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칼로스 외전_그 남자 (3)
칼로스의 승낙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앉은 자리에서 갖가지 세부적인 조건들을 정했다.
상대의 평판에 누를 끼치지 말 것, 바람피우지 말 것, 계약혼으로 인해 알게 된 상대의 정보를 누설하지 말 것, 서로가 내건 조건들을 한 달 내에 이행할 것 등.
혼인하는 사람은 둘이지만, 조건은 러셀을 포함한 세 사람의 것이었다.
무엇보다 아네타는 이혼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황제조차 이혼을 막지 못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때, 그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가 가진 것들을 이용하고, 때가 되면 각자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그보다 깔끔한 마무리는 없었기에 칼로스는 아네타의 뜻을 러셀에게 전했고, 허가가 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러셀이 한참이나 웃음을 멈추지 못한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칼로스만이 아는 일이었다.
본래 한 쌍이었던 것들의 짝이 들어맞듯 이해타산이 일치하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음에도 주저하는 건 일이 마무리되는 기점을 늦출 뿐이었다.
칼로스는 아네타와의 혼인을 공표했고, 날짜는 두 가문의 집사가 기함할 정도로 빠르게 잡혔다.
소식은 굳이 퍼트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발이라도 달린 듯 제국 전역에 퍼졌다.
혼인 이후에는 러셀이 말한 것과 같은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배우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고, 다른 이가 비집고 들어올 만한 틈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순조로워.’
칼로스는 자신이 찾은 평화에 보답하듯 아네타가 가문의 실권을 찾아오는 일을 도왔다. 그와 더불어 호의를 베풀면서도 그것을 권리로 여기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머지않아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아네타는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지 않았다. 꼿꼿이 목표한 바를 향해 나아가는 그녀를 보며 칼로스는 저도 모르는 새에 경계를 풀었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파생되었다.
너무도 안심한 나머지, 제 마음에 생각지도 못한 틈이 생겨 버렸음을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변수를 깨달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녀를 겪으면 겪을수록 그의 마음에 생긴 틈새는 자꾸만 그 몸집을 불려 갔다.
“전하, 마님께서 또 사용인들에게 약재를 들려 보내셨다고 합니다.”
“비용은 이번에도 사비로 지불했나?”
“예. 공작가로 돌릴 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대금 지불을 끝내셨습니다.”
아네타의 소비 방식은 사치에 치중되어 있는 여느 귀족들과 달랐다.
그녀는 복지부에 할당된 예산을 빼돌리기는커녕, 사비를 들여 더 많은 액수의 예산을 확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면모는 공작가 사용인들의 사정을 살피는 일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아네타는 사용인의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약재를 구해다 건넸고, 가계가 어렵다 싶으면 필요한 생필품들을 지급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가주의 부인을 위해 지급되는 품위 유지비마저 거부했고, 철저히 자신의 재산만을 사용했다.
공작가의 재산을 사용해도 좋다는 말을 건네도 돌아오는 건 언제나 거절뿐이었다. 그것이 선을 긋는 행동임을 칼로스는 모르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그 명확한 선이 달갑기만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서운한 마음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티낼 수조차 없어 혼자 속 끓이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드리운 선은 언제나 그에게만 매섭게 그어지곤 했으니까.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지?”
“두 시간 전부터 서재에 계십니다.”
예상했던 답이 들려오자 칼로스는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아네타를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
목적지를 눈치챈 린든이 당연하다는 듯 그 뒤를 따르려 했으나, 칼로스는 따라올 필요 없다는 말을 남기고 홀로 걸음을 옮겼다.
서재는 그의 집무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노크를 생략한 뒤 안으로 들어서자,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이 그를 반겼다.
아네타는 칼로스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양피지에 무언가를 메모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야 뻔했다.
‘보나마나 또 선대 공작들이 발티모어를 이끌었던 기록 같은 걸 보고 있겠지.’
칼로스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살핀 책의 내용은 역시나 그의 선대들이 남긴 기록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어릴 때 이후로 한 번도 펼쳐 본 적이 없었다.
아네타가 칼로스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맞은편에 선 그가 책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기울였을 때였다.
제 앞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그제야 집중이 깨진 아네타는 고개를 들었다.
“공작 전하.”
고저 없는 음성이 저를 부르자, 칼로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사비를 써서 사용인들에게 약재를 들려 보냈다고 들었는데. 그런 일이라면 공작가에 청구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는 그 말을 번번이 거절했었죠. 순전히 자기만족으로 행하는 일이니 신경 쓰실 필요 없다는 분명한 의사 표현과 함께요.”
“이대로 가다간 부채감이 남아서 당신이 원하는 그 깔끔한 마무리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아네타가 칼로스의 말에 미간을 좁히는 것은 잠시였다.
그녀는 곧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뱉었다.
칼로스는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답과 동떨어진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정 그러시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돈이 아닌 다른 걸로 지불해 주시면 될 것 같네요.”
역시나 들려온 것은 기다리던 수긍이 아닌, 또 다른 요구였다.
“다른 것?”
“네. 마침 원하는 게 생겼거든요.”
“……일단 그게 무엇인지 들어보고 결정하도록 하죠.”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에서 처음으로 기대가 읽혔지만, 칼로스는 섣부른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아네타는 실망하기는커녕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 있던 책을 들어보였다.
“제가 바라는 건 공작 전하의 경험이에요. 말씀하셨던 대로 이 책의 기록들, 전부 읽어 봤지만 별다른 도움이 안 돼서요.”
“그러게. 내가 봐도 소용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간절하면 한낱 미물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고, 소용없다고 말하는 것이라도 한 번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법이니까요. 부족한 경험을 충당해야 하니 안 읽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확실히 참고는 되지만 그뿐이에요. 시대상이 달라도 너무 달라요.”
칼로스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황위에 올랐던 황제들과 달리, 이번 대의 황제인 러셀은 보다 진취적인 성향을 지녔다.
때문에 이전의 기록은 그의 통치 방식과는 맞지 않았다. 칼로스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록 열람을 청하는 아네타에게 추천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친 것은 그래서였다.
“그래서 대가로 내가 쌓은 경험들을 공유해 달라?”
“네.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그렇다면 응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할 겁니다.”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가야 하는 상대도 아니었으니 어려울 건 없었다.
칼로스는 개인적인 호감보다, 아네타가 지금껏 보인 노력과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높게 샀다.
무엇보다 러셀이 탐내는 인재이니 가진 경험과 지식을 나누어 주어도 상관없겠다는 계산 아래, 칼로스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아네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때의 그는 몰랐다.
지금 이 일을 시작으로 자신의 지독한 짝사랑의 서막이 오른다는 사실을.
***
과연 러셀이 높게 평가하는 인물답게 아네타는 하나를 가르치면 둘, 셋을 알았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훌륭한 학생을 만나면 의욕에 불이 붙기 마련이었고, 칼로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종국엔 아네타보다 더 욕심을 내어 자신이 터득하거나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쳐 줄 만큼 칼로스는 열의를 보였다.
하지만 그 열기가 다른 쪽으로 옮겨붙은 것에는 그의 의도가 단 한 점도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하나만 더’ 하며 함께 있는 시간이 늘다 보니 이미 벌어져 있던 틈새는 어느새 하나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작은 습관 하나, 뺨 위에 올라앉은 머리카락 한 올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칼로스는 자신의 감정을 착각하지 않았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자각한 변수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번진 화마처럼 맹렬하게 그의 심장을 달구었다.
칼로스는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조금의 꾸밈이나 감춤 없이 있는 그대로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나 칼로스의 표현이 거침없어질수록 그를 대하는 아네타의 태도는 더욱 매몰차게 변해 갔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이 꺾이지 않은 건 아네타가 순간순간 내비치는 감정들 때문이었다.
냉정한 척 돌아서다가도 그가 상처받았을까 걱정하며 한 번씩 뒤돌아보는 상냥함이 좋았다.
가혹하리만치 밀려드는 책임과 본분에 짓눌리면서도 자신이 정한 방향을 잃지 않는 대쪽 같은 모습이 좋았다.
외면보다 그의 마음을 더 아프게 찔러드는 것은 그녀의 위태롭지만, 위태롭지 않은 모습들이었다.
아네타는 자신의 감정을 습관적으로 감추는 사람이었다. 칼로스는 오랜 관찰 끝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보이는 상냥함을 붙들고 끊임없이 다가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칼로스는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아네타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서로 말을 놓아야 더 친밀해 보일 거라는 주장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작은 틈 하나라도 생길라치면 능청스레 비집고 들었다.
하지만 결국 오지 않길 바랐던 끝이 찾아왔다. 현실을 부정하고 또 부정해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네타는 약속된 기한이 끝나는 즉시 이혼 서류를 접수했다. 그리고 그것이 수리되자마자 아무 미련 없다는 듯 짐을 꾸려 공작저를 나갔다.
그 이후로는 전해지는 소식이 없어, 칼로스는 타는 속을 애써 달래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곧 들려올 아네타의 소식을 기다렸다.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났으니, 이제는 제대로 된 관계로 다가갈 차례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아네타는 끝까지 그에게 매몰찼다. 칼로스는 린든이 전해 온 소식에 잠시간 말문을 잇지 못했다.
“방금, 뭐라고 했나?”
“그것이…… 마님께서 잠시 제도를 떠나신 것 같습니다.”
“떠나다니, 아네타가 왜? 언제, 어디로 간 거지?”
그가 느끼는 당혹감은 두서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린든은 눈에 띄게 동요하는 주인을 보며 안쓰러움을 느끼면서도 묻는 말에 착실히 답했다.
“듣기로는 오늘 아침 일찍 떠나셨다고 합니다. 목적은 단순한 여행이며, 여행지는 리테아인 것 같습니다.”
“리테아…….”
칼로스는 아네타가 떠난 곳의 지명을 읊조리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네타라면 분명 밀린 후작가의 일부터 처리할 줄 알았는데. 예측을 벗어난 행보를 전해 듣자 허탈감이 그의 등허리를 타고 올랐다.
그 이후, 칼로스는 한동안 깊은 상실감에 빠져 살아야 했다. 그는 열병을 앓는 순간에도 아네타가 남기고 떠난 결혼반지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러다 열병으로 흐렸던 정신이 점차 맑아지자, 칼로스는 또 한 번 기약 없는 기다림을 다짐했다. 이대로 영영 잠겨 죽을 것 같은 제 사랑을 거듭 한탄하면서도, 제게 주어진 길은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이.
그리고 그 정처 없는 기다림 끝에, 칼로스는 제도로 돌아온 아네타와 마주할 수 있었다.
“칼로스.”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넝마가 되었던 가슴이 또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프도록 선명한 감정의 이름은, 여전히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