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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23화 (23/122)

23화. 동질감 (4)

크리스가 긴장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러셀에게 일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돌아온 아네타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칼로스 역시 표정을 읽기 어려워, 크리스는 불안스레 눈을 굴렸다.

그 모습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토끼 같아 아네타의 장난기가 불쑥 머리를 들었다.

“크리스. 아무래도 우리, 계약서를 다시 작성해야 할 것 같아.”

지난번 정무 회의에서 헛소리를 늘어놓던 이들을 떠올리니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굳은 표정이 지어졌다.

“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차분하게 깔린 목소리가 불안감을 부추겼다.

크리스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책상에 팔꿈치를 부딪쳤지만 아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미안해.”

불안에 젖어 떨리는 눈이 저에게 향하자, 아네타는 사과를 건넸다.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큰일인 건가요?”

“당연히 큰일이지. 폐하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으니까.”

“저, 이대로 짤리는…… 네?”

크리스는 앞으로 갚아야 할 빚에 대해 떠올리다, 감히 기대조차 해 보지 못한 말이 들려오자 고개를 휙 들었다.

“폐하께서 널 정식으로 복지부에 소속시키라고 명하셨거든.”

쿵쿵. 거센 뜀박질을 마치고 선 것처럼 심장이 요란스레 뛰었다.

“축하해.”

아네타는 칭찬하듯 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불안이 가시니 그제야 잊고 있던 통증이 느껴졌다. 멍이 들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는 얼얼한 팔꿈치를 매만지며 물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왜 하신 거예요?”

“계약 내용에 변동이 생겼으니까. 장난쳐서 미안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안건은 보다 완벽하게 재정비되어 러셀의 만족을 끌어냈다. 아네타는 배부른 맹수와도 같은 얼굴로 크리스의 정식 채용을 명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그가 마음에 드는 인재를 발견했을 때 종종 짓곤 했던 표정이었다. 아직 좀 이른 감이 있지만 가능성을 본 게 아닐까.

“제안을 수락한다면 급여는 앞으로 내가 아닌 나라에서 지급하게 될 거야. 어쨌거나 네가 내 밑에 있는 건 달라지지 않을 테니 급여 문제와 직책만 수정하면 돼. 어때?”

“하고 싶어요. 하게 해 주세요.”

정식 채용을 반기지 않을 사람은 없다. 크리스는 기쁨에 겨워 활짝 웃었다. 아득히 멀기만 했던 목표에 수십 걸음쯤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아직 기뻐하기엔 일러.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거든.”

“또요?”

“타운하우스가 없는 이들에 한해서 지낼 곳을 무상으로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어.”

혼자 살기엔 조금 넓다 싶을 정도의 작은 주택인 데다, 재산 내역을 뿌리까지 들쑤셔 확인하는 등 철저한 심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경쟁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거기에 제가 통과된 건가요?”

“그래. 수정된 계약서가 효력을 발휘하는 즉시 입주 가능하지. 마침 비어 있는 곳이 하나 있어서 일처리가 한층 수월했어.”

크리스는 손으로 벌어진 입술을 가렸다. 놀라움을 표출하는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더는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 정도는 해 줘도 괜찮을 것 같아서. 괜한 오지랖은 아니지?”

“세상에.”

크리스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아네타를 끌어안았다.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금방이라도 뺨을 타고 떨어질 것 같았다.

“오지랖이라니, 전혀요.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아네타 님.”

아네타는 크리스의 돌발 행동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이는 작고 따스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아네타는 얼떨떨한 기색으로 눈을 깜빡이다, 이내 웃어 버렸다.

부드럽게 풀리는 눈매에 애정이 담기자, 지켜보던 칼로스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한 발짝 내딛다 멈추었다.

저도 모르게 행한, 일종의 경계였다.

득달같이 달려가 그녀를 제 품으로 이끌고 싶었다. 그러나 따스함을 머금은 그녀가 너무도 아름다워서, 감히 훼방을 놓을 수 없었다.

‘아. 이 정도면 정말 중증이구나.’

칼로스는 주변 사람 중 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사실을 뒤늦게 통감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가슴이 빠듯이 조여들었다.

“아네타 님은 제게 내려진 축복 같은 분이세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스는 밀려드는 기쁨에 허우적대며 감사를 전할 뿐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연속으로 찾아오는 행운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아네타는 허리에 감긴 팔이 풀리고 나서야 크리스를 책상 앞으로 이끌었다.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한 크리스는 정식으로 같은 공간을 사용하게 될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떴다.

키우는 보람이 있던 보좌관을 잃자 아쉬움이 밀려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마저도 그녀가 의도한 일이었다.

“보좌를 잃고 부하를 얻었으니 된 건가.”

아네타는 시원하게 트인 창가 앞에 서서 멀어지는 크리스의 뒷모습을 복잡한 눈으로 좇았다.

복지부로 옮겨야 하는 서류 묶음을 들고 씩씩하게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 이곳도 나랑 당신, 둘만 남겠네.”

칼로스는 어느새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아네타는 그의 기척을 느끼며 답했다.

“애지중지 키운 자식을 독립시키는 기분이야.”

“당신 딸이면 내 딸이기도 해.”

“…….”

장난 반, 진심 반이 담긴 말을 그녀는 반응 없이 넘겼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봐도 애지중지는 아니었어. 정계에 발을 들인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안건까지 제출하게 했으니까.”

칼로스는 보고 들은 바를 언급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겠지만.”

그 역시 능력 있는 자를 도운 것뿐이다. 만약 그 반대의 경우였다면 아네타를 위해 약간의 도움만 주었을 뿐, 직접 손을 보태지는 않았으리라.

“그건 그렇고, 나랑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 보니 어때?”

기대를 담은 음성이 밀려드는 바람결에 실렸다. 그는 가볍게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재차 물었다.

“마음이 좀 달라졌나?”

“글쎄. 함께 서류 산에 파묻혀서 지낸 탓인지 전우애 정도는 생긴 것 같네.”

“무슨 대답이 그래.”

“그것도 우리 둘만의 감정은 아니야. 저 아이도 함께였으니까.”

아네타는 칼로스에게로 향했던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던졌다. 크리스의 곁에는 뒤늦게 나타난 버논이 함께 있었다.

서류를 향해 손을 뻗는 버논과 연신 고개를 젓는 크리스. 대화가 들리지 않아도 대략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크리스가 아까워.”

아네타는 버논을 밀어낸 뒤, 크리스를 제 곁에 끼고 살아 버릴까 고민했다. 실현 가능성이 바닥을 치는, 말 그대로 바람일 뿐임을 모르진 않았다.

“난 딱히 둘 중 누가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러니 하루 빨리 사귀었으면 좋겠군.”

“의외네. 당신이 그런 말도 하고.”

“그래야 아네타 당신이 저 녀석들에게 신경을 덜 쓸 테니까.”

칼로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요즘 당신, 날 너무 방치했어.”

“……언제는 안 그랬나.”

아네타는 차마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부정했다간 뾰족하게 솟아오른 양심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이전과는 달라. 적어도 그때는 당신이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끽해야 이사벨이나 돌아가신 어머니 정도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거 알아, 아네타?”

푸른 시선 속에서, 그는 보란 듯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는 순간마저도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난 마치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 갇힌 것 같아.”

“거기서 나올 생각은?”

“없어.”

칼로스는 단호한 음성에 맹세를 실었다.

“난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거야.”

그리고 바랐다.

제 숨결이 담긴 문장이 그녀에게 닿아, 찰나에 피어나는 고동이 되기를.

***

“크리스가 날 버리고 복지부로 가 버렸어. 내 도움도 거절했다고.”

칼로스는 버논과 크리스가 하루 빨리 이루어지길 마음 깊이 염원했다.

“난 이제 무슨 낙으로 살지?”

그래야 이 꼴을 비교적 덜 볼 수 있을 테니까.

칼로스는 고작 10분 만에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러 나타난 불청객을 활활 태워 버릴 듯 노려보았다.

손님이 왔는데 차도 안 내어 주냐는 말에 칼로스가 내온 것은 대충 따른 물 한 잔이 전부였다.

냉수 먹고 속 차린 뒤 이곳에서 썩 꺼져라. 대충 그런 뜻으로 건네었는데, 버논은 단 번에 잔을 비운 뒤 소파에 눌러앉았다.

“듣고 있어? 요즘 내 최대 고민이라니까.”

버논은 칼로스의 푸대접과 아네타의 무관심에도 굴하지 않고 상담을 청해 왔다.

“크리스가 내게 기대려 하지 않아. 그게 너무 불안해. 이대로 내 곁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제 마음을 모두 들켜 버렸으니 감출 필요 없다는 이유로 찾아온 그는 담고 있던 불안을 여과 없이 쏟아 내었다.

“그 아이, 도와주고 싶다며.”

듣다 못한 아네타는 다른 곳에 두고 있던 시선을 들어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맨 사촌을 응시했다.

“네가 크리스가 의지하지 않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야. 너희들의 관계는 줄곧 그런 식으로 이어져 왔을 테니까.”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에 변화가 찾아왔으니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아네타는 그렇지? 하고 동의를 구하는 말을 흘렸지만, 대답은 듣지 않았다.

“이제 네게 주어진 역할은 크리스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터 주는 것뿐이지, 너 혼자 정한 룰에 그 아이를 가두는 게 아니야.”

그녀 역시 크리스를 지금 모습 그대로 지켜주고 싶지만 무리라는 걸 잘 알았다. 그렇기에 크리스가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가지길 바랐다.

그녀가 발을 들인 곳은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였으니까.

“맹목적인 보호는 딱 그 순간에만 효력을 발휘할 뿐이지. 아무리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 해도 모든 시간을 함께 할 수는 없어.”

현실을 꼬집는 말과 함께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냐는 시선이 그에게로 가 꽂혔다. 버논은 그 시선이 아프다는 듯 과장스레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니 새장 안에 가두려는 짓은 그만 둬. 그 아이가 네 마음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인생을 살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아네타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경계했다.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뒤, 마음이 식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면 남는 것은 무력함과 공허뿐일 테니까.

칼로스에게 연정을 품지 않은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녀의 곁에 남는 건 결국 착각이었다는 말뿐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네가 잠시 방심한 사이에, 누가 그 새장을 통째로 들고 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마치 그녀 자신이 그러겠다는 말처럼 들려, 버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아네타 너만 아니면 내가 다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치 최종 흑막쯤으로 취급하는 말에 아네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실없는 소리 할 거면 나가.”

“취급이 너무하네. 이래 봬도 전할 소식이 있어서 온 건데.”

그걸 왜 이제야 말하냐는 듯, 따가운 시선이 버논을 향해 쇄도했다.

“아, 그랬군. 난 할 일 없이 한량처럼 놀고먹는 줄 알았는데.”

칼로스의 신랄한 말에 맞추어 장난스럽게 너무하다는 표정을 짓던 버논은 곧 표정을 굳히고 본론을 꺼냈다.

“구금되어 있던 폴터 자작에게서 자백을 받아 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증거가 명백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죄를 시인하며 하는 짓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었단다.

하지만 아네타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의 생존을 예상하지 않았다.

러셀은 분명 그의 목을 자를 테니까.

“현지 상황은 어때?”

“우선 모단 고아원 원장에게 부탁해서 협조를 구했어. 당분간 아이들에게 허름한 옷을 입혀 달라고. 식자재 역시 대부분 떨이로 파는 것들만 들여가게 했고.”

“아이들에게 상태 안 좋은 음식을 먹이는 건 아니겠지?”

일부러 안 좋은 것들만 싼 가격으로 들여간다는 말에, 아네타의 표정이 굳어졌다.

“걱정 마. 발티모어가의 기사단이 몰래 정상적인 식자재를 공급하고 있으니까. 먹을 수 없는 건 모두 우리 영지에서 처리하고 있어.”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듯 버논이 인근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언급했다.

“많은 양을 구매하면 시선이 몰릴 텐데. 그 문제는?”

“폴터 자작의 인장을 가져가 구매했다더군. 다들 그가 이번엔 식량에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미리 영지민들의 반응을 전해 들은 칼로스는 아네타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부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다행이네.”

“게으른 영주가 영지도 돌보지 않고 틀어박혀서 식량이나 축낸다고 생각하겠지. 칼로스가 워낙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서 눈속임이 수월했어.”

버논은 그만큼 영주민들이 폴터 자작의 횡포에 익숙해져 있었다며 혀를 찼다.

“아, 그리고 이거. 다른 서류랑 같이 서랍 안에 넣어 둬, 아네타.”

“왜 하필 아네타에게?”

버논이 옆구리에 끼고 들어왔던 서류 봉투를 건네자, 칼로스가 의문을 제시했다.

“복지부와 연관된 서류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아네타가 가지고 있는 게 더 자연스럽잖아.”

자연스럽다. 그 한 마디에 아네타와 칼로스는 그 서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미끼구나.”

아무래도 러셀이 작정을 한 것 같다. 아네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러셀에게 경외를 느끼며 내용물을 훑었다.

이제 함정은 모두 준비되었다.

남은 건 에레즈가 덫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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