 부러 칼로스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아네타의 시선 역시 그에게로 가 닿았다. 도움을 호소하지 않는 덤덤한 시선이었다. 그에 칼로스는 현실적으로 득과 실을 따져 보았다.
결론은 러셀과 같았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폐하.”
칼로스의 긍정에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승낙의 의미임을 깨달은 아네타는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러셀은 곧장 계약서를 작성해 내밀었다.
확실한 증거를 남기는 걸 선호하는 아네타의 성향을 꿰뚫고 있는 그였기에 묻지 않고 행한 일이었다.
실제로 황제인 그가 누군가와 대면하여 손수 계약서를 작성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상대는 두 번 모두 눈앞에 있는 그녀였다.
“확인은 끝났나?”
“네.”
처음부터 이 거래를 성사시킬 자신이 있었다는 듯 챙겨 온 인장을 보며 러셀은 헛웃음을 지었다.
능력 없이 입으로만 떠들어 대기 바쁜 이가 행했다면 아니꼽게 보였을 테지만, 아네타는 경우가 달랐다.
아네타는 용건이 끝나는 대로 제 몫의 계약서를 챙겨 들고 자리를 떴다.
예정에도 없던 알현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칼로스의 시선은 그녀가 나간 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칼로스.”
“예, 형님.”
둘만 남은 공간에서 호칭은 한결 친근하게 변했다. 러셀이 작위로 부르면 폐하라고 칭하고, 이름으로 부르면 형님이라 칭하는 것은 그들 사이의 오랜 규칙이었다.
“따라가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인데. 안 나가나?”
러셀은 무슨 일인지 걱정이 되지 않느냐는 말로 칼로스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그럴 수 없습니다. 형님을 보필하는 것이 제 일이니까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녀의 뒤를 따르고 싶었다. 그러한 마음을 간신히 붙들어 둔 것은 남아 있는 이성이었다.
“난 갑자기 아데나워 후작이 저런 요구를 해 온 이유가 궁금한데.”
칼로스가 충동을 억누르며 답하자, 러셀은 웃었다. 제 앞에선 요령을 부리지 않는 아우를 위해 몸소 명분을 만들어 주는 수고도 서슴지 않았다.
“네가 좀 알아봐다오.”
요구 사항을 듣고 대강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 것은 비단 러셀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칼로스는 아네타에게 생긴 일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길 바랐다.
“하지만…….”
“부탁하지.”
러셀은 본래 이런 사소한 일에까지 관심을 두진 않았다. 궁금했다면 본인에게 진작 하문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칼로스는 감사히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칼로스는 언제 망설였냐는 듯 서둘러 러셀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지자, 러셀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빠져도 제대로 빠졌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칼로스가 아네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아우와 다른 게 있다면, 채 자라나지도 못한 감정의 싹을 발견하는 즉시 뿌리 뽑은 것이었다.
사적인 감정과 별개로 러셀은 한때 그녀가 여성의 몸으로 태어난 걸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아네타와 루이사가 이루어 낸 성과가 늘어갈수록 변화를 겪었다.
오직 남성만이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은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두 인재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었다.
성별이 인재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도자의 입장에서 무엇보다 값진 깨달음이었다고 그는 자부했다.
***
“그리고…….”
바론에게 지시를 내리던 아네타는 칼로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하던 말을 멈추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이야기 마저 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소파로 가 앉는 그에게 시선을 두던 아네타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광부의 아들이 완치할 때까지 치료비 전액을 지원해. 그동안 열심히 일해 온 것에 대한 보상이니 더는 광산에 나올 필요 없다고 전하고.”
“해고하시려는 겁니까?”
“이유가 무엇이든 전적이 있는 자를 계속 고용할 수는 없으니까. 이번 일은 함구해 줄 테니 조용히 다른 일을 알아보라고 해. 너는 이 일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아네타는 짧은 새에 내린 결론을 전한 뒤 바론을 영지로 돌려보냈다.
그가 부복을 한 뒤 떠나가자, 칼로스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꼭 대답해야 해?”
“황제 폐하 명으로 온 거야.”
칼로스는 러셀이 만들어 준 핑곗거리를 사용했다.
황제가 언급되자 아네타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앙리엔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가 다이아몬드를 훔치려다 적발됐어. 사정이 딱해서 선처를 해 주긴 했지만.”
칼로스는 광부 아들의 치료비를 지원하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딱한 사정이라는 게 무엇인지 짐작이 되었다.
“처음부터 도와줄 생각이었다면 폐하께 그런 거래는 왜 청한 거야?”
“이번에는 운 좋게 잡았지만, 다음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허튼 마음 품지 못하도록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메워야지.”
“봐주는 이유는?”
“글쎄. 그 애가 부러웠나 보지.”
남 이야기 하듯 내뱉는 말에 칼로스의 입술이 다물렸다. 너무 캐물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데 그보다 그녀가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들키면 목이 달아날 게 분명한 일을 아들을 위해 행한 거잖아.”
“…….”
“자식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를 두었으니 오래오래 살아야지.”
아네타는 잘게 떨리는 손을 움직여 천천히 책상 위를 정리했다. 그의 시선이 제게서 떠나지 않는 걸 느끼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요즘 그가 너무도 편하게 느껴져서 충동적으로 흘린 말이었다. 괜히 말했나 싶기도 했지만, 이미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힐끗 시계를 확인한 아네타는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아네타.”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나지막이 불러오는 이름에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났다.
아네타는 고개를 돌려 한결같은 감정의 빛을 발하는 금안을 마주했다.
“나도 그래.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는 잠시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인 뒤 다정스레 읊조렸다.
“진심이야.”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딘가에서 얼어붙은 무언가가 쩍 갈라지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따스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봄날의 조각이 가슴에 박혔다. 그 생경한 기분에 아네타는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알고 있어.”
아네타는 짧은 대답과 함께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닫히는 문 뒤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날이 저문 허공엔 한층 서늘해진 공기만이 감돌았다. 마차에 오르던 아네타는 살갗을 훑고 지나가는 냉기에 몸을 움찔 떨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그녀는 가장 먼저 라벤더 오일을 푼 물에 몸을 담갔다. 요새 무리하는 일이 많아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이유 없이 축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뾰족한 무언가로 온몸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 아네타는 젖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저녁 식사는 됐어.”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물기를 닦아 낸 아네타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마침 내일이 휴일이기도 하니 잠이나 푹 자 둘 요량이었다.
이사벨의 걱정 어린 표정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아네타는 늘어지는 몸을 우악스레 휘감은 수마에 이끌려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온몸이 열기에 휩싸인 채였다. 눈을 감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사벨이 보이자, 아네타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는 걸 느낀 것도 바로 그때였다.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욱신거리는 통증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무언가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의원이 다녀갔습니다. 과로에 감기 몸살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일하셨으니 몸이 축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요.”
이사벨은 속상한 마음을 애써 삭이며 단호한 투로 말했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아무 일도 하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황궁엔 내일쯤 기별을 넣어 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