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잿빛의 계절 (2)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곧장 각자의 방으로 갔다.
칼로스에 의해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하던 아네타는 침대에 등을 대고 눕는 순간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건 아침 햇살로 물든 창가에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이 닿을 때였다.
날이 밝았으니 출근을 해야 한다는 습관적인 생각과 함께 몸을 일으킨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풍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아. 영지에 와 있었지…….”
뒤늦은 탄성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여 움직이지 않는가. 아네타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성인이 된 후로 영지에 발을 들인 횟수는 겨우 두 번에 불과했다. 그러니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아네타는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어중간한 바닥의 온도가 살가죽을 타고 오르다 발목 언저리에서 사그라진다.
어제의 일이 꿈은 아니었을까. 저도 모르게 한 생각에 건조한 웃음이 번졌다. 아비의 죽음에 충격을 받긴 했던 모양이다.
기억 속의 데릭은 지독히도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엉망으로 취한 채, 반쯤 헐벗은 여자를 양팔에 끼고 난잡하게 놀았다.
어느 날은 돈 주머니를 꺼내 들고 금화를 뿌리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마음에 드는 이를 택해 배를 맞추기도 했다.
어린 그녀가 보는 앞에서도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았기에, 지금도 어딘가에서 같은 행동을 일삼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꿈인 것 같다고 해서 꿈이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아네타에겐 아비를 위해 흘릴 눈물 따위는 없었다. 그가 살길 바라는 마음은 더더욱.
아네타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방을 나섰다.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에서 진득한 인내가 묻어났다.
많은 문을 지나 마침내 어느 한 곳에 멈춰 선 아네타는 그간의 그리움을 담은 얼굴로 문고리를 잡았다.
뻑뻑한 문고리가 작은 소음을 동반하여 돌아갔다.
문턱에 서서 둘러본 내부는 그녀의 기억과 완벽히 일치했다.
아네타는 벽 한 가운데에 걸린 초상화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죽은 자의 잔상뿐이라는 듯, 그림 속에 담긴 엘레나가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입가에 맺힌 미소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표면을 훑어 보지만, 당연하게도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분이셨네.”
기척 없이 찾아온 그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당신 미모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겠어.”
“닮았다는 말은 하지 마.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아네타는 돌아보지 않은 채 칼로스의 말에 대꾸했다.
우습게도 그녀는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닌 증오스러운 아버지의 외견을 닮았다. 하다못해 눈동자 색 하나만이라도 어머니를 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리 네가 날 증오해도 너는 내 피를 타고났다. 그리 말하듯 자신을 비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소름이 끼쳐 잔상을 몰아냈다.
“여긴 어떻게 찾았어?”
“집사가 알려 줬어. 여기 있을 거라더군.”
칼로스는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않는 아네타를 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어머니 방인가?”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그마한 움직임은 오직 그녀만을 담고 있던 그의 눈에 무리 없이 닿았다.
“내 아버지가 지금껏 이곳을 없애지 않고 내버려 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는데.”
“그 사람, 지금껏 잊고 살았거든. 어머니 존재 자체를.”
얼굴이 가장 제 취향이라는 이유로 부인을 사오듯 데리고 온 이에게 무엇을 바랄까. 데릭은 결혼식 당일까지도 다른 여자와 놀아난 쓰레기였다.
“그래서 나도 잊은 척했어. 이 주변엔 얼씬도 하지 않았어. 그게 이곳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거든.”
모든 걸 그의 근처에 두고 다 잊은 것처럼 살았다. 아네타는 지금껏 그런 식으로 엘레나의 유품을 지켜 왔다.
“내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 사람 귀에 들어가면, 모든 걸 없애려 들었을 테니까.”
수도 저택에 있던 물건을 불태우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깨달음의 원인이자 그녀를 분노케 하는 기억은 결코 흐려지는 법이 없었다.
더욱 진득이 들러붙어 제 몸집을 불려 나갈 뿐.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창가를 타고 들어온 빛이 발밑에 비스듬한 경계를 드리운다.
생과 사를 가르는 벽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화가 치밀어 오를수록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칼로스는 그러쥔 두 손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녀의 심정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그마치 십 년을 지옥 속에서 살았을 테니.
데릭의 악명은 그 역시 익히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으니 세간의 평은 약과였다.
알면 알수록 금수만도 못한 작자였다.
그는 속으로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아네타는 초상화를, 칼로스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 모트가 찾아왔다.
“각하, 말씀하신 대로 준비를 끝내 두었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아비의 방에 있던 물건을 모두 끄집어내라. 식사를 하며 그리 명했었다.
“수고했어. 지금 나갈게.”
어제의 기억을 되살린 아네타는 곧장 방을 빠져나가려다 멈칫했다.
“어머니 유품들, 저택으로 가지고 갈 거야. 지금 바로 준비해 줘.”
그녀는 제 발목을 잡은 미련을 고민 없이 수용했다.
칼로스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처음부터 모든 절차를 함께 할 작정으로 온 것이니 당연했다.
“당신도 가려고?”
“바늘 가는 데 실도 따라가야지. 안 되나?”
“……마음대로 해.”
아네타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제도로는 언제 돌아가려고?”
“어머니 유품이 정리되는 즉시.”
방에 있는 물건을 전부 옮기는 것이니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예상과 함께 밖으로 나오자 채 가시지 않은 습기가 피부에 스쳤다.
데릭의 침실이나 드레스룸 등에서 꺼내 온 물건은 아네타의 명에 따라 두 종류로 분류되어 있었다.
비교적 높은 값어치를 지닌 것들과 태워 버릴 것. 전자의 경우는 모조리 팔아 치운 뒤 기부할 심산이었다.
‘그래. 이 정도는 나와야 그동안 썼던 액수가 설명이 되지.’
아네타는 사치품이 끝도 없이 늘어져 있는 것에 혀를 찼다.
“이리 줘.”
“직접 하시렵니까?”
횃불을 건네받은 아네타는 태울 것으로 분류된 곳에 가 섰다. 침대를 제외하면 자잘한 물건이나 옷가지가 대부분이었다.
어머니 물건을 태운 것에 대한 복수로 그의 물건을 태우려는 건 아니었다. 이승의 것을 어찌하든 이미 저승으로 건너간 그는 알지 못할 테니까.
아네타는 그저 그의 흔적을 모두 없애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조심해.”
아네타는 칼로스의 염려와 함께 횃불을 기울였다. 불길이 옮겨붙은 건 순식간이었다.
횃불을 놓은 그녀는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불꽃은 눅진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리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위세를 더해 갔다.
물건의 형체를 살라 먹는 기세는 탐욕 그 자체였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그것은 종국엔 하얀 재가 되어 어지러이 날렸다.
***
“다들 고생 많았어. 이제 모셔야 할 사람도 없으니 당분간 푹 쉬도록 해.”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닌 자를 상전으로 모시느라 수고가 많았다. 아네타는 마차에 오르기 전,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올 때와 달리 이동하는 마차는 두 대였다. 짐마차 하나가 엘레나의 유품을 싣고 뒤따를 예정이었다.
“모트. 영지와 성을 잘 부탁해.”
“저만 믿으십시오, 각하.”
아네타의 당부에 손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훔치던 모트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도 그녀에게 조금 더 영지에 머물러 줄 것을 청하지 못했다.
“이제 그만 갈까?”
“후작 각하!”
칼로스가 손을 내밀며 입을 떼던 때였다. 서둘러 달려온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또 무슨 일이지?”
칼로스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려던 아네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멈춰 세운 이를 찾았다.
서른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무언가를 안아 든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영지의 기사로 보이는 이도 함께였다.
“아기?”
아네타는 칼로스의 중얼거림에 다시 한번 여자의 품을 살폈다.
그의 말대로 선명한 금발을 지닌 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네타. 아는 사이야?”
“전혀.”
오후의 햇살이 아기의 머리카락을 더욱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여자는 서둘러 두 사람 앞으로 뛰어왔다. 호위들이 앞을 막아섰지만, 여자는 오히려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금발의 아기를 안고 나타난 여자. 존재만으로 최악의 가설이 떠올라 아네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허락도 없이 객을 들이라고 했나!”
모트가 노기를 담은 음성으로 질책하자, 기사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사유를 고했다.
“이분이 각하를 꼭 만나 뵈어야 한다고 우기셔서…….”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걸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송구하오나, 그게…… 품에 안은 아기가 선대 가주님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안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가 목청을 높였다.
“각하, 이 아이는 각하의 뒤를 이을 아이입니다!”
여자는 잠든 아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호위들이 더는 다가갈 수 없다며 강경하게 막아섰지만, 여자는 굴하지 않았다.
“감히 누굴 막아서는 거지? 난 데릭 님의 연인이었다고!”
연인과 사생아. 여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가볍게 치부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사실이라면 말이지.’
아네타는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준비해 두었던 카드를 꺼냈다.
“바론.”
“데릭 님과 잠자리를 함께 한 여인 중 하나입니다. 이름은 멜라, 나이는 서른셋. 홍등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바론은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여자의 신상을 줄줄 읊었다.
아네타가 감시와 기록을 명한 건 데릭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긴밀히 얽히는 모든 이들이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 당신이 그 멜라였구나.”
아네타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보고 서류를 통해 눈에 잔상이 맺힐 정도로 자주 보았던 이름을 떠올렸다.
“한동안 총애를 받긴 했다지. 얼마 가지 않아 질렸다는 이유로 내쳐지고, 바로 다른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여자의 얼굴은 동거라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동거는 했지만, 이 아이는 데릭 님의 아이가 맞아요. 보세요. 눈을 감고 있어서 보이진 않지만, 그분과 같은 금발에 벽안이라고요.”
“금발과 벽안이라면 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희귀하지도 않지. 게다가 당신과 동거했다던 남자도 금발에 벽안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런 건 증거가 될 수 없어.”
애초에 몸을 파는 이의 말이다.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신뢰할 수 없었다. 누구의 아이인지 알 길이 없으니까.
“어째서 그런 것까지…….”
“어째서라니? 당연하잖아. 언제 어떻게 위협이 되어 다가올지 모르는데. 바로 지금처럼.”
아네타는 막아서지 않아도 좋다는 말로 호위들을 물렸다. 그러곤 걱정스러운 낯을 하고 있는 이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섰다.
“대체 누구 마음대로 내 뒤를 이을 아이라는 건지.”
아네타는 아기를 향해 무던한 시선을 던졌다. 같은 금발에 벽안이지만 아무리 봐도 데릭과 닮은 구석은 조금도 없다.
“겨우 그런 걸 증거로 들먹일 거라면 돌아가.”
“또 다른 증거가 있어요!”
여자는 아네타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마차에 오를 기세를 보이자 급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이게 그분과 나의 관계를 증명하는 증거예요.”
무표정하게 증거랍시고 내민 것에 시선을 둔 아네타의 얼굴은 곧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아니, 마님의 목걸이가 어째서!”
그토록 찾아 헤맸지만 찾을 수 없었던 엘레나의 목걸이가 여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