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우연 아닌 우연 (8)
휘날린 깃털과 같은 색의 날개가 허리에 둘러졌다. 거대한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던 칼로스는 한순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머리카락 사이로 몸체를 디밀어 온 바람 때문에, 길게 늘어진 금빛이 허공으로 떠올라 시야를 가렸다.
칼로스는 본래의 형태로 돌아온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서서히 잦아든 바람은 그녀에게만 상냥했다. 지금 그녀에게 닿아 오는 손길처럼.
칼로스는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안도했다. 다시 돌아간 장소에 그녀가 없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남겨진 것이라고는 익숙한 필체로 휘갈겨진 메모 하나.
「이걸 발견하는 즉시 날 찾으러 와 줘.」
칼로스는 메모를 발견함과 동시에 영광의 능력으로 모습을 바꿨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른 그는 골목 구석구석을 살폈다.
무슨 정신으로 날갯짓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를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맹목적으로 몰두해 있었다.
아네타를 발견한 곳은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의 골목이었다. 그녀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안도를 느끼는 건 잠시였다. 공포에 질린 채로 벽 앞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와 아네타를 향해 달려드는 사내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치미는 분노와 함께 상황 파악을 마친 칼로스는 능력을 발현했다. 그들의 명치 부근에 맴돌던 공기를 압축하여 터트리자,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신형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향해 더러운 말을 지껄인 입을 모조리 찢어 놓고 싶었다.
칼로스는 무섭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그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감싸 안았다.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군.”
먹잇감을 노리듯 번뜩이는 금안이 기절한 사내들에게로 가 닿았다. 그녀만 없었더라면 날카로운 발톱이나 검으로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 버렸을 것이다.
아네타는 공기 중에 번지는 살기를 느끼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 버튼을 누른 손을 떼지 않고 있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반대편 버튼을 하나 더 눌렀다.
잠시 진동하다가 꺼지는 그것을 확인한 아네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파열음에 놀라 버튼에서 손을 떼었더라면, 흐르는 전류를 제 몸으로 받아 냈어야 했을 것이다.
“칼로스, 겉옷 좀 빌릴 수 있을까?”
“물론.”
구슬을 대충 주머니 안에 넣어 둔 아네타는 칼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의도를 아는 칼로스는 순순히 겉옷을 벗어 건네주었다.
“잠깐, 아네타. 저것들은 내가 치워 줄 테니까 기다려.”
벽에 기대어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려 하자, 칼로스가 막아섰다.
아네타가 몸소 그들의 몸뚱이를 넘어가는 걸 두고 볼 수 없던 칼로스는 성큼성큼 걸어가 엉망으로 널브러진 몸을 구둣발로 걷어찼다.
그 일련의 행동에서마저 갈무리하지 못한 살기가 새어 나왔지만, 아네타는 모르는 척 지나쳤다. 그녀 역시 같은 심정이었던 탓이다.
‘다 자업자득이지.’
타인의 인권을 유린하려 했으니 그들의 인권 역시 존중받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괜찮니?”
아네타는 여자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성인인지 미성년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앳된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눈물을 한 방울 뚝 떨어뜨리니 평생 제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보호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다행히 아네타의 접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네타는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며 빌려 온 겉옷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몸을 낮춘 아네타는 제 옷이 바닥에 끌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곤 느리게 손을 뻗어 여리게 떨리는 몸을 제 품 안으로 이끌었다.
“이제 괜찮아. 널 해하려 하는 이는 이제 없어.”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그녀와 자신이 겪은 현실이며, 모든 이들의 곁에 도사리는 위험이다.
다수의 주인공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 의연히 맞서 싸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진득하게 자리한 공포에 짓눌려 말 한 번 제대로 꺼낼 수 없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니까.
“고마워. 무서웠을 텐데 잘 버텨 주었구나.”
이제 안심하렴. 아네타는 나직한 목소리로 거듭 속삭였다. 등허리를 토닥이는 상냥한 손길에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뒤로 물러선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로스는 고개를 돌려 구석에 처박힌 사내들을 보았다.
저들을 처리하려면 제도의 경비대를 불러야 하는데, 그녀들만 남기고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 자리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다른 방법을 떠올린 칼로스는 아네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큰 소리를 내서 경비대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부탁해.”
아네타는 대답과 함께 여자의 귀를 막았다.
그사이 칼로스는 골목 입구로 나가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돌덩이 하나를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산산이 부숴 버렸다.
쾅!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가 생각해도 참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걸 막아 낸 그는 저 멀리서 놀라 달려오는 경비대를 마주했다.
“무슨 일입니까!”
칼로스는 굉음의 원인을 묻는 경비병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골목 안쪽으로 인도했다. 그 과정에서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다.
암행을 나온 김에 그들의 역량을 알아볼 참이었다.
그가 경비대를 데리고 올 동안, 아네타는 여자를 진정시킨 뒤 몸을 일으키는 걸 돕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여자를 지탱한 다음 경비대가 사내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니, 이분들은……!”
뒤집어진 몸을 돌려 얼굴을 확인하던 경비병들이 난색을 표했다. 저열한 짓을 저지른 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존칭까지 붙여 가며.
아네타가 인상을 찡그리자 칼로스가 대신하여 이유를 물었다.
“이게 뭐기에 존칭을 붙입니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물건 취급에 그들의 안색이 더욱 희게 질렸다.
“이 근방에서 가장 돈이 많은 상인 집안의 자제분들입니다. 그러니 이분들을 이렇게 만든 게 당신들이라면 어서 가십시오. 못 본 척해 드리겠습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이들입니다.”
결론은 부잣집 자제분들이라 처리하기 곤란하다는 말이었다.
아네타는 기가 차 말문이 막혔다.
“종종 같은 일로 붙잡히긴 했는데, 그때마다 돈으로 무마하곤 했으니 이번에도 다를 게 없을 겁니다.”
언제부터 경비대가 부자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던가. 아네타는 초범이 아님에도 처벌 없이 내버려 두었다는 말에 이마를 짚었다.
썩어 빠진 뿌리 하나를 발견해 버렸다.
분노는 잠시였다. 아네타와 칼로스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이 근방에서 가장 돈 많은 상인 집안이라면, 파일로와 볼터겠군.”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듯 말이 없던 칼로스가 성을 말하자, 경비병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러셀의 즉위 이후 작위를 사고파는 것이 불가능해진 탓에, 돈 있는 걸 티 내고 싶어 하는 상인들이 택한 차선책. 그것은 이름 뒤에 성을 만들어 붙이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 두 집안이라면 축적한 재산이 많긴 하겠네.”
재산 때문에 잡아들일 수 없다면 그 재산을 통째로 빼앗아 버리면 그만이다.
아네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경비병들은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힘없는 평민들이 덤벼 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처벌은 포기하는 게 좋습니다.”
얻을 게 없으니 처벌을 포기하고 돌아가라니. 피해자에게 한다는 말이 참으로 가관이다.
아네타는 더는 정체를 숨길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칼로스. 방금 그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최악이야.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 아까울 정도군.”
칼로스. 그 이름에 반응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둘은 그저 동명이인이겠거니 하며 눈치를 살폈지만, 나머지 둘은 아니었다.
눈치 빠른 그들은 희게 질린 안색으로 칼로스를 보았다.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리는 모습이 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설마, 발티모어 공작 전하십니까?”
“그렇다면 어쩔 거지?”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더듬거리며 묻던 남자는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허둥댔다.
“저기 있는 아데나워 후작과 함께 암행을 나왔었지.”
귀족이 한 명이 아니다. 게다가 둘 모두 황제의 측근이라는 재앙 같은 상황에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내가 부딪혀 깨질 정도라고 했던가. 저들이 가진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네.”
제국 최고의 권력가와 재력가를 계란에 비유하는 우를 범한 그들은 빠른 태세 전환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겨, 결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신분을 밝히시지 않아 몰라 뵈었습니다!”
“죄지은 자를 처벌하는 일에 신분이 굳이 필요한가?”
아네타가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일갈하자, 잠자코 서 있던 여자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 왔다.
조심스러운 손길을 느낀 아네타가 비교적 유한 얼굴로 돌아보자, 그녀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기…… 저도, 귀족이에요.”
예상치 못한 말에 아네타는 당혹감을 감추며 물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이름은?”
“크리스. 제 이름은 크리스 데번이에요.”
“데번 남작?”
그녀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아네타는 몸을 움찔 떨었다. 칼로스가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았지만, 아네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주홍빛 머리카락과 고동색 눈동자. 그녀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원작의 묘사와 외관이 일치했다.
크리스 데번. 사촌인 버논과 이어지는 서브 여주인공. 그런 이가 왜 이런 곳에서 험한 일을 당할 뻔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당장 저들을 구금하도록. 처벌은 이제껏 저질러 온 범행을 낱낱이 파헤친 뒤에 한다. 어영부영 넘어갔던 경비대 또한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며, 이번 일마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가중처벌 될 거다.”
칼로스의 서슬 퍼런 경고가 이어지자, 아네타는 일단 머릿속에 맴도는 복잡한 생각을 밀어냈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상기한 그녀는 가문의 문장이 섬세하게 수놓아진 손수건을 꺼냈다.
“믿을 수 있는 건 권력의 힘뿐인 것 같으니 장단에 맞춰 줘야지. 저들을 감옥에서 꺼내려 드는 자가 있다면 이걸 보여 줘.”
가문의 문장, 그리고 그 아래에 새겨진 이니셜. 가볍지 않은 의미의 물건을 내어 준 이유는 확실하면서도 간결했다.
쉽게 말해, 뜻에 반하는 이가 있다면 가문의 이름을 걸고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네타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 든 경비병은 이 일에 경비대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경비대의 뒤를 봐주던 귀족들이 떠올랐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인식하는 순간 희망을 버렸다.
저들을 막을 수 있는 건 황제가 유일했다.
“아네타,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게 어때.”
“좋아. 하지만 그 전에 남작에게 줄 게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줘.”
아네타는 무해한 초식 동물처럼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크리스에게 호신용 구슬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구슬을 두 손으로 소중히 받아 든 크리스가 얼떨떨하게 묻자, 아네타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호신용 구슬.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 사용하렴.”
사용법을 설명하자 이런 물건은 받을 수 없다며 펄쩍 뛰었다. 아네타는 그 모습이 귀여워 억지로 구슬을 쥐여 주었다.
혼자 돌아갈 수 있겠냐는 물음은 하지 않았다. 칼로스는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경비병 중 한 명을 지목해 책임지고 크리스를 안전히 데려다줄 것을 명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황을 정리한 뒤, 마차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린 두 사람의 등 뒤로 감사 인사가 들려왔다.
무시할 수 없어 잠깐 돌아보자, 선망 어린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있었다.
“저 아이, 마음에 드네.”
“그거 조금 질투 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