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동질감 (1)
두 사람이 공유하던 집무실은 며칠 사이 아네타 혼자만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머물던 공간은 그녀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자 완전한 고요를 이루었다.
아네타는 최종 확인을 끝낸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보고서 작성과 증거물 확보를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던 건 모두 칼로스가 넘겨준 자료 덕분이었다.
파일로와 볼터는 돈을 써서 후계자들의 악행을 덮은 것으로도 모자라 수십 차례에 걸쳐 비리를 저질렀다. 아네타는 그에 대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는 자료를 토대로 만발의 준비를 갖추었다.
모든 정황을 파악한 러셀은 예상대로 살이 에일 듯 냉엄한 분노를 보였다. 아네타로부터 경비병들의 발언을 전해 듣고 곧바로 테르사를 불러 경비대 감찰을 명하기도 했다.
칼로스도 대외적으로는 이 일과 관련하여 자리를 비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일은 돈으로 무마된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알맞은 도움을 주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들어오세요.”
고개를 들어 열리는 문을 응시하자,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버논 케이너?”
사적인 자리에서 마주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동갑내기 사촌의 방문은 의문, 그 자체였다.
“네가 어쩐 일이야?”
그가 칼로스의 행방을 모를 리 없으니 용건은 그녀에게 있을 터였다. 아네타는 필시 무거웠을 걸음을 예상하며 물었다.
“부탁이 있어서 왔어.”
“내게?”
“그래.”
“별일이네. 네가 내게 도움을 청하러 오다니.”
버논의 어머니인 릴리에트는 오라비인 데릭이라면 학을 뗐고, 친정인 아데나워 저택 쪽으로는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고모로서 조카인 아네타를 가엽게 여기기는 하였으나, 그뿐이었다.
각자의 어머니, 아버지가 서로를 벌레 보듯이 하니 버논과 아네타 사이에 교류가 있을 리 만무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서로 무언가를 부탁하고 들어줄 사이는 아니잖아.”
부모님 세대에 남보다 못한 관계였던 것을 직설적으로 지적하자, 할 말이 없는 그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아니라지만, 그사이 벌어진 간극을 메운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네타는 잠시 망설이는 그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가 앉았다.
“일단 앉아. 무슨 부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 보고 결정할게.”
버논의 말을 들어 보기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크리스 때문이었다. 혹여 그녀와 관련한 부탁일까 싶어서.
아네타는 집무실 주인으로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차를 내렸다. 우러나는 찻물을 보던 그는 앞서 언급한 ‘부탁’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영지에 머물 때 가까이 지내던 아이가 있어. 크리스 데번이라고, 너도 한 번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일 거야.”
이미 한 번 마주한 적 있다는 사실쯤은 그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아네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버논은 크리스의 이름과 함께 사정 설명을 시작했다.
전 데번 남작 부부가 마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부터, 두 사람의 부재로 인해 생긴 피해가 고스란히 빚이 되어 갓 성인이 된 크리스 등에 얹어진 것까지.
“채권자는 영지를 넘기면 빚을 탕감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어. 세금으로 빚을 갚고 있는 데다, 영지를 넘기면 갈 곳 없는 가솔들이 머물 곳을 잃게 되니까.”
제도에 타운하우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더욱 막막했을 터였다.
“크리스는 내게 일자리를 주선해 달라는 부탁밖에 하지 않았어.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널 찾아온 거야.”
“왜 하필 내 밑으로 보내려는 거야?”
“그 아이가 널 보며 꿈을 갖기 시작했거든.”
빚을 청산하는 것밖에 바라는 게 없던 그녀가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네타에 대해 묻고, 알아 갈 때마다 어둠을 애써 감추던 낯빛을 환히 밝혔다.
버논은 그 모습을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었다.
“부탁한다, 아네타. 크리스를 보좌로 받아 주었으면 해.”
아네타는 주저 없이 고개를 숙인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간이 지나도 깊숙이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 들어, 버논. 이런 방법보다는 내가 얻는 이득에 대해 말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 편이 더 빠르고 확실할 테니까. 아무 능력도 없는 아이를 무작정 내 밑으로 들이밀 정도로 경우 없고 대책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 너.”
그에 잠시 생각을 정리한 버논이 고개를 들었다.
“영지 주민들과 어울리는 걸 서슴지 않던 아이라 그들의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가끔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의견을 내기도 하고. 인내심이나 끈기는 내가 보장할게. 분명 네게 도움이 될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뛰어난 그였기에, 마음이 동했다.
버논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충분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고개 숙일 줄 아는 모습에 감명을 받기도 했고, 크리스 또한 마음에 들었다.
“좋아.”
아네타는 짧은 고민을 끝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 너, 내게 빚 하나 진 걸로 하자. 불만 없지?”
“있을 리가.”
고맙다고 말하는 버논의 얼굴엔 어느새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아네타는 크리스라는 인물에 관심이 많았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어 만남을 언급하자 그의 등장만큼이나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지금 바로 가능해. 내 집무실에 있거든.”
“……솔직히 말해 봐. 작정하고 온 거지?”
“반쯤은.”
아네타는 그 당당함에 혀를 내두르다,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혼자 기다리고 있겠네. 네 집무실로 가자.”
집무실이 어디인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아네타는 버논보다 앞서 이전의 집무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동안 버논은 크리스가 그녀 밑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거절당하면 실망할 것 같아서 비밀로 했다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데번 남작은 곧 만날 테니까 로디온 이야기나 좀 해 봐. 알버릭 학원에 조기 입학했다며.”
아네타는 버논의 어린 동생을 언급했다. 로디온은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케이너 가의 늦둥이였다.
연회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로 친해진 아이는 케이너 성을 단 이들 중 유일하게 아네타와 친분이 있었다.
누님과 혼인하고 싶다고 말하다 이미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엉엉 울던 모습을 떠올린 아네타는 아이의 근황이 궁금했다.
“그 녀석은 여전해. 타인과 어울리는 걸 꺼려한다던데.”
벌써부터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처럼 구는 모습이 걱정된다고 말한 버논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 있을 크리스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며, 아네타는 로디온과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했다.
아이는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이들이 두렵고,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버논 오라버니, 오셨어요?”
열린 문을 지나 버논의 뒤를 따르자, 지금 막 몸을 일으킨 크리스가 멈칫하며 굳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어 그냥 내버려 둘까 했지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우리 구면이지?”
아네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크리스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인사해. 알고 있겠지만, 이쪽은 내 사촌인 아네타 아데나워.”
앙숙이라 불리던 두 집안을 알고 있기에, 그가 직접 아네타를 데리고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늘부터 네 고용주가 되어 줄 사람이기도 해.”
그뿐만 아니라 소개해 준다던 일자리가 그녀의 밑이라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반면, 크리스의 몸은 착실히 움직였다.
“일전의 그 일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겉보기엔 형식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아네타 딴에는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대략적인 사정은 버논에게 들었어. 지금부터 남작에게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하는데, 부디 기분 상하지 않길 바랄게.”
크리스는 긴장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 밑에서 일하는 거에 대해선 불만 없지?”
“당연하죠. 오히려 영광이에요.”
“하지만 그 전에 정리해야 할 문제가 있어.”
“그게 뭔가요……?”
“공교롭게도 난, 복잡한 채무 관계에 얽힌 사람이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걸 꺼려 하거든.”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본인의 잘못으로 진 것이 아니라면, 빚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상대를 판단해선 안 된다. 그럼에도 언급하는 이유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크리스의 낯빛에 그림자가 졌다.
빚을 갚기 전엔 내 밑에서 일할 생각하지 마라. 대강 그런 뜻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채용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야. 대신, 남작의 채무를 내가 인수하겠다는 뜻이지.”
“각하께 또 한 번 폐를 끼칠 순 없어요!”
크리스는 펄쩍 뛰며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파격적인 제안에 놀란 눈을 하는 건 버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네타는 다시 봤다는 듯 던져 오는 시선을 무시하고 강수를 두었다.
“그래. 내 밑에서 일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래도 그 자리가 욕심은 나는지, 크리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네타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여전히 선망이 담겨 있었다.
“대신 갚아 주겠다는 말은 안 했어. 인수하겠다고 했지. 적어도 이자는 붙지 않을 테니까.”
이자라는 말에 작은 몸이 움찔 떨린다. 반쯤 넘어온 게 분명하다.
아네타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나이에 복지부 장관씩이나 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능력을 인정받아서?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이 많아서야.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썩어 날 정도로 많아서. 백성들에게 돌아갈 예산에 손 댈 걱정이 전혀 없거든.”
버논이 좀 재수 없다며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아네타는 그 역시 무시했다.
“그러니 그 정도 지출은 절대 내게 무리가 되지 않아.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크리스는 아네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를 속이려 드는 게 아닐까. 동경의 대상을 상대로 잠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남들의 눈에 비치는 것처럼 크리스는 마냥 순진하지 않았다.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아무리 사촌의 부탁이 있었대도, 겨우 두 번 만난 사람에게 이런 식의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신뢰가 되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믿음이 가슴에 콕 박혀 싹을 틔웠다.
크리스는 난생 처음 겪어 보는 그 기이함을 거부하지 않았다.
“강요는 하지 않아. 내키지 않는다면 먼저 이 자리를 떠도 좋고.”
“……그럼,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고민하는 것부터가 사치였다. 크리스는 버논을 바라보았다. 남몰래 가슴에 품은 그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와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라며, 크리스는 다짐했다.
“두 분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반드시 보답할 거예요.”
아네타는 그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웃음으로 화답했다.
계약서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작성되었다. 채무 인수에 동의한다는 항목을 끝으로 확인을 마친 크리스가 서명과 함께 지장을 찍었다.
“나머지 일은 네가 알아서 이사벨과 함께 처리해.”
아네타는 집사를 언급하며 두 개의 계약서 중 하나를 버논에게 떠넘겼다.
버논은 두루뭉술한 내용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지만 아네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하지 마.
표정으로 그리 말하니 벌어지던 그의 입술이 얌전히 다물렸다.
다른 건 몰라도 크리스에게 해가 될 일은 없을 터였다.
“계약서에 따르면 오늘이 첫날인데, 첫날엔 역시 조기 퇴근을 시켜 줘야지. 먼저 돌아가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