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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27화 (27/122)

27화. 칼로스 외전_그 남자 (1)

일찍이 황제의 오른팔로 자리매김한 스물셋의 젊은 공작은 명실상부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정계의 세대교체가 빠른 에스테반 제국에서도 걸핏하면 칼로스 발티모어라는 이름이 회자가 될 정도였으니 그 이름값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명예, 재력, 무력.

그 모든 것을 갖춘 이를 주변에 있는 자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 만무했다.

탐욕스러운 귀족들은 어떻게든 칼로스에게 줄을 대어 보고자 갖은 수작을 벌였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야 뻔했다.

미혼인 칼로스는 밀려드는 청혼서와 미인계에 시달렸다.

많은 이들이 얼음장 같은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는 상상을 하며 육탄 공세를 펼쳤다. 어떤 이는 조금만 반반하다 싶으면 제 자식은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그의 앞에 들이밀었다.

하나같이 성별을 불문하여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공작부인이라는 타이틀을 노리는 이들이 칼로스에게 몰려드는 건 당연했다. 제국에 둘 밖에 없는 공작 중 클로린 공작은 일찍이 혼인을 하여 부인은 물론 자식까지 있었으니까.

자연히 희망을 걸 곳은 칼로스 하나였지만, 그들은 머지않아 깨달았다.

열 번, 스무 번을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칼로스 발티모어일 거라고.

그러나 깨달음과 포기는 별개의 문제였다. 겨우내 잠시 잦아드는가 싶더니 날이 풀리기 무섭게 또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꽃이 봄의 숨결을 입고 피었다고 해서 없던 사랑마저 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를 모르는 잡초처럼 끈질기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에 철저한 무시로 대응하던 칼로스의 인내심은 극에 달했다.

한창 서류를 보고 있어야 할 시간에 레녹스를 나와 인적 없는 곳을 찾아든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칼로스는 소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녹음이 우거진 길로 들어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주변을 훑던 눈에 아릿한 통증이 번졌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피로가 누적된 눈가를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건조해져 이물감이 느껴지는 눈을 풀어 주며 떠올린 것은 매일 다른 이름으로 쏟아지는 청혼서였다.

칼로스는 그것들을 전해 받는 즉시 반으로 갈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정도를 모르고 달려드는 이들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이러다 귀족가 영애들 이름은 죄다 청혼서에서 보게 생겼군.’

칼로스는 가까스로 한숨을 삼키며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던 찰나, 불어오는 바람에 봄 특유의 풋내가 훅 끼쳐 왔다.

그와 함께 실려 온 것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무슨 용건으로 영지에서 이곳까지 찾아오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세요.”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작지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칼로스는 자신이 찾아든 곳에 다른 이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자리를 뜨려 했다.

곧 이어 들려온 또 다른 이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다른 게 아니라, 네가 루칸 백작의 뒤를 좀 봐줘야겠다.”

루칸 백작이라면 전 노동부 장관이었으나 비리로 인해 해임된 자였다. 그런 자의 뒤를 봐주라니. 쉬이 넘길 수 없는 말에 떠나려던 발길을 돌린 칼로스는 기척을 죽이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를 봐주라니요?”

“장관직 복귀를 도우라는 말이다.”

굵은 나무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그 너머를 응시하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부정을 요구하는 이는 일 년 전 작위를 팽개치고 영지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데릭 아데나워였다.

그를 알아보자 뒷모습만 보이는 여성의 정체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같이 있는 여자는 딸인 아네타 아데나워겠군.’

아네타 아데나워. 전 복지부 장관이 루칸 백작과 동일한 사유로 장관직을 박탈당하자 러셀에 의해 공석이 된 자리를 맡게 된 여자.

능력이 출중하다는 사실은 두 달이라는 부임 기간 동안 간접적으로 겪어 알고 있었지만, 글쎄.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녀의 정치 생명은 끝날 수도 있었다.

‘이번 복지부 장관도 비리로 해임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황제가 직접 지목하여 장관직에 오른 만큼 그녀마저 비리로 해임된다면 황제의 위신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무거운 일인 만큼 칼로스는 속단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제가 왜 그래야 하는 거죠?”

“왜냐니. 당연히 가문을 위해서지.”

“이제 와서 가문을 위하는 척 말씀하시니 듣기 거북하네요. 제가 보기엔 아버지는 그저 그들이 발밑에서 설설 기는 꼴이 보고 싶으신 것 같은데요.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도움을 빙자해서요.”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아네타가 내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입에 칼을 문 듯 날카로웠다.

칼로스는 문득 저들 부녀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말이 돌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데릭 아데나워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그를 좋게 볼 수는 없으리라.

지금만 봐도 그랬다.

“내 도움을 받았으면 당연히 알아 모셔야지. 너는 잔말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루칸 백작의 복귀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란 말이다.”

“싫습니다.”

“뭐라고!”

거절이 들려오기 무섭게 데릭은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낸 소리에 놀라 주변을 둘러본 것은 그다음이었다.

어렵지 않게 데릭의 눈을 피한 칼로스는 다시금 상황을 살폈다.

“너,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싫다고 했어요. 저는 그따위 더러운 짓, 하고 싶지 않거든요. 특히나 당신을 위한 일이라면 더더욱. 비리를 저질렀으면 응당 정계에서 손을 떼야죠.”

흡사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데릭의 음성에도, 아네타는 흔들림 없이 맞섰다. 그에 데릭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윽고 찢어질 듯 날카로운 마찰음이 사위를 울렸다.

칼로스는 잠시 휘청거리다 중심을 잡는 아네타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뛰쳐나갈 뻔했던 몸을 간신히 붙들었다.

투박한 손으로 여린 뺨을 내려친 데릭은 사납게 뜬 눈으로 제 딸을 노려보았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당당하게 턱을 치켜드는 모습에 칼로스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어느새 아네타를 향한 의심은 사라졌다.

지금은 그저 아비라는 이유로 그를 상대해야 하는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하.”

기가 차다는 듯 터져 나온 헛웃음에서 그녀의 감정이 짙게 묻어났다.

칼로스는 반동으로 돌아간 고개로 인해 아네타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다.

통증 때문인지 푸른 눈동자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아네타는 데릭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인지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한 것은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반면교사라는 말, 아시죠? 당신은 내게 있어 그런 존재예요.”

아네타는 데릭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기세는 뺨을 맞고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매 순간 아, 나는 절대 저렇게 더럽게 살지 말아야겠다, 하고 다짐을 거듭했죠. 내가 당신에게 배운 건 그게 전부예요.”

겁을 먹고 수그리기는커녕 더욱 담대해진 태도에 데릭의 눈에 핏발이 섰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니 더는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도 마시고요.”

“건방진 것! 내 대신 서류 처리나 하라고 그 자리에 앉혀 놨더니 밑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군! 내가 이 따위 것을 딸이랍시고 작위까지 물려주다니!”

칼로스는 데릭이 다시 손찌검을 할 낌새를 보이면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아네타에게 차마 들어줄 수 없는 폭언을 쏟아 내며 씩씩댈 뿐이다.

그리고 그 끝은 협박성이 짙게 베인 경고였다.

“너는 내가 모든 것을 넘겨주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오늘 이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마.”

“네. 마음대로 하세요. 저도 가만히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겁을 주려는 의도와 달리, 아네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맞서는 것을 보니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대책을 마련하러 가 봐야겠네요. 부디 안녕히 돌아가시길.”

아네타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데릭과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말하는 동안에도 통증을 참아 내고 있었던 것인지, 돌아선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제 그만 긴장을 놓을 법한데도 아네타는 이를 악물며 고집스레 버텼다. 하얀 뺨 위로 붉게 새겨진 손자국이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왜인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아네타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놀라움에 크게 뜨여진 눈이 정확히 그를 향했다.

칼로스는 아네타가 알은척을 한다면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켕기는 게 있는 쪽은 데릭이었으니 그가 몸을 숨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칼로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눈인사만 건넨 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칼로스는 가만히 서서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끝내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칼로스는 아데나워 부녀가 자리를 뜨는 즉시 러셀을 찾아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해 보고를 올렸다.

러셀은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공기를 가르는 마찰음, 눈물을 참으며 맞서던 아네타, 그리고 저열하기 짝이 없는 협박까지. 그 모든 것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칼로스는 조용히 찻잔을 기울였다.

‘지금껏 잠잠한 걸 보니 잘 해결된 건가.’

그때 보았던 모습이 머릿속에 강렬히 각인된 탓일까. 그는 답지 않게 타인의 일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굳이 사람을 써서 상황을 알아보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지금처럼 때때로 그때의 상황을 되짚을 뿐이었다.

그런 아우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러셀은 어느 순간 입매를 말아 올렸다. 뒤이어 예고 없는 물음이 던져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다시 청혼서가 밀려들고 있다지. 어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있더냐?”

“없습니다. 그보다, 형님께서도 제가 혼인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어째서 당신마저 혼인에 대해 언급하느냐는, 원망은 물론 배신감까지 엿보이는 시선이 제게로 꽂히자 러셀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바란다기보다는 네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기 때문에 묻는 거다.”

“청혼서를 피하기 위해 혼인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때마침 적합한 혼처가 하나 있기도 하고.”

딱히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니지만 러셀의 말대로 방법은 그뿐이었다. 그가 혼인을 하거나 실각을 하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테니까.

“하지만 혼인을 해도 청혼서 외의 다른 문제는 막을 수 없을 텐데요.”

“그러니 더더욱 그네들이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을 곁에 두어야지. 이미 선례도 있지 않느냐.”

“선례라니요?”

대답을 기다리는 칼로스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에 러셀은 가벼운 투로 응수했다.

“클로린 공작 말이다. 공작에게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애처가라는 소문이 파다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인인 바네사 클로린 역시 상당한 권력가이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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