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우연 아닌 우연 (9)
마차에 오른 아네타는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잠들어 버렸다. 기대 오는 몸을 기꺼운 마음으로 감싸 안은 칼로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무런 사심도 담겨 있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는 여느 때처럼 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랑, 애정, 걱정, 갈망, 그리고 독점욕.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마음을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부러 다른 말을 찾으려 애를 쓰진 않았다. 만족은 없을 것이며, 답을 갈구하는 헤맴 속에 제 자신을 끝없이 내던지고 말 테니.
아네타.
그 이름 석 자만으로 이리도 짙은 울림과 떨림을 주는데 다른 말이 무에 필요할까.
칼로스는 아네타의 감긴 눈 위로 슬며시 입을 맞추었다. 이 아래 자리한 슬픔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머물며 그러한 감정의 편린을 수도 없이 마주했지만, 그는 차마 당신을 괴롭히는 게 무어냐고 물을 수 없었다.
입에 담는 순간, 눈치챈 것을 티 내는 순간 그녀가 영원히 제 곁을 떠나갈 것만 같아서.
그것은 본능과도 같은 직감이었다.
처음엔 그녀의 겉마른 슬픔이 가족사와 관련한 불행에서 기인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둠은 그보다 더 깊고 첨예했다.
아네타는 늘 경계하고 불안해했다. 마치 형체 없는 무언가에 위협을 받고 있는 것처럼.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어둠을 제가 모두 삼키고 싶었다. 그녀를 겨눈 무언가를 제가 다 받아 내고 싶었다.
그리해서 그녀가 웃을 수 있다면 어차피 썩어 땅으로 돌아갈 몸뚱이 따위, 기꺼이 바치리라.
“사랑해, 아네타.”
또 한 번, 응답 없는 사랑의 속삭임이 허공을 울렸다.
***
깊은 잠에 빠졌던 아네타는 무언가가 침대 위로 풀쩍 뛰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곁으로 다가와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한 누군가는 곧 입술과 뺨을 구분 없이 핥아 대기 시작했다.
아네타는 그 까슬한 감촉에 미간을 찌푸렸다. 검고 거대한 형태에 흐릿한 시야를 맞추려는데, 뒤이어 들려온 칼로스의 목소리가 범인의 정체를 밝혔다.
“당장 이리 와, 티르.”
시야를 회복한 아네타는 그제야 제 위에 올라탄 게 칼로스의 반려견인 티르라는 사실을 깨닫고 탄성을 뱉었다.
“아.”
사자를 닮은 외견부터 남다른 몸집, 새까맣고 풍성한 털, 그리고 주인보다 조금 더 노란빛을 띠는 금안까지.
맹수처럼 사나워 보이는 생김새를 하나하나 뜯어보던 아네타는 익숙한 듯 손을 뻗어 턱 아래를 살살 긁어 주었다.
“오랜만이야, 티르.”
“멍!”
주인의 부름을 쌩하니 무시하던 티르는 아네타가 제 이름을 부르자 힘차게 대답하며 그녀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풍성한 꼬리를 쉴 새 없이 흔드는 것으로 반가움을 표현하자, 이미 차별에 익숙해진 칼로스가 이마를 짚는다.
저거, 저거. 꼬리치는 것 좀 봐라. 누가 진짜 주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칼로스는 한숨과 함께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지칠 줄 모르고 애교를 부리는 반려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내숭도 저런 내숭이 없다.
“부럽네.”
“내가?”
아네타는 물음과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그를 눈치채고 잠시 몸을 물린 티르는 그녀가 허리를 세우자 다시 몸을 비벼왔다.
“아니. 티르가 부러워. 키스로 잠을 깨우는 건 내가 하고 싶었는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군.”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티르를 바라보는 칼로스의 눈에는 부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티르가 조금 더 그리움을 해소할 시간을 주며 기다리다, 단호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티르, 이제 그만 나가 봐.”
끼잉끼잉. 애처로운 투정에도 칼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것뿐임을 아는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에 언제 애처로운 모습을 보였냐는 듯, 심통이 난 티르가 침대에서 내려가 주인의 다리를 부러 툭 치고 지나갔다.
문 앞에 멈춰 서서 정말 날 보낼 거냐는 듯 돌아보는데, 이번에도 칼로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고개를 팩 돌려 버린 티르가 위협적인 걸음으로 떠나가자,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던 아네타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런데 내가 왜 당신 침실에서 자고 있던 거야?”
“마차 안에서 잠들었길래 사심이나 채워 볼까 하고 데리고 왔어. 그 시작을 티르가 다 망쳐 버렸지만.”
칼로스는 자신의 작은, 아니.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친구를 떠올렸다.
내일은 꼼짝없이 녀석을 달래 주어야 할 테지만, 아무리 반려견이라도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분간은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질 테니까.
칼로스는 내일부터 시작될 폴터 자작 구금 계획을 상기했다.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세상이 무채색으로 보이는 듯했다.
아네타 곁에 붙어 있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쳤지만, 그는 곧 그것을 다잡았다.
아네타가 계획한 일이다. 그러니 그 일을 망칠 수 없었다.
“사심은 혼자서도 열심히 충족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네타는 턱짓으로 방금까지 덮고 자던 침구를 가리켰다. 기어코 새로 바꾼 향수를 찾아낸 것인지, 익숙한 향이 은은하게 풍겨 왔다.
“하지만 아네타.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깊고 깊어서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아무리 같은 향수를 뿌려 놓아도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과 완벽히 같을 수는 없었다. 체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니까.
그 사실이 못내 아쉽던 칼로스는 기억 저편에 있던 물건 하나를 떠올렸다.
또 하나의 사심을 채울 수 있을 거라 여긴 그는 몸을 움직여 그것을 찾아왔다.
“같은 향의 크림도 있어. 발라 볼래?”
“크림?”
“특이하게 손에 바르는 거라더군.”
아아, 핸드크림. 아네타는 이곳에 그런 것도 있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내가 직접 발라 주고 싶은데.”
“그럼 거절할게.”
“당신 주려고 힘들게 구해 왔어. 성의를 봐서라도 한 번만.”
“…….”
“내일부터는 폴터 자작과 관련한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텐데. 제대로 쉴 시간도 없을 테고, 잠깐 얼굴 보는 것도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몰라.”
칼로스는 쉴 새 없이 그녀의 마음이 약해질 만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에 아네타는 결국 당신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한숨을 뱉었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칼로스는 그녀의 마음이 변할세라, 얼른 뚜껑을 열었다. 약간의 점성이 느껴지는 크림을 제 손에 덜어 낸 그는 곧 아네타의 손을 잡아왔다.
“사실, 이것도 나 좋으라고 구해 온 거야.”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사랑 고백을 하듯 몸을 낮춘 칼로스는 먼저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을 얽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기분 좋네.”
여실히 느껴지는 굴곡이 알 수 없는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칼로스는 뼈마디를 둥글게 굴렸다.
아네타는 제 손을 문지르는 그의 행동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피부 결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하려는 듯, 진득한 손길을 보내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네타는 그의 손이 손목을 타고 오르려 할 때 건네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해진 것은 비단 그녀의 손뿐만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금안은 아쉬움에 점철되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조금만 더.
눈으로 호소하는 그였지만, 아네타는 단호했다.
“안 돼.”
칼로스는 체념한 듯 낮추었던 몸을 일으켰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사심으로 가득 찬 하루였어.”
“아직 끝은 아니지 않나. 나, 밤에도 한가한데.”
“어림도 없어, 칼로스.”
창밖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아네타는 슬슬 돌아가 봐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린든이 당신 몫까지 식사 준비를 하겠다고 했어.”
“부탁이라면 이전에 한 번 들어준 게 있으니 거절하겠다고 전해 줘.”
“아니. 당신은 거절하지 않을걸.”
주저 없는 단언에 아네타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나치게 확신하는데.”
“당신이 잠든 사이에 파일로와 볼터에 관한 조사를 지시해 두었어. 아마 저녁 식사를 마칠 때쯤엔 끝나지 않을까 싶은데. 제안을 거절한다면 내일 아침에나 집무실로 서류를 보낼 생각이지만, 당신이라면 가능한 빨리 확인하길 바랄 것 같아서.”
정답이었다. 아네타는 그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식사 제안에 응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당신이 이런 수를 둘 줄은 몰랐어.”
“여우 같은 짓인 건 알지만, 예쁘게 봐줘. 당신 곁에 설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할 거니까.”
“……내가 졌어.”
저런 말을 어떻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할 수 있을까. 아네타는 칼로스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기분으로 백기를 흔들었다.
황제의 오른팔씩이나 되는 이가 그 좋은 머리로 작정하고 덤벼드니 당해 낼 방도가 없다.
“단, 딱 식사까지만이야. 후식이니 차니 하면서 말 바꾸는 일은 없길 바라.”
“믿어 줘.”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온 걸까. 아네타는 만족스럽게 웃는 칼로스를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느껴 왔지만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아니면 맹목적인 사랑 고백을 어느 누구에게 들을 수 있을까.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알림은 아네타의 승낙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날아들었다.
그녀는 들뜬 기색을 보이는 칼로스와 나란히 걸었다. 얼마 만에 함께 하는 식사인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칼로스는 부러 아네타를 안내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가 공작부인이라는 직함을 달고 이곳에서 지낼 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그때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식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상석을 비운 채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주로 경비대와 관련한 것들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수도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가능한 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 같은데.”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그녀의 앞에 놓아준 칼로스가 굳은 얼굴로 근심을 드러냈다.
“정석대로라면 암행 보고서에 기재해서 올려야 할 테지.”
아네타는 손에 든 포크로 샐러드를 찍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른 과정 다 제쳐 두고 바로 보고를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살다 보면 정해진 룰을 무시하고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는 때가 오는데, 아네타는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여겼다.
정석대로 한답시고 보고를 늦추면 러셀의 불호령이 날아들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지금쯤이면 러셀 역시 어느 정도의 상황 파악은 끝냈을 테지만, 그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닌 만큼 보고는 불가피했다.
“군 관련 업무는 아니지만 로펠락 후작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이번 일은 내가 곁에서 도울 수 없으니까.”
“내 생각도 같아. 그래서 테르사에게 따로 협조를 구해 보려고.”
황제 주변 인물들은 부서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네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네타는 평소 주관하던 쪽의 일이 아닌 만큼 테르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겼다. 러셀에게 보고를 올리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의 전부는 아니었으니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꾸준히 음식을 입으로 날랐다. 요리사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음식 맛을 즐길 여력은 없었다.
골몰히 생각에 빠져 있던 아네타는 어느 순간 음식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마주쳐 오는 금안에, 그녀는 그의 앞에 놓인 음식을 살폈다.
손을 댄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함께 식사하자더니 지금껏 그녀가 먹는 모습만 지켜본 것이다.
“당신은 안 먹어?”
“먹고 있어.”
“그런 것치고는 손을 댄 흔적이 없는데.”
심지어 본인 몫의 스테이크는 썰지도 않았다. 아네타는 포크를 놓아두고 그를 보았다.
“사실, 반성하는 중이야. 예정에도 없던 일을 만들어서 당신을 곤란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해.”
“……딱히 그렇지만도 않아.”
뱃놀이를 할 때 받았던 무언의 위로를 떠올린 아네타의 입에서 애매한 부정이 나왔다.
그에, 칼로스는 길게 뻗은 검지로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사과의 의미로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게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
야살스레 휘어진 눈매가 유혹적이었지만, 그리 동하진 않았다.
아네타는 잠시 내려 두었던 포크를 다시 쥐며 거절을 표했다.
“미안하지만, 필요 없을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