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잿빛의 계절 (3)
여자가 내보인 목걸이는 아네타의 조모인 카르사 아데나워가 엘레나에게 물려 준 유품이었다.
아네타가 엘레나로 하여금 힘든 나날을 버텼듯, 엘레나도 카르사에게 기대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엘레나가 목에 거는 것조차 망설일 정도로 아끼던 목걸이. 아네타가 그것의 부재를 깨달은 건 장례식 이후였다.
정신이 한계치까지 몰려 목걸이까지 챙길 겨를이 없던 아네타는 뒤늦게 목걸이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불길에 녹아 사라졌다고 여겼다.
그랬는데,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물건이 처음 보는 여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걸 가지게 된 경위를 말해, 당장.”
“그분이 직접 제 목에 걸어 주신 거예요.”
차가운 불길이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거칠게 피어오르자, 칼로스가 어깨를 잡아 왔다.
“아네타.”
익숙한 울림과 목소리에 아네타는 깊은 숨을 내쉬며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목걸이가 사라진 과정은 예상과 달랐지만 범인은 같았다. 아네타는 이미 죽고 없는 이에게 살심을 품었다.
“그게 어떻게 증거가 된다는 거지?”
“이게 죽은 안주인의 목걸이라면서요. 그분은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이걸 주면서 말했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날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엘레나가 언급되자 아네타는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여자의 입에서 엘레나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는 그 모습을 저 좋을 대로 해석했다. 아네타가 제 말에 반응했다고 생각한 여자는 여세를 몰기 위해 재차 입을 열었다.
“또 각하께서는 저와 만날 때마다 옆 대륙 왕비가 즐겨 먹는다는 값비싼 과일을 구해다 주셨어요.”
“과일?”
모트는 아네타의 눈길이 제게로 향하자, 서둘러 기억을 더듬었다.
“푸른색에 포도와 흡사하게 생긴 작은 과일이었습니다, 각하. 이름이…….”
“혹시 벨베너인가?”
“예.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칼로스는 모트가 말한 특징으로 데릭이 구해다 준 과일이란 게 무엇인지 알아냈다.
벨베너. 아네타 역시 그 이름을 모르진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여자에게 그때마다 그것을 먹었냐고 물었고, 곧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분이 저를 위해 구해다 주신 데다 손수 먹여 주시기까지 하니 어찌 거절할까요. 당연히 먹어야지요.”
여자는 거들먹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오직 저만을 위한 것이다. 그리 착각하는 그녀에게 모트가 찬물을 끼얹었다.
“아닙니다. 데릭 님께서는 잠자리를 함께 한 모든 이에게 같은 걸 먹이셨습니다.”
“남은 게 있나?”
“예. 소량에 불과하지만 아직 남아 있습니다.”
모트에게 하문하던 칼로스는 아네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실물을 보고 판단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내 생각도 같아.”
“지금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네타의 긍정에 바론이 발 빠르게 나섰다. 그리하여 대령된 것은 고작해야 검지만 한 길이의 과일이었다.
모양새는 모트의 설명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유심히 살피던 칼로스는 오래 지나지 않아 확신 어린 얼굴로 단언했다.
“벨베너가 맞아. 확실해.”
어쩐지. 그리 씨를 뿌리고 다님에도 사생아 하나 나타나지 않는다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다.
아네타는 언젠가 데릭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내 재산을 축낼 자식은 너 하나로 충분하다. 그리 말했던 것 같다.
그 말이 이런 뜻이었다니.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해졌네. 우리 가문에 사생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거.”
“그 과일이 뭐길래 그런 결론을 낼 수 있는 거죠? ……설마!”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던 얼굴이 불현듯 떠오르는 가정 하나에 의해 굳어졌다.
“그 설마가 맞아. 벨베너의 과육은 피임약 그 자체니까. 가격대가 상당한 건 그만큼 효과가 확실하기 때문이고.”
지출 내역서에 벨베너라는 이름이 없었던 이유도 짐작이 간다. 다들 과일로만 알고 있었으니 식자재 값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왕비가 즐겨 먹는다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야. 피임을 목적으로 자주 찾는다는 말이 있으니까.”
왕비 슬하에 자식만 다섯이라 왕위 다툼의 규모가 커지는 걸 막기 위해 본인 스스로 택한 일이다. 아는 이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걸 몰래 먹이면서까지 피임에 공을 들인 이가 임신 사실을 알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청혼까지 했다? 어불성설이지.”
자연히 목걸이를 받게 된 경위 역시 거짓이 되었다. 여자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데릭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허락 없이 약을 먹이는 사람이나, 아니라는 걸 알면서 아이를 이용해 사기를 치려는 사람이나. 모르긴 몰라도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이럴 수가…….”
궁지에 몰린 여자에겐 더는 거짓 주장을 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제 손으로 무덤을 팠다는 생각에 망연자실한 여자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 충격에 잠에서 깨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요란스레 울려 퍼졌지만, 달랠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당사자가 죽고 없으니 분명 성공할 거라고 믿었다. 가주가 저보다 어린 여자라 우습게 본 것도 있었다.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순진하기 짝이 없는 귀족 여인을 상상했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달랐다.
여자는 식은땀이 얼굴선을 타고 흐르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살이 에일 듯 살벌한 기세가 온몸을 찔렀다.
“주변에 같은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가 있다면 부디 전해 주길 바라. 난 이미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있으니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아네타는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을 벌이는 이가 있다면 가진 힘을 모두 이용해서라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아, 목걸이는 돌려받고 싶은데.”
“안 돼, 이건 이제 내 거예요!”
절망하던 여자는 목걸이가 언급되자 빼앗길 수 없다는 듯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한 팔로 대충 안아 든 아이보다 목걸이를 더 중히 여기는 모습에 아네타는 혀를 찼다.
“얼마를 원하든 내어 줄 테니 내게 팔아.”
다른 방법이야 있겠나. 아네타는 거래를 제안하며 반응을 살폈다. 탐욕스레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동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주실 건데요?”
아이를 사생아로 속이는 건 실패했지만, 평생 놀고먹을 돈을 쥘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새 기가 살아난 여자는 기대 어린 음성을 냈다.
“아네타. 정말 사려고?”
“사야지.”
칼로스가 여자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네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격을 제시했다.
“시가의 열 배. 그 정도면 만족할 수 있겠지?”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여자는 어떠냐는 물음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옆에 있는 칼로스가 방해라도 할세라, 흥정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모트. 이 여자에게 돈을 내어 줘.”
모트는 즉시 지시를 이행했다. 금화로 가득 찬 주머니를 확인한 뒤 목걸이를 건넨 여자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아네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목걸이를 얻게 된 진짜 경위를 물었다. 그에 대한 값 역시 치르겠다는 말에 여자의 입은 쉽게 열렸다.
데릭이 엘레나의 목걸이를 처분하지 않은 건 아네타의 목줄을 쥐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네타가 엘레나를 완전히 잊은 것처럼 행동했기에, 데릭은 그걸 적선하듯 여자에게 주었다고 한다.
더는 가치가 없다.
그가 그리 투덜대었다고 말한 여자는 추가로 건네어지는 돈주머니를 받아들기 위해 안고 있던 아이를 기사의 품에 떠넘겼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지만, 그 미소는 얼마 가지 않았다. 여자가 기쁨을 만끽할 시간을 주던 아네타는 무심한 어조로 그것을 산산조각 냈다.
“바론. 내가 떠나는 즉시 저 여자를 고소해서 방금 건넨 돈, 한 푼도 빠짐없이 회수해 와.”
옥살이를 시킬까 했지만 죄 없는 아이를 봐서 벌금형으로 결정지었다. 사기를 치려던 것에 이어 건방진 언행까지 거듭했으니 그냥 넘어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죄목은 귀족 능멸죄와 사기죄 정도가 적당하겠어.”
아네타는 영지 기사의 손에 붙들려 악을 써 대는 여자를 뒤로한 채 마차에 올랐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퍼붓는 악담에도 개의치 않은 그녀는 그대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를 이끄는 두 마리의 백마가 잘 닦인 길 위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답답함에 못 이겨 열어젖힌 창문으로 바람이 밀려들었다.
빈 공간을 비집고 돌던 바람이 길게 늘어진 금빛 머리카락을 휘감아 올리자, 칼로스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네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사건 사고에 지친 그녀는 피로에 젖은 눈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시선이 얽힌 가운데, 위로가 필요하느냐고 물으려던 칼로스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무의미한 질문은 필요 없었다. 지금은 그저 그녀를 안아 주고 싶을 뿐이었다.
“안겨.”
그러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마차가 출발한 이후 좀처럼 말이 없던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입은 안기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눈으로 하는 말은 조금 달랐다.
나 좀 안아 줘.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전했다.
“이럴 땐 안아 달라고 하는 거야.”
“싫으면 말아.”
“싫다는 말은 안 했어.”
칼로스는 너무도 그녀다운 말이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옮겼다. 아네타는 단단한 팔이 상체를 휘감아 오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지쳤어.”
잔뜩 헤집어진 마음은 풍랑이 막 가라앉은 바다처럼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다잡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지긋지긋해. 다 그만두고 싶어.”
애써 덤덤한 투로 이어붙인 말들은 단편적이었다.
칼로스는 채근 없이 이미 밀착해 있는 그녀와의 간격을 더욱 좁혔다.
아네타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것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말없이 품을 내어 주며 기다려 주는 것뿐이었다.
“이상하게 당신 앞에선 항상 우스운 꼴만 보이게 돼.”
처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가 그 시작이었다. 그녀가 아버지와의 설전 끝에 뺨을 맞고 돌아섰을 때,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 내던 모습을 그는 보았다.
“내 주변을 둘러싼 것들은 모두 작위적이야. 건네는 말 한 마디, 입가에 걸친 미소마저도. 어느 하나 진짜인 게 없었고, 그에 대한 깨달음과 체념은 빨랐지.”
아네타는 그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주름 하나 없이 말끔했던 셔츠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구겨졌다.
“당신 곁에 있던 나도, 내 곁에 있던 당신도 결국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기대를 버렸어. 기대하지 않으면 슬픔에 몸부림칠 일도 없을 테니까.”
아네타는 자신의 나약함이, 초라함이 다른 누군가의 앞에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파고든다. 끝도 없이 파고든다. 약해진 때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어, 기어이 끝을 보겠다는 듯 내면으로 들어와 손을 뻗는다.
그러곤 다정한 말과 행동으로 하여금 속삭인다.
내 손을 잡아. 네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탐해.
“인생은 혼자 적당히 살아가는 게 편해. 그러니 당신도, 더는 내게 다가오지 마.”
탐해선 안 될 선악과가 끊임없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그녀를 유혹했다. 아네타는 그것을 밀어낼 힘이 더는 제게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제발, 거기서 멈춰.”
“싫어.”
단호한 거절이 애원 섞인 음성을 자르며 나왔다.
“나는 당신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외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칼로스는 옷자락을 쥔 그녀의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겁내지 마, 아네타. 난 언제나 당신 뒤를 따를 거야. 그러니 준비가 되면 그때 뒤를 돌아봐.”
아네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그는 확언했다.
“그곳엔 항상 내가 있을 테니까.”
“…….”
“나란히 걷게 해 주면 더 좋고.”
진지했던 표정에 장난기가 스몄다. 칼로스는 이마에 이어 콧잔등과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남은 곳은 하나였다.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놔줘.”
아네타는 그를 밀어내기 위해 가슴에 댄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밀려 나기는커녕 걷혀 있던 커튼을 쳤다.
“당신은 아직 위로가 필요해.”
“이제 필요 없어.”
“그럼 이번엔 내가 보상받을 차례라고 치자.”
“그런 게 어딨……!”
뒷말은 그의 입 속으로 삼켜졌다. 입술에 닿은 말캉한 감촉에 아네타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참을성 없는 혀가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갔다. 큼지막한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감싼 그는 정신없이 그녀의 붉음을 탐했다.
혀끝으로 뭉근하게 점막을 훑자 물기 어린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적나라한 자극에 아네타는 허리를 감싼 팔을 쥐었다.
칼로스는 그녀의 머리를 감싼 손을 더욱 가까이 당기며 깊게 파고들었다. 그녀에게 드리워진 잿빛의 계절을 몰아내기 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혀를 제 혀로 얽어매던 그는 곧 입술을 떼었다. 작게 숨을 헐떡이는 그녀의 입술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렸다.
그는 이끌리듯 또 한 번 입술을 겹쳤다. 처음보다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을 훑고 떨어져 나온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제 입술을 부볐다.
“사랑해.”
발그스름하게 물든 눈가가 야살스럽다고 느낄 때,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아, 아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