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동질감 (3)
어찌어찌 아네타를 설득해 집무실로 데리고 왔지만, 칼로스의 외로움은 이전보다 심화되었다.
홀로 떨어진 외딴 섬 신세가 된 그와 달리, 아네타와 크리스는 이제 서로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그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칼로스는 일생일대의 라이벌이 나타났음을 실감했다. 아네타가 먼저 이름을 허락하고 다가가는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
칼로스는 위기감을 느끼며 두 사람의 모습을 주시했다. 쥐고 있던 서류나 깃펜 따위는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아네타는 크리스가 잔잔한 음성으로 꺼내는 영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잘 알지 못하는 세상을 접하는 그녀의 태도는 진지했다.
“봄이 되면 유독 연서를 사고파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요.”
“내용이 겹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네. 안 그래도 같은 내용의 연서를 여러 사람에게 판매해서 한동안 떠들썩했던 적도 있어요.”
크리스는 연인에게 들켰다는 항의에 쫓겨 헐레벌떡 달아나던 이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흘렸다.
“각지를 떠도는 행상인들이 온갖 잡동사니를 팔기도 하는데, 품질을 신용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물건이 상하기도 하고, 팔다 남은 오래된 물건도 많거든요.”
물건 하나 때문에 전국을 도는 행상인의 뒤를 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자를 발견했을 때엔 이미 그 마을을 떴을 테니까.
“그렇다면 상가는 어떻지? 파필 거리에서 보니 같은 물건이라도 가게마다 가격이 상이한 것 같던데.”
아네타는 이전에 메모해 두었던 내용을 상기하며 물었다.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이유로 가게 주인들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경우가 빈번해요.”
“싸운다고?”
“덤을 얹어 주거나 가격을 터무니없이 낮추어 판매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손님을 끌어오려고 하거든요.”
“그러다 과도한 경쟁으로 번지는 경우도 적지 않겠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자들이 가격을 낮추어 판매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그쪽으로 몰릴 것이다.
이미 가진 게 많은 자들이 배를 불리는 상황은 이전 생에서도 많이 보아왔던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어…….”
크리스는 답을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천천히 생각해 봐. 기다려 줄게.”
아네타는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자신과 같아도 좋고, 전혀 다른 관점이어도 좋다. 어떤 답을 낼지 궁금하다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돌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칼로스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아네타가 무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눈치챈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그녀가 어떤 시선으로 크리스를 바라보는지 알고 있으니 쉬이 짐작 가능하리라. 또한 앞으로 무엇을 해 주고 싶어 하는지도 그의 눈엔 훤히 보일 터였다.
“아.”
아네타와 칼로스가 말없이 시선을 마주하던 사이, 골몰히 생각에 몰두하던 크리스가 작은 탄성을 내었다.
“같은 물건을 파는 사람들끼리 협의를 통해 최저 가격을 정하면 어떨까요? 그 아래로는 가격을 낮출 수 없게 만드는 거예요.”
아네타는 심중에 두었던 방법이 크리스의 입에서 나오자 만족을 느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스의 표정 또한 밝아진다.
“가격 담합. 그걸 보통 가격 카르텔이라고 해. 폭리를 막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국가의 개입과 제한이 필요하겠지.”
아네타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오늘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은 다음 정무 회의 때까지 그 방안을 검토하고 문서로 정리하는 거야. 더할 게 있다면 더해도 좋고, 모르는 게 있으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해도 좋아. 괜찮지, 칼로스?”
아네타는 동의를 구하며 칼로스를 보았다. 처음부터 이리 될 줄 알았던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결과만 낸다면 안건으로 올려 줄 수 있어.”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의 일이라는 덧붙임이 잇따랐지만, 크리스는 주눅 들지 않고 눈을 빛냈다.
“거절하지 않을 거지?”
“그럼요.”
거절하거나 부담스러워 하면 곧장 취소할 생각이었던 아네타는 총기로 반짝이는 눈을 보며 염려를 거두었다.
“꼭 해 보고 싶어요.”
크리스는 두 주먹을 쥐며 의지를 다졌다. 만일 안건에 올리지 못해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 자명하니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두 분께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크리스는 아네타의 책상과 나란히 놓인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아네타가 출근하기 전까지 서류 분류를 끝내느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었다.
“보답이라고 하기엔 보잘 것 없지만, 부디 받아 주세요.”
수줍은 미소와 함께 건네어진 것은 화사한 파스텔 빛깔의 봉투였다. 아네타는 꼭 저 같은 것을 내민다는 감상과 함께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열어 봐도 될까?”
“당연하죠.”
무게나 부피로 봐선 쿠키 종류인 것 같은데. 아네타가 봉투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자, 내용물이 무엇인지 일러 주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사브레 쇼콜라예요.”
크리스는 곧 몸을 돌려 칼로스에게도 나머지 하나를 내밀었다.
“공작 전하께서도 받아 주시겠어요?”
“내 몫도 있는 건가?”
“아네타 님과 함께 여러모로 도와주셨으니까요.”
“그렇다면 사양 않도록 하지.”
모두 아네타를 위해 행했던 일이지만, 칼로스는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별 깍지를 이용해 만든 사브레는 꽃송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아네타는 간단하면서도 예쁜 모양에 감탄하다 하나를 집어 조심스레 베어 물었다.
사브레 특유의 식감과 함께 가운데 샌드되어 있던 가나슈가 입 안에 퍼지자, 진하고 깊은 달콤함이 혀끝을 물들인다.
“직접 만든 거야?”
“네. 어떠세요? 입에 맞으세요?”
크리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이곳에서 접한 차나 티 푸드는 하나 같이 고급 중의 고급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여 입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귀엽게 보던 아네타는 안심하라는 듯 입을 열었다.
“맛있어. 잘 만들었네.”
“하아, 다행이에요.”
짧은 새에 아네타의 성격을 파악한 크리스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었다. 빈말은 잘 하지 않는 그녀였으니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닐 터였다.
“어머니께 배운 것 중에 가장 자신 있는 걸로 만들었는데, 막상 두 분께 드리려니 걱정이 되지 뭐예요.”
“가게 하나 차려도 될 것 같은데.”
“과찬이세요.”
태연하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언급하는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아네타는 어쩌면 크리스가 자신보다 단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 냈다.
“버논의 저택은 어때. 지낼 만해?”
“부족한 것 없이 편하게 해 주세요. 곧 나와야겠지만요.”
“지낼 만한 곳이 생긴 것 같지는 않은데.”
“차차 알아봐야죠. 오라버니께 더는 폐를 끼칠 순 없으니까요. 저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미혼의 남녀가 한 저택에서 살고 있다. 가십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물어뜯기기 딱 좋은 주제였다.
흥미 충족을 위해 남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는 그네들에겐 타인의 사정 따위야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테니까.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돌지 않은 건 크리스 데번이라는 존재가 크게 드러날 일이 없어서였다. 정무 회의 안건에 올리는 걸 성공한다면 크리스가 받는 시선은 배로, 아니 그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럼 내 저택으로 오면 되겠네.”
“더는 신세지고 싶지 않은 건 아네타 님도 마찬가지인 걸요.”
“그렇다고 발티모어가의 저택으로 보낼 순 없잖아.”
아네타의 시선이 칼로스에게로 향했다.
“차라리 내가 당신 저택으로 들어갈게.”
“그건 내가 반대야.”
아네타는 그에게 닿았던 시선을 도로 거두어 들였다. 단호한 반응에 크리스의 눈매가 어색하게 휘어진다.
“뭐, 방법이야 찾아보면 나오겠지. 이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눈앞에 있는 일부터 처리하자.”
아네타는 크리스의 선물을 들고 잠시 미뤄 두었던 일을 마저 하기 위해 움직였다. 나중에 생각하자고 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
크리스는 정해진 기한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밤을 샌 날도 적지 않았고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여 버논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작정하고 일에만 몰두한 결과, 크리스는 정무 회의 전날까지 아슬아슬하게 맡은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노력에 걸맞은 결과가 나온 덕에 크리스가 검토한 안건은 무사히 회의에서 언급될 수 있었다.
반대하는 이의 수는 적지 않았지만, 안건은 좌초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러셀의 선택을 받은 덕이었다.
러셀은 크리스 데번이라는 이름에 누구보다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데번 남작가에 있었던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는 제법 강단 있는 인재의 등장에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아네타와 버논이 뒤에서 버티고 있고, 칼로스 역시 그럴듯한 평가를 내놓는 것만 보아도 될성부른 나무임이 분명했다.
러셀의 기대는 끝도 없이 밀려드는 서류 지옥으로 돌아왔다. 잠시의 여유를 만끽하던 아네타와 칼로스 역시 그에 뒷덜미를 잡혔다.
크리스를 포함한 셋 모두에게 카르텔 안건을 더 확실히 수정한 뒤 실행에 옮기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다른 부서의 업무와 겹치는 감이 있지만, 워낙 상호 간에 협력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다들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이 품목에 한해서는 제한을 더욱 강화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동감이야. 이런 경우는 조금 더 느슨하게 풀어 주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애매하네. 우선 다른 부서에 자문을 구해 보고 결정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각 부의 장관들이 승인을 낸 서류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상황. 세 사람은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크리스는 워커홀릭이라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따라가기 벅찬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있는 크리스를 발견한 건, 칼로스와 의견을 주고받으면서도 틈틈이 그녀의 상태를 살피던 아네타였다.
“크리스. 힘들면 가서 눈 좀 붙이고 와.”
“아니,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화들짝 놀란 크리스는 잠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두 뺨을 쳤다. 권유를 거절하며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지만, 그녀의 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감기고 말았다.
아네타는 기절하듯 잠들어 버린 크리스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잠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조심스레 눕힌 아네타는 칼로스를 돌아보았다.
말없이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눈치챈 칼로스는 겉옷을 벗었다.
그가 건넨 옷은 곧장 크리스의 상체에 덮여졌다.
크리스에게 자리를 양보한 탓에 남은 자리는 칼로스의 옆자리뿐이었다. 그걸 아는 칼로스는 은근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
“내 옆에 앉을 거지?”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더 낮아진 채로 들려왔다. 별거 아닌 말이 남몰래 속삭이는 밀어처럼 귓가에 은밀하게 스몄다.
“아니.”
아네타는 단호한 음성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칼로스는 의자를 가지고 오는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못 당해 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