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칼로스 외전_그 남자 (2)
클로린 공작가의 안주인은 누군가가 감히 맞설 수 없는 위치에 선 고매한 사람이었다.
공작부인의 권력을 이루는 것들은 하나 같이 굵직했다.
명예로는 영광의 가문에 버금가는 친정부터 공작부인이라는 지위, 황실의 내정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까지. 무엇 하나 가벼이 여길 만한 것이 없어 현재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런 인물이 언급되자 칼로스는 러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오래 함께 할 필요도 없어. 결혼 유지 기간을 정해 두고 때가 되면 이혼하면 된다.”
요즘 세상에 이혼은 흠도 아니었다. 특히나 귀족 사회에서는 중매혼부터 계약혼, 정략혼 등이 판을 치기 때문에 연애혼이 대다수인 평민들보다 귀족들의 이혼 신청 횟수가 월등히 많았다.
문제는 이혼 자체보다 그 이후에 있을 일이었다.
“그 뒤에는 어쩝니까.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 자명한데요.”
칼로스는 자신의 신분이나 손에 쥔 힘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혼 뒤에는 후처 자리를 노리고 또 한 번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데에 가진 재산 전부를 걸어도 좋았다.
“그때도 마찬가지지. 그 대단한 여자가 앉았던 자리를 감히 네가 채울 수 있을 것 같으냐는 식으로 거절하면 더 붙들고 늘어질 재간이 없을 것 같은데.”
“그 ‘대단한 여자’ 역할을 할 사람이 제국에 있기는 합니까?”
“왜 없겠나. 딱 한 사람 있지.”
“그게 누굽니까?”
“아네타 아데나워.”
혼인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아네타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지만, 설마 러셀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다.
칼로스는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의문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데나워 후작가는 귀족파에 가까운 중립입니다. 게다가 선대 후작인 데릭 아데나워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런 자가 버티고 있는 집안에 또 다른 권력을 쥐여 주는 건 너무 위험한 일 같은데요.”
데릭은 지금만 해도 제 가문이 제국 최고의 재력가 가문이니, 영광의 가문이니 하며 떵떵거리고 살고 있었다. 딸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공작 사위를 두게 되면 일어날 일이야 불 보듯 훤했다.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지금보다 더한 패악을 부리고 다니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달라지지 않는 판단에 칼로스는 부정적인 반응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데나워 후작에게 중립에서 이쪽으로 적을 옮기라는 제안을 하려고 했다. 그리고 데릭 아데나워가 패악을 부린다 해도 얼마 가지 못하겠지. 당장 딸인 아데나워 후작부터가 누구보다 선두에 서서 실권을 죽이려 하는데 어느 누가 그걸 받아 줄까.”
패악을 부린다 해도 두고 보기만 할 아네타가 아니었다. 러셀은 여차하면 자신이 나서면 된다고 말하며 문제가 될 건 없다고 말했다.
“아데나워 후작이 그리도 마음에 드십니까?”
러셀답지 않은 결정이라고 칼로스는 감히 말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리도 적극적으로 나오는 걸까.
“그 아비만 제외하면 네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상대니까. 귀찮은 일까지 감수해서라도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인재이기도 하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어떻게 그런 딸이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에 칼로스는 동의했다. 고민의 기색을 비치던 그는 물었다.
“후작에게 제안은 하셨습니까?”
“아직이다. 하지만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지. 데릭 아데나워와 관련된 일을 돕겠다고 제안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한 번 만나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의외군. 제안을 하면서도 바로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너도 후작이 마음에 들었던 거냐?”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말꼬리를 흐린 칼로스는 아네타가 데릭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그때 아네타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적어도 다른 이들과 달리 부정을 저지를 사람 같지는 않아 보여서요.”
처음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혹시 모른다는 가정을 두긴 했지만, 아네타 아데나워는 애초에 러셀이 털어서 먼저 하나 안 난다는 이유로 장관 자리에 앉힌 사람이었다.
같은 영광의 가문인 데다, 아데나워라면 이혼을 해도 아쉬울 게 없을 테니 함께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뜻이 맞는다는 전제하에.
“그래. 그럼 자리를 한 번 마련해 보도록 하지.”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
혹자는 말했다. 아네타 아데나워는 가진 돈을 모두 죽을 때 싸 들고 가려는 모양이라고. 그런 류의 헛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올 정도로 아네타는 불필요할 만큼의 과도한 사치는 하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이 나라를 가진 황제라도 되는 양 돈을 써 대는 제 아비와는 다르게 말이다.
새파랗게 젊은 여성 후작이 장관직에 오르는 것에도 많은 말들이 떠돌았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정치란 남성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이 깨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던 까닭이다.
때문에 당연하다는 듯 권리를 누려 오던 이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겨우 스물하나 먹은 딸뻘의 여성이, 그것도 이미 성인이 되자마자 제국 최고의 재력을 쥔 이가 장관직까지 차지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또한 마땅히 경계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러셀은 그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보여 주었다.
그들이 장관직에 올라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아네타와 함께 후보에 세운 뒤 비리를 낱낱이 밝혀낸 것이다.
결과야 뻔했다. 아네타를 제외한 모두가 크고 작은 비리를 저질렀고, 장관직은 자연히 아네타에게로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난 이들이 곧이어 걸고넘어진 것은 아네타의 자질이었지만, 그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남은 인원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보임으로써 잡음이 나올 구석을 없애 버린 것이다.
칼로스는 그런 아네타의 행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러셀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지 않은 것에는 그러한 이유도 한몫 단단히 했다.
그렇다고 혼인이란 말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칼로스는 어깨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단어에 심적인 부담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같은 부담을 품고 있을 상대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렸다. 그 간결함에 이어 들려온 것은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공작 전하. 아네타 아데나워입니다.”
“들어오세요.”
칼로스가 만남을 원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아네타는 시간에 맞추어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 일이 있은 뒤 처음 보는 얼굴에, 칼로스의 시선이 저절로 그녀의 뺨으로 향했다. 맞은 자리 그대로 붉게 달아올랐던 뺨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하얀 빛을 되찾았다.
시일이 지났으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칼로스가 의미 모를 안도를 느낄 동안, 아네타는 감출 이유 없다는 듯 곧게 닿아 오는 시선을 알아차렸다.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는 아네타는 눈치챈 바를 감추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에요. 그러니 전하께서 그쪽까지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글쎄요.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짧게나마 부부로 지내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는 신경 써야죠.”
아네타의 입에서 선을 긋는 말이 나오자, 칼로스는 그 말이 묘하게 거슬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확정되지도 않은 일을 들먹인 것은 모두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스스로의 행동이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이의 태도가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무덤덤한 까닭이다.
이런 일이 익숙해질 때까지 그녀는 얼마나 많은 전쟁을 겪었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그로서는 감히 가늠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어째서 상대가 나라는 걸 알면서도 이 자리에 나온 겁니까?”
“그날, 그 일을 보신 분이라면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아네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칼로스가 무슨 뜻이냐는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제 아버지인 데릭 아데나워가 했던 협박, 기억하시죠. 저는 그걸 저지하기 위해서 폐하께서 제안하신 계약혼에 응하려고 해요.”
“이 혼인이 그 협박에 대한 대응책이 된다는 겁니까?”
혼인이 성사된다면 그녀는 발티모어와 귀족 사회에서 더 높은 지위를 얻게 될 뿐, 아데나워가의 내부에서는 별다른 변화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성이 바뀐다면 외려 출가외인으로 몰려 작위를 포기하라는 강요가 돌아올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혼인까지 감행하려는 이유가 뭘까. 아무리 봐도 그녀가 아데나워를 포기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칼로스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보통 가문의 재산은 가주가 집안의 가솔들에게 나누어 주는 식으로 분배가 되죠. 하지만 아데나워는 아니에요. 돌아가신 조부께서 아버지에게 작위를 물려주기 전, 모든 재산은 ‘가주에게만’ 귀속된다고 가문의 규율을 바꾸셨거든요. 아마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셨던 거겠죠.”
가주의 권한으로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규율이었지만, 아네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데릭의 숨이 다할 때까지는.
데릭은 실무에 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아는 것이라고는 어떤 식으로 돈을 써야 더 사치스러워 보이는지 뿐이다. 아네타는 스스럼없이 그와 같은 데릭의 무지를 밝혔다.
“아는 것이 없으니 보이는 게 있을 리 만무하죠. 아버지는 자신이 가주 자리를 팽개치는 순간,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이 제게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아마 알게 되는 즉시 항의하겠지만, 어쩌겠어요. 폐하께선 이미 제 손을 들어주시기로 약조하셨는데.”
잠시 숨을 고른 아네타는 그가 물었던 작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혼인 기간 동안 후작 작위와 공작부인의 지위, 둘 모두를 유지할 수 있도록 러셀이 도와주기로 했다고.
그러자 상황 파악이 끝난 칼로스가 확신을 담은 물음을 건넸다.
“그럼 폐하께서 후작의 손을 들어주기로 한 조건은 보나마나 이 혼인이겠군요.”
“네. 폐하께선 지금 제가 아버지 수중에 있는 철광산을 빼앗아 오길 바라고 계시거든요.”
데릭을 도와 보다 싼 가격에 철을 사들인다는 선택지를 택할 수도 있는 러셀이었지만, 그는 아네타의 손을 들어주고자 했다. 그는 결코 불온한 자와 타협하는 이가 아니었기에.
칼로스는 그러한 러셀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게다가 제 아버지는 다른 건 몰라도 신분제 무서운 건 알고 있는 분이라서요. 그러니 이 혼인은 제가 오롯이 혼자 설 수 있을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인 셈이죠.”
“발티모어의 뒤에 숨어 시간을 벌겠다?”
“숨겠다는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네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발티모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이용하고 싶어요.”
스스럼없이 건네어진 말에 칼로스는 잠시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아네타를 응시했다. 이윽고, 꼿꼿했던 고개가 한 차례 앞뒤로 움직였다.
“그래요. 좋습니다. 이 혼인, 진행하는 걸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