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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21화 (21/122)

21화. 동질감 (2)

조기 퇴근이라는 명목으로 크리스를 돌려보낸 뒤, 아네타는 나머지 서류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빚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은데.”

“네가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몰랐어.”

버논은 두루뭉술하게 적힌 내용을 떠올렸다. 아네타는 크리스가 가진 권리 중 몇 가지를 더 요구했고, 크리스는 기꺼이 응했다.

크리스는 자신이 조금도 손해 볼만한 사항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그냥 넘겼겠지만, 덕분에 버논은 그녀 대신 빚을 청산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왕 돕기로 한 일이니 제대로 도와야지. 네게 지워 둘 빚의 무게도 더할 겸.”

“고맙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라면 뭐든 도울게.”

버논은 아네타를 은인 대하듯 바라보았다. 오늘 받은 도움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아네타. 넌 채무 인수만 해 줘. 빚은 내가 청산할게.”

“아니. 그건 네가 해야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뭐? 어째서?”

“넌 이미 남작에게 거절당했을 것 같아서. 내 말이 틀려?”

청산을 위해서는 본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대신 갚아 주고 싶어도 번번이 거절당했던 버논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걸 어떻게…….”

“너라면 그 애를 내 밑에 붙여 줄 게 아니라 그 빚을 모두 갚아 주려 했을 테니까. 그런데도 여기까지 질질 끌고 온 걸 보면 결과야 뻔하지.”

반박할 수 없는 말들의 연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보기엔 그 애, 네게 폐를 끼치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신세 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아네타는 보고 느낀 걸 그대로 말했다. 크리스가 버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이유를 꿰뚫어 보았지만,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주제넘은 일이니까.

“내가 빚 청산이 가능하게끔 만든 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야. 그러니 남작의 허락을 받기 전까진 꿈도 꾸지 마.”

“정말 안 돼?”

“안 돼.”

가까스로 붙들었던, 아니 붙든 줄 알았던 기회가 실은 반쯤 썩은 동아줄이었단다. 버논은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아네타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아.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네.”

“뭐든지 말만 해.”

“굳이 갚아 주고 싶으면 그 애 돈이 네 돈이 되고, 네 돈이 그 애 돈이 되는 관계가 돼서 다시 와. 그땐 기꺼이 받아 줄게.”

“……너, 너 내가 크리스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

버논의 얼굴이 불붙은 듯 화르륵 달아올랐다. 아네타는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그에게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렇게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보고 있는데 누가 몰라.”

“네 옆에도 그런 놈 하나 있는데. 딱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더만. 지금도 너 보고 싶다고 우울해하고 있을 걸.”

“……우리 서로 얻을 거 하나 없는 대화는 그만하자.”

“……바라던 바야.”

***

“자, 이게 차용 증서야.”

“수고했어.”

이틀이 지난 뒤, 아네타는 버논이 내민 차용 증서를 받아 들었다. 이사벨에게서 경과를 들어 그가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던 아네타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것을 훑었다.

아네타가 보고 싶어 잠시 짬을 내어 찾아온 칼로스가 묵연한 시선을 던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남은 과정을 착실히 밟아 나갔다.

바람에 밀려 너울대는 커튼 위로 오전의 햇살이 비껴져 내려왔다. 발밑에 얼룩처럼 번진 그림자가 변화를 거듭하며 일렁였다.

평화로운 광경 속에 녹아든 각자의 노력은 전에 없던 변화를 가져올 것이 자명했다.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해 준 만큼 부려 먹을 거니까. 네게 양심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복지부 일에 섣불리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버논은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농담에 가까운 경고를 받아넘겼다. 뒤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이 위세를 더해 가고 있으니 이만 물러가는 게 좋을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리자마자 썩 꺼지라는 눈초리를 하고 있는 칼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미동 없이 서서 아네타만을 기다리는 모습이 꼭 잘 훈련된 개 같았다.

“난 이만 간다.”

툭 내뱉은 한 마디에 곱지 않던 기세가 기다렸다는 듯 누그러진다. 사랑 앞에 우정 없다는 말을 실감한 버논은 혀를 끌끌 차며 걸음을 옮겼다.

버논이 닫힌 문 너머로 사라지기 무섭게, 아네타는 손에 든 차용증을 고쳐 잡았다. 멀어지는 발소리에 맞추어 종이 찢는 소리가 잇따라 내부를 울렸다.

방해꾼의 퇴장에 기뻐하며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 가던 칼로스는 찢겨진 차용증을 보며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역시 당신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그는 낯간지러운 말과 함께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당신이 그렇게 마음 써 주는 걸 보니 그 애가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아. 미리 말해 두는데, 질투하는 거 맞아.”

“이건 일종의 투자야.”

“거짓말.”

칼같이 단호한 음성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는 찢어진 차용증 조각을 한 곳에 모으며 말했다.

“크리스 데번에게서 당신의 과거를 본 거잖아. 성인의 문턱에 서자마자 모든 책임을 떠안고 뭐라도 해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당신을 움직인 거겠지.”

“……티 났어?”

“티 안 났어. 하지만 모를 수가 없더군. 난 당신이 가문을 지탱하기 위해 했던 노력을 모두 지켜봐 왔으니까.”

계약 결혼 역시 그 노력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칼로스는 쓰게 웃었다. 그 역시 처음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임했음에도 그 사실이 퍽 아프게 와 닿았다.

“당신,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사려져 줄 수는 없어. 대신, 날 당신 곁에 두고 감시해 줘. 내가 허튼 말을 떠들어 댈 수 없도록.”

칼로스가 매달리듯 안겨 오자, 아네타는 가까스로 그의 몸을 지탱했다. 안겨 온 것은 그였지만, 그녀가 안겨 있는 모양새였다.

“무거워.”

떨어지라는 뜻임을 알면서도, 칼로스는 알아듣지 못한 척 그녀를 제 품으로 이끌었다. 무게중심을 제게로 옮긴 뒤, 가느다란 허리를 옭아매자 그녀의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아네타는 단단한 가슴에 갇혀 그의 팔을 풀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잠깐만 이러고 있어 줘. 곧 돌아가 봐야 하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천천히 뱉어 낸 숨이 목덜미를 타고 미끄러진다. 반쯤 내리깐 시선은 처연함을 흉내 내고 있었다.

‘중간보고를 위해 들렀다고 했었나.’

루이사와 함께 가문의 기사들을 이끌고 떠났던 칼로스는 몇몇 영지에 들러 경비대를 감찰했다. 그들은 대외적인 일정을 소화하다가 때가 되면 폴터 자작을 비밀리에 구금할 예정이었다.

“부탁해.”

아네타는 어쩐지 지쳐 보이는 낯을 살피다, 밀어내는 걸 포기했다.

칼로스는 그 틈을 타 자신을 유혹하듯 희게 빛나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향기를 마음껏 탐하자 충족감이 차올랐다.

“보고 싶었어.”

그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절절한 음성은 귓가를 녹일 듯 달큰했다.

“당신이 매분, 매초 그리웠어.”

“누가 들으면 몇 년 만에 만난 줄 알겠어.”

“시간이 그리움의 무게를 결정지을 수는 없지. 난 하루가 일 년 같았어, 아네타.”

그녀를 사랑하기 전의 삶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과 함께, 그는 천천히 몸을 물렸다.

“이제 가 봐야 해.”

그녀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칼로스는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미련을 독하게 끊어 냈다.

“몸조심해.”

창가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등에 염려를 담은 목소리가 닿았다.

“걱정 마.”

잠시 뒤돌아본 칼로스는 능력을 발현하며 눈매를 휘었다.

“하루 빨리 당신이 있는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어, 아네타.”

***

아네타가 크리스에게 가장 먼저 지시한 일은 복지부 일원에게 기본적인 업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에 걸린 기간은 단 일주일.

크리스는 지금껏 온갖 고생을 해 왔고, 그로 인해 얻은 경험을 십분 활용해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

시키는 일마다 척척 해내는 덕에 복지부에 속한 이들은 아네타를 볼 때마다 크리스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바빴다.

예정보다 빨리 크리스를 불러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네타는 본격적으로 제 밑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크리스를 굴리고 또 굴렸다. 해 준 만큼 부려 먹을 거라고 했던 말을 이행한 셈이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굴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네타는 최대한 빨리, 그리고 확실하게 일 처리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가르치는 족족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니 예뻐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착하고 사려 깊기까지 하니 마음을 주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칼로스가 폴터 자작을 구금하고 루이사에게 지휘권을 위임한 뒤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아네타를 크리스에게 빼앗긴 이후였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칼로스는 저택으로 돌아가 쉬라는 러셀의 권유도 마다한 채 집무실로 향했다.

드디어 둘 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그녀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능력도 좋다. 벌써 왔어?”

“…….”

칼로스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문패를 확인했다. 분명 자신과 아네타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 잘못 들어온 게 아니었다.

“버논, 네가 왜 아네타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

“크리스가 아네타에게 업무를 배우게 됐거든. 그래서 당분간 내 집무실을 빌려주기로 했어.”

“왜 여기서 안 하고?”

“아네타가 이곳은 너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라 상의 없이 책상을 들이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인 만큼 지극히 당연한 배려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선택이 원망스러웠다.

“잠까지 줄여 가며 일한 결과가 이거라니.”

“설마 그 ‘이거’라는 게 나야? ……이봐, 칼로스. 내 말 듣고 있어?”

“가 봐야겠어.”

칼로스는 버논의 집무실로 향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기회를 놓칠세라. 대답을 듣길 포기한 버논이 잽싸게 따라붙었다.

칼로스가 아네타를 크리스에게 빼앗긴 것처럼, 버논 역시 아네타에게 크리스를 빼앗겼기에 그를 핑계 삼아 잠깐 얼굴이라도 볼 요량이었다.

“잠깐 사이에 많이 친해졌던데. 아네타 그 녀석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거 처음 봤어. 순간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니까.”

뒤이어 크리스의 표정도 밝아진 것 같다고 덧붙이는 얼굴에 옅은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네.”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관계인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칼로스는 안도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그렇게 신경을 쓰고 도움을 주더니 결국 진심마저 줘 버렸구나. 크리스를 향한 부러움이 밀려들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토록 마음을 쏟고, 또 쏟아도 그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그런 일을 불현듯 나타난 이가 해내고 말았으니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칼로스는 버논의 집무실이 가까워지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돌아오자마자 추하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침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아네타와 크리스가 돌아본다.

“칼로스?”

아네타는 기별 없이 돌아온 칼로스를 보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 살인적인 일정을 벌써 마치고 돌아오다니. 황궁에 한 번 들렀던 사실까지 떠오르자, 아네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완전히 끝내고 돌아온 거야? 이렇게 빨리?”

“그래. 완벽하게 처리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네타.”

“적어도 일주일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말했잖아. 하루가 일 년 같았다고. 한시라도 빨리 당신 곁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밤낮으로 일했어.”

칼로스의 가감 없는 애정 표현이 낯선 이는 크리스뿐이었다. 놀라움에 입을 벌린 크리스는 버논의 모습을 힐끔 훔쳐보았다.

제 마음을 제대로 표현 한 번 해 보지 못한 그녀였기에, 칼로스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당신이 없더군.”

크리스가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로스의 신경은 오직 아네타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데리러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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