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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24화 (24/122)

24화. 잿빛의 계절 (1)

운이 없다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좋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날이 있다. 아네타는 손가락을 접어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벌써 며칠째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물건을 떨어뜨리면 망가진 물건이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새 것으로 돌아왔다.

실수로 서류 위에 잉크를 엎질러도 중요한 서류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기묘한 나날을 반복하는 가운데, 크리스의 이사가 이루어졌다.

버논은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곧 의연한 모습으로 돌아와 이사를 도왔다.

아네타의 충고를 허투루 듣지 않은 그는 뒤에서 조용히 크리스를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크리스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조금 한적하다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경비대 순찰지에 해당되는 데다, 당사자가 오히려 그 점을 마음에 들어 하니 걱정을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에레즈가 답지 않게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본래 크리스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가까워져야 하는 사람은 아네타가 아닌 에레즈였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 어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아네타는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분명 손잡이를 단단히 붙들었는데 손끝이 미끄러지듯 그 위를 스쳤다. 찻물을 허공에 토해 내며 추락하는 잔을 아네타는 반사적으로 받아 냈다. 깨지지 않은 잔에 안도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이 미지근한 액체에 적셔졌다.

찻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과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며 아네타는 직감했다.

오늘도 기묘한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라고.

특히나 오늘은 더 느낌이 좋지 않다. 미간을 살포시 찡그리는데, 마침 안으로 들어서던 시녀가 놀란 눈을 하고 달려왔다.

“세상에, 각하.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괜찮아. 미안하지만 바닥 좀 치워 줄래?”

“지금 바로 치워 드릴게요.”

시녀는 바닥을 닦아 낼 것을 찾기에 앞서 이 일을 이사벨에게 알렸고, 이사벨은 곧장 차게 적신 물수건을 가지고 아네타를 찾았다.

이사벨은 요즘 따라 아네타답지 않은 실수가 잦아져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각하, 혹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없으니까 걱정 마, 이사벨.”

물수건을 건네받은 아네타는 여상한 투로 말하며 젖은 손을 닦아 내었다.

어째서일까. 하얀 수건 위로 옅게 번진 주홍빛이 시선을 길게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막연한 긴장감이 머무는 가운데, 아네타는 출근 준비를 마쳤다.

마차 앞에 선 그녀는 곁에 선 이사벨에게 힐끗 눈길을 주었다. 친애하는 집사의 얼굴엔 아직도 근심이 서려 있었다.

아네타가 이사벨을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려던 때였다.

“각하!”

말을 타고 나타난 누군가가 저택 앞에 급하게 멈추어 섰다. 주인을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던 사용인들의 이목이 모조리 그리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익숙한 얼굴이 말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하여 다가오자 아네타는 이사벨에게 하려던 말을 바꾸었다.

“그 무슨 일이라는 거, 방금 생긴 것 같네.”

바론. 그는 영지를 지키는 또 다른 집사의 아들이자, 아네타가 아버지 데릭에게 붙여 둔 이였다. 그는 아네타의 앞에 서자마자, 예를 갖추는 것도 잊은 채 외쳤다.

“각하, 아버님이신 선대 가주께서 금일 새벽에 작고하셨습니다!”

데릭의 죽음을 고하는 외침에 사용인들 사이에서 혼란이 번졌다. 서둘러 나선 이사벨이 그들의 소란을 잠재우자,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아네타가 입을 열었다.

“영지로 가야겠어.”

그 말에 마부는 서둘러 마차를 돌렸다. 다시 그녀 앞에 멈추어 선 마차의 목적지는 황궁이 아닌 아데나워의 성이 있는 영지였다.

“이사벨, 나 대신 황궁에 기별을 넣어 줘. ……혹시 모르니 케이너 백작가에도 올 필요 없다고 전하고.”

어차피 버논을 제외하면 오려고 하지도 않겠지만. 뒷말을 삼킨 아네타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어느 정도 수도와 멀어지자, 그녀는 호위 여럿을 뒤로 물리고 홀로 남은 바론에게 하문했다.

“바론. 경위를 보고해.”

마차와 나란히 달리던 그는 제가 본 바를 고했다.

“동이 터오기 직전까지 홍등가에서 술을 마시고 나오다 마차에 치여 돌아가셨습니다.”

아데나워 영지 내에는 홍등가가 없다. 아네타는 자연히 인접한 영지를 떠올렸다. 분명 그곳에 가서 평소처럼 놀고 마시다 변을 당한 것일 터였다.

“알았어.”

아네타는 손을 쓸 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말을 끝으로 걷어 두었던 커튼을 쳤다.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자, 억지로 잊고 살았던 얼굴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흥청망청 돈을 써 대며 끝까지 살아남아 그녀를 괴롭힐 것 같았던 존재가 사라졌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신은 그렇게 해서라도 제 땅 위에 발을 디딘 그를 치워 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

장례식은 아네타의 주도 하에 아주 단출하게 진행되었다.

아네타는 영지의 집사 모트에게 모든 조문을 정중히 사양하겠다는 서신을 보내게 했다.

뭐 대단한 죽음이라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냐는 아네타의 일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가족끼리 조용히 치르겠다는 핑계를 댔지만, 아마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아네타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마저 아비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죽음을 부정하고, 보낼 수 없다며 관을 붙들고 오열하는 이가 없어 시간이 지체되는 일은 없었다.

아네타는 뚜껑이 닫힌 검은 관을 바라보았다. 모트는 각하께서 볼 만한 게 아니라고 말하며 머리 아래를 보지 못하게 말렸고, 덕분에 그녀는 얼굴만 확인했다.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무엇 하나 까다롭지 않은 게 없었던 그가 겨우 저런 곳에 들어가 있다는 게.

형식적인 절차를 이어갈 동안 아네타는 혼자였다. 데릭의 죽음이 원작에서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야기는 철저히 에레즈와 칼로스를 중심으로 이어졌으니까.

만약 이런 일이 있었더라면, 그녀는 아마 지금의 아네타처럼 누구도 곁에 두지 못했을 것이다.

집안의 시종들이 다가와 관을 들 때까지도 아네타는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도, 기뻐 웃지도 않았다.

관은 그녀의 어머니 엘레나의 곁에 묻혔다. 마음 같아선 영지 바깥,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묻어 버리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바람은 가문의 규칙에 막혀 버렸지만.

아네타는 아버지의 마지막 길도 보지 않은 채 하염없이 어머니 무덤만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의 색이 옮겨 붙듯, 꼿꼿이 선 아네타는 눅눅히 젖어든 공기 속에서 잿빛으로 메말라 갔다.

발끝마저 굳어 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갈 곳을 잃어 허공에 스며든 감정은 이다지도 가차 없이 온몸을 억세게 짓누르고 옥죄었다.

부유하여 흩어진 그것은 곧 비라도 되어 내리듯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하자, 모트가 황급히 우산을 가져와 그녀의 뒤에 섰다.

아네타는 우산 아래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덧없이 내리치는 그것은 땅으로 스며들다 못해 웅덩이를 이루었다.

그녀의 숨은 저 안으로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분노, 증오, 원망. 모두 저 안에 담겼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아네타의 눈동자가 한 순간에 비어 버린 결여를 채울 무언가를 찾아 허공을 더듬었다.

“아네타.”

정처 없이 나돌던 시선이 멎었다. 아네타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반응하여 몸을 돌렸다. 누구보다 이곳에 와선 안 될 사람이 그녀의 뒤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는 존재만으로 텅 비어 버린 시선을 움켜쥐었다.

“칼로스.”

모트가 들고 있던 우산은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칼로스는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빗물에 젖은 손을 그녀에게 뻗었다.

그것은 검고 검은 어둠을 몰고 다가와 창백하게 질린 뺨에 살며시 닿았다. 차게 식은 손끝이 현실의 감각을 일깨웠다.

“당신, 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있는 그는 행여 자신 때문에 그녀까지 젖을까 우산 안으로 몸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네타가 놀란 눈으로 그의 팔을 밀어 우산을 기울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아네타. 이러다 당신까지 젖을 거야.”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비는 왜 다 맞고 다녀.”

“능력을 사용해서 왔어.”

“미쳤어.”

아네타는 빗속을 뚫고 날아왔다는 말에 놀라 그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그는 그에 맞추어 한 걸음 물러섰다.

요란스레 튀어 오른 빗물이 발치를 때렸다.

“젖는다니까.”

“지금 그게 문제야?”

아네타는 그가 움직일 수 없도록 우산을 든 팔을 잡았다.

“난 분명히 참고 있었어. 당신이 먼저 다가온 거니까 젖어도 원망하지 마.”

칼로스는 먼저 선수를 쳐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한 걸음만으로 숨결이 닿을 만큼 지척에 다가선 그는 두 팔로 아네타의 허리를 휘감았다.

온기가 달아난 그녀의 살갗에 젖은 옷가지가 닿았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빗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이래서 참았던 건데.”

칼로스는 젖어 버린 뺨을 닦아 내려 했지만, 마찬가지로 잔뜩 젖은 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옷이 흠뻑 젖었으니 품 안에 있는 손수건 역시 사정이 같으리라.

“여기까지 왜 온 거야.”

“와 봐야 할 것 같아서.”

칼로스는 데릭 아데나워의 죽음이 황궁에 전해지는 즉시 러셀에게 허리를 숙였다.

제발 자신을 그녀에게 보내 달라고.

다행히 러셀은 칼로스의 청을 무시하지 않았고, 그는 쉴 틈 없이 날아 이곳으로 왔다.

“그럴 가치 없는 사람이야, 그 남자는.”

“난 당신 아버지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야.”

아네타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걱정돼서 왔어.”

사랑하는 여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의 죽음을 애도하러 오다니. 아무리 그녀의 아비라도 그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칼로스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오직 아네타 하나뿐이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눈짓으로 모트를 물리고 지켜본 아네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잿빛 풍경에 녹아 아스라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마워.”

아네타는 차마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대신 자신을 안은 너른 가슴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아네타의 어깨를 감싸 부드럽게 이끌었다.

“이대로 있다간 감기 걸려.”

아네타는 그의 말에 따르려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만.”

힐끗 뒤를 살피자 젖은 흙을 더는 쌓아올릴 수 없어 난감해하는 시종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에 아네타는 시선을 발치에 두고 서 있는 집사에게 지시했다.

“모트. 저들에게도 비가 그치면 그때 다시 시작하라고 해.”

아네타는 알겠다는 대답을 들은 뒤 그의 팔을 끌었다. 감정의 잔재가 속에서 들끓었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네타는 성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건네 오는 수건을 받아들고 칼로스를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씻으면 돼. 갈아입을 옷은 바로 가져다 줄 거야. 식사 준비도 끝났을 테니 가서 먹고.”

“당신은?”

“씻고 바로 자려고. 조금 피곤하네.”

옷이 젖어 찝찝하니 어서 갈아입어야겠다. 군데군데 젖은 드레스를 살피다 이만 나가 보겠다며 몸을 돌리는데, 커다란 손이 팔뚝을 잡았다.

그녀의 몸은 또다시 그의 품에 파묻혔다. 다정스레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칼로스는 아네타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온 거야. 힘들겠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먹고 자, 아네타.”

“…….”

“부탁이야.”

“……알았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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