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31화 (31/122)

31화. 그리움의 조각 (2)

일주일. 리페에게 도움을 청하고 길드에서 사람까지 고용해 가며 화가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그로 인해 알 수 있었던 건 부정하고 싶은 사실뿐이었다.

「알아본 결과, 화가는 그림을 사들인 이에게 제국을 떠날 거라는 말을 했었다고 합니다.」

눈에 박힌 문장은 거듭 확인을 반복해도 바뀌지 않았다.

리페에게서 온 서신을 힘없이 내려놓은 아네타는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제국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더라니.’

낙심하는 것도 잠시, 아네타는 깃펜을 들었다. 길드로 보낼 서신에 리페가 얻은 정보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반드시 화가를 찾으라는 말을 적어 내려갔다.

밀랍으로 입구를 봉한 봉투를 아랫사람에게 전한 아네타는 그 뒤로 한참을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찾을 수 있을까.’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 내려 해도 쉽지 않았다.

아네타는 답답한 마음을 삭이며 찻주전자를 들었다. 이럴 땐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만, 당분간은 한가할 예정이었기에 그것마저 불가능했다.

“아네타.”

아네타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에 또 한 번 넋을 놓았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칼로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하며 고개를 들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칼로스는 말없이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

그의 길게 뻗은 검지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아네타는 제가 만들어 낸 참상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기울어진 찻주전자에서 흘러나온 찻물이 잔을 가득 채우다 못해 테이블 위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금빛 레이스 자수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던 테이블클로스는 붉은 액체로 인해 엉망이 되었다.

“그건 이리 줘. 다칠라.”

칼로스는 그녀의 손에 들린 찻주전자를 부드럽게 빼냈다. 그는 이전에도 한 번 겪은 적 있는 일에 당황하지 않고 별다른 언급 없이 뒷수습을 자처했다.

테이블클로스를 치우고 남은 흔적을 닦아 낸 후에는 아네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맞은편에서 보고만 있기엔 불안하다는 게 이유였다.

“차는 내가 다시 내릴게. 그동안 당신은 이거라도 좀 먹고 있어.”

보나마나 하루 종일 식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을 게 뻔했다.

고무를 씹는 것 같은 표정으로 식사를 하다 반도 채 먹지 않고 손을 놔 버리던 모습을 떠올린 칼로스는 그녀 앞에 티 푸드가 담긴 접시를 밀어 주었다.

아네타는 입맛이 없다는 말로 거절하려 했지만, 이른 새벽에 일어나 만들었다는 크리스의 말이 떠올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잘 하고 있으려나. 제법 밝아진 얼굴을 떠올리며 쿠키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손끝에서 무언가가 뭉그러졌다.

부드러운 무언가를 파고드는 감각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아네타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 봐.”

쿠키를 집으려다 그 옆에 있던 조각 케이크를 만져 버렸다. 엉망이 된 것은 모양이 망가진 케이크뿐만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크림으로 범벅이 되어 버리자 아네타는 찜찜한 기분으로 닦을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손 이리 줘, 아네타.”

아무리 봐도 닦을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손수건은 들고 다니지 않아 난감해하던 차에 칼로스가 크림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손목을 쥐어 왔다.

손수건을 꺼내려는 듯 남은 한 손을 품에 넣던 칼로스는 잠시 멈칫했다.

“왜 그래? 당신도 손수건 없어?”

“있긴 하지만, 굳이 꺼낼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아네타는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느껴지는 감촉에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소리 내어 입을 맞춘 칼로스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끝을 입 안에 담았다.

뜨겁고 말랑한 혀가 크림을 걷어 낸 뒤 살갗을 훑는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물기에 젖은 소리를 동반하여 그녀를 물들였다.

그의 혀가 손가락 사이로 드나드는 게 보였다. 순결한 백색의 빛을 집어삼키는 붉은 입술은 적나라한 시각적 자극을 불러일으켰다.

아네타는 저도 모르게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색채의 대비에 손가락이 절로 구부러졌다.

크림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의 혀는 멈출 줄을 몰랐다.

찌르르 퍼지는 감각에 못 이겨 손끝을 훑는 그의 혀를 누르자, 다음 타깃을 포착한 혀가 호기롭게 손톱 밑을 파고든다.

손가락과 진한 키스라도 나누는 것처럼 진득하게 혀를 움직이는 통에 아네타는 더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또 마음대로 행동하지.”

그가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드는 것을 확인한 아네타는 잡혀 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힐난이라고 하기에는 지극히 평이한 투였다.

“이제 그만하는 게 좋겠어.”

아네타는 그의 턱을 향해 거두었던 손을 도로 뻗었다. 반쯤 구부린 손가락으로 그의 턱 밑을 받치자 모로 누운 검지의 날 위로 살결이 닿는다.

아네타는 자연히 그의 입술에 내려앉은 엄지로 번들거리는 타액을 훔쳤다.

촉촉이 젖은 입술을 약하게 누르며 밀어내자 어느새 벌어진 입술 새로 신음 같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아네타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다 눈앞에서 그의 타액으로 젖은 손을 들어 보였다.

“이게 뭐야.”

크림은 모두 그의 입 속으로 사라졌지만 찜찜한 건 여전했다.

아네타가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보이며 한숨을 쉬자, 그는 그제야 손수건을 꺼내 들며 웃었다.

“미안해.”

아쉬움으로 점철된 얼굴로 건네는 사과는 신뢰할 수 없었다.

아네타는 말과 달리 조금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건 도로 넣어 둬. 이제 손수건으로는 턱도 없어.”

아네타는 결국 손을 씻으러 다녀와야 했다.

그녀가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칼로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작은 쪽지 한 장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쪽지에는 잠시 러셀에게 다녀오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는 말에서 그녀를 혼자 두고 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묻어났다.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아네타는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아직 수습되지 않은 실수의 흔적을 마주하니 양심이 조금 찔렸다.

칼로스가 우린 차는 어느새 싸늘히 식어 있었다. 향이 반쯤 날아가고 쓴맛이 더욱 강해졌지만 아네타는 굳이 찻잔을 비워 냈다.

이전의 그녀였다면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도 이와 같은 수순을 밟게 될 거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아무리 펄펄 끓어올랐던 마음도 서서히 식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의 마음은 한계를 모르고 끓어오르고 있었다. 여차하면 제 자신마저 불구덩이로 내던져 그 마음의 온도를 더욱 뜨겁게 끌어올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좋을까.’

아네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답을 구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자문을 얻을 수 없는 난제 같았다.

확실한 건 자신은 ‘아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 없지만, 그에게 점점 빠져들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와 한 공간에 머무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아지기도 했다.

가장 큰 변화는 그가 제게 어떤 식으로 닿아 오든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아까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시도하기도 전에 주저 없이 뺨을 때렸으리라.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겪어 보는 감정을 어찌 다스려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네타는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감상에 빠져 있던 그녀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아네타는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누구죠?”

“바론입니다, 각하. 광산에 대해 보고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사생아 일이 해결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아네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와.”

바론은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네타는 인사와 함께 허리를 숙여 오는 그에게 하문했다.

“광산이라니. 어떤 광산을 말하는 거지?”

“앙리엔 광산입니다.”

앙리엔 광산. 아데나워를 제국 최고의 재력가 가문으로 만들어 준 집안의 보물이었다. 하루에도 어마어마한 수익을 창출하는 곳인 만큼 발생하는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을 터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끝으로 지그시 누른 아네타는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광부 한 명이 다이아몬드를 훔치려다 적발되었다고 합니다. 이건 광산의 관리인이 보낸 서신입니다.”

바론은 피고용인인 자신들이 독단적으로 판단하면 안 될 것 같아 보고를 올리게 되었다며 품 안에서 꺼낸 봉투를 건네었다.

특색 없는 투박한 봉투를 뜯은 아네타는 한 줄의 안부 인사 뒤로 이어지는 보고를 단숨에 읽어 내렸다.

색이 옅은 핑크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광부는 그것을 훔치려 하다 관리인에게 걸렸고, 지금은 따로 구금 중인 모양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고위급 귀족의 재산에 손을 대었으니 당장 목이나 손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도 그의 처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아네타는 착잡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바론을 보다 다시 서신을 눈에 담았다.

바론보다도 더 광부의 처벌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서신을 보낸 장본인인 듯했다.

관리인은 광부의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누구보다 성실히 일해 왔던 사람이 다이아몬드를 훔치려 한 이유는 몹시 위중한 병에 걸린 아들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약값 때문에 빚에 허덕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더는 돈을 빌려주는 곳이 없자 자신도 모르게 벌인 일이라고 한다.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고 싶어서.

부성애가 여실히 느껴지는 사연은 그녀에겐 영 생소한 것이었다.

“다들 광부의 처벌을 바라지 않는 모양이네.”

아네타는 의중을 떠보듯 물었다.

“저희는 그저 각하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바론은 단호한 얼굴로 즉각 답했다. 아네타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저 마음만으로 자신들의 주인이 그를 처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누가 있지?”

“저와 관리인, 그리고 제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다들 선대 영주께서 별세하신 일과 그로 인해 벌어진 소란에 관심을 두고 있던 탓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

영지 전체가 소란스러운 데다 데릭이 죽어 영지에 상주하는 가문 사람이 없으니 절호의 기회이긴 했다. 그러한 사실이 광부의 심리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아네타는 사실에 가까운 추측과 함께 고민에 빠졌다. 딱하고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다.

“역시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네. 너는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아네타는 결론을 내린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고 없는 움직임에 놀란 바론에게 대기를 명한 그녀는 책상으로 가 인장을 챙긴 뒤 집무실을 나섰다.

레녹스를 벗어난 아네타가 향한 곳은 황제 궁이었다.

아네타는 앞을 막아선 기사들에게 용건을 전했고, 곧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제국의 자비로운 영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늘 해 왔던 대로 인사를 올리는 그녀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한 기미를 느낀 건 칼로스뿐만이 아니었다. 러셀 역시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무슨 일인가 싶어 칼로스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는 거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두 남자의 소리 없는 대화는 아네타가 허리를 펴는 순간 마무리되었다.

“그래. 듣기로는 광산에 대해 할 말이 있다던데. 무슨 일이지?”

안 그래도 러셀 역시 그녀의 광산과 관련한 거래에 대해 할 말이 있던 참이었다.

우선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보고 이야기를 꺼낼지 말지 결정하기로 마음먹은 러셀은 들려올 말을 기다렸다.

“제가 감히 황제 폐하께 거래를 청하고자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