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17화 (17/122)

17화. 우연 아닌 우연 (7)

안정감 있게 달리던 마차가 파필 거리 입구 앞에 멈추어 섰다.

국민들의 삶이 진득하게 녹아든 거리에 발을 딛고 선 아네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궁과 멀리 떨어져 있어 귀족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이곳은 하루하루 바삐 살아가는 이들의 한숨과 잔잔히 흘러가는 일상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잘 닦인 도로 위를 달리는 건 대개 짐마차였다. 그 외의 마차라고는 요금을 받고 운행하는 것이거나, 갑부가 끌고 나온 것뿐일 터였다.

애초에 마차라는 것이 아무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호기심 어린 시선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그 안에서 나온 이들의 외모마저 범상치 않으니 더욱 눈길을 끌었다.

“가자, 아네타.”

“지리는 알고 있어?”

“대충은.”

칼로스는 전날 지도를 보고 왔다며 아네타를 이끌었다.

새벽에 잠깐 쏟아졌던 비 때문인지, 거리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부드러이 이끄는 그 덕분에 발을 적시는 일은 없었다.

암행의 목적은 국민들의 생활이나 치안을 살피는 것이었다. 더불어 에레즈에 대한 여론을 파악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아네타는 맡은 바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세히 살피고, 기록할 것이 있다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기록했다.

그런 아네타의 곁을 지키던 칼로스는 그녀에게 향하는 시선이 있으면 귀신같이 반응하여 사나운 시선을 쏘아 보냈다.

여차하면 검을 뽑아 들 것 같은 기세에 주춤거리다 눈을 돌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아네타를 향한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 별개로, 저에게 닿는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네타는 그런 칼로스의 행동을 알고 있음에도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았다.

거리를 거니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칼로스의 배려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네타는 슬슬 발이 아파 오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잠깐 쉬었다 가자고 말할까 고민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그녀의 상태를 눈치챈 칼로스가 말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쉴 곳을 찾던 칼로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강가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연인이었다.

작은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 아름답게 흐드러진 꽃나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어우러진 연인이 못내 부러워진 칼로스는 아네타를 멈춰 세웠다.

“잠깐 쉬었다 가는 게 좋겠어, 아네타.”

“나도 그러고 싶지만 딱히 그럴 만한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아네타는 제 손목을 부드럽게 감싼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곳은 거리의 상가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였다. 걷다 보니 외곽으로 나와 버렸고, 주변에 벤치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없었다.

“있어, 저기.”

아네타는 어딘가를 가리키는 그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어느새 연인이 떠나간 강가였다.

“……당신이 바라는 게 영원한 휴식은 아니지?”

아네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입가에 웃음을 띠운 칼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은 배를 빌리자는 거였어.”

“칼로스. 우리 지금 놀러 나온 거 아니야.”

외근을 하러 나와서 뱃놀이를 하자니. 알 만한 이가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반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했다.

무엇보다 발이 너무 아팠다.

“말은 그렇게 해도 혹하긴 한 것 같은데.”

아네타는 부정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면 괜찮을지도.”

그녀는 결국 칼로스의 제안에 응하며, 그가 기쁜 얼굴로 내민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적어도 뒷일에 대한 걱정은 없어서 좋네.’

황제가 누구보다 귀히 여기는 이가 바로 눈앞의 남자였으니, 겨우 뱃놀이 한 번 한 걸로 문책을 당하진 않을 것이다.

비가 내린 탓에 강물은 조금 불어 있었다. 칼로스는 무리 없이 조각배 한 척을 빌렸다. 가진 돈의 액수가 너무 커 배 주인이 당황하는 일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나란히 배 위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가 노를 젓자, 배가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행여 그녀에게 물이라도 튈까. 느릿하게 반복되는 움직임이었다.

일렁이는 물결이 수면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일그러뜨린다. 묘한 이질감을 느낀 아네타는 그 위로 손을 뻗었다.

지금의 상황이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손끝을 휘감아 오는 물의 온도가 시리도록 생생했다.

순간 감정이 욱하고 치밀었다.

‘난 지금 이 자리에, 그와 함께 있어도 되는 걸까.’

불확실한 현재와 미래. 다른 이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녀에겐 아니었다.

강제가 남긴 상처는 컸다. 그것이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아네타는 밀려드는 불안을 느꼈다.

후유증이었다.

응어리진 감정이 그녀를 무겁게 내리누를 때였다. 머리 위로 그늘이 지더니, 꽃내음이 훅 끼쳐 왔다.

아네타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빛을 받아 시린 눈가에 분홍빛이 너울댔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꽃나무 아래를 지나는 배 위로 쏟아지는 것은 꽃비였다.

취할 듯 매혹적인 향기는 아름다운 광경과 함께 그녀에게 밀려들었다.

숨이 멎을 듯 비현실적인 풍경을 이룬 꽃잎은 여린 날갯짓을 마치고 마침내 그녀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믿을 수 없게도, 꽃잎이 닿은 손등에 온기가 번지는 듯했다.

아네타는 마주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착각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속절없이 스며드는 무언의 위로가 그녀를 무저갱에서 끌어올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안도했다. 일렁이는 물결을 닮아 위태롭던 그녀의 눈동자는 그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었는데, 어땠어?”

모르는 척 능청을 떠는 모습에 가슴에서 작은 파동이 일었다. 그가 능력으로 제 마음을 울리는 건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능력이 아닐 텐데.”

아네타는 그 낯선 감정을 내리눌렀다. 그러곤 그의 말투에 따라 장난스레 대꾸했다.

“내가 가진 모든 건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발티모어의 초대 가주가 들으면 관 뚜껑 열고 일어날 소리인 건 알지?”

“물론. 하지만 그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아.”

그의 단언에 아네타는 그냥 웃어 버렸다. 이번만은 도무지 싫은 소리를 건넬 수 없었다.

“고마워, 위로해 줘서.”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말이 아닌데.”

“그럼?”

“사랑해.”

칼로스는 아네타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알아. 아직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알면서도 계속 이렇게 언급하는 건 내 마음을 잊지 말아 달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아네타. 어서 날 봐 달라고 부담 주는 거니까.”

부담 주려고 하는 말이라고 했지만, 도리어 그동안 느껴 왔던 부담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네타가 싱숭생숭한 기분을 다잡는 동안, 칼로스는 처음 출발했던 곳을 향해 노를 저었다.

“자, 다시 일하러 가야지.”

노를 갈무리한 그는 먼저 배에서 내려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을 잡자, 아네타의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겼다. 칼로스에 의해 가볍게 들어 올려진 그녀는 무사히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뒤돌아보자 물 위에 둥둥 뜬 채 흘러가는 꽃잎이 보인다. 잠시 지체하던 그녀는 곧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암행을 마친 것은 길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벤치에 앉은 아네타는 마실 걸 사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칼로스를 기다리며 메모했던 내용을 되짚었다.

부족한 게 없는지 살피다 문득 에레즈가 떠올랐다. 그에 대한 여론을 파악하고자 했지만 건진 정보가 전무했다.

들려오는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어차피 그런 정보는 폐하께서 쥐고 계실 테니 굳이 들쑤시고 다닐 필요는 없겠지.’

러셀을 통해 얻는 정보는 신뢰도나 정확도가 상당히 뛰어났다. 대가로 무얼 요구할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판국에 그런 걸 요구할 리가.

부담을 덜어 낸 아네타는 다른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짐마차가 다니기에는 도로의 면적이 좁은 감이 있다던가, 가격 담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물건의 가격대가 들쑥날쑥하다던가.

이런저런 문제점을 열거하던 중,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이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 더욱 신경 쓰이는 건 여성의 목소리였다는 사실이다.

‘치안이 좋은 줄로만 알았더니.’

혀를 차며 수첩을 찢은 아네타는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작은 돌멩이 하나를 그 위에 올려 둔 채, 서둘러 비명이 들려온 곳을 찾아 나섰다.

마음이 조급했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기척을 죽이고 움직이던 그녀가 발견한 것은 역시나 범죄의 현장이었다.

제법 부유해 보이는 행색을 한 두 남자는 여자의 앞을 포위하듯 가로막은 채 구석으로 몰아갔다.

상황이 더욱 명백해졌다.

위협적인 접근에 뒷걸음질 치던 여자의 등이 벽에 닿았다. 창백한 얼굴에 깃든 것은 선연한 절망이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겁에 질려 덜덜 떠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왜 이러긴. 잠깐 우리랑 재미 좀 보자는데 그게 그렇게 싫어?”

그 뒤를 잇는 건 천박한 조롱이었다. 영락없는 양아치 행태였다.

낄낄거리는 그들의 작태를 노려보던 아네타는 칼로스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뒤늦게 난입하면 여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을 수도 있었다.

아네타는 다급히 눈을 굴렸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입술을 깨문 그녀는 다시 한번 그들이 서 있는 위치를 살폈다.

일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들이 있는 골목 중간쯤에서 물웅덩이를 발견한 아네타는 주머니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그녀가 손에 쥔 것은 이사벨이 챙겨 준 호신용 구슬이었다.

‘이걸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이야.’

성인 남자 둘을 확실히 제압할 만한 무기를 찾았지만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한 번에 처리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물웅덩이까지 끌어내야 했다.

어느새 두 눈을 꼭 감은 여자의 입에선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같은 익숙한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익숙한 게 당연했다. 주변 사람들이 쉼 없이 가르쳐 온 말이었으니까.

타인이 강제로 몸을 만지는 게 싫은 것도, 이따위 짓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는 것도,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하나같이 언급할 가치도 없을 만큼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와 같은 말을 하도록 교육받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다.

그 말에 순순히 물러설 정도로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이들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벌이지도 않았을 텐데도.

대체 무엇을 위한 교육일까.

차오르는 분노를 느낀 아네타는 더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거기, 그쯤 하는 게 좋을 텐데.”

예고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던 그들은 곧 상대가 여자라는 걸 깨닫고 기꺼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아네타는 제 몸을 훑는 그들의 시선에 역겨움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있는 골목으로 천천히 들어서자, 시선이 마주친 여자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계집은 또 처음 보네. 왜, 몸 대주고 화대라도 받아 챙기려고?”

장소가 장소인지라 상대가 귀족일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 건지, 그들은 저급한 말로 그녀를 모욕했다.

“그냥 반반한 수준이 아닌데? 몸매도, 이야. 말이 필요 없고. 오늘 운이 참 좋아.”

“달갑지 않은 칭찬이네. 너희 같은 별 볼 일 없는 놈들이 시시덕거리며 평가나 하라고 이렇게 생긴 건 아닌데 말이지.”

아네타는 거친 말씨로 그들의 희롱에 맞섰다. 그러자 그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몸을 완전히 돌린 그들이 위협적으로 한 걸음 나섰지만, 아네타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손톱 끝으로 구슬의 틈새를 갈랐다.

소리 없이 열린 뚜껑 아래를 더듬자 툭 튀어나온 버튼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위에 손가락을 얹은 아네타는 그들을 물웅덩이가 있는 곳까지 끌어내기 위해 입 밖으로 진심을 내었다.

“이따위 짓을 벌이다니. 쓰레기만도 못한 수준하고는.”

“뭐야?”

“이 계집이 보자 보자 하니까!”

거침없는 도발에 발화점이 바닥을 기는 이들이 곧바로 반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드는 모습을 본 아네타는 버튼을 누를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의 발이 눈여겨봐 둔 곳 지척에 닿았다. 아네타는 곧바로 버튼을 눌러 구슬을 물웅덩이 안으로 던질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익숙한 파열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남자들의 몸이 추풍낙엽처럼 나동그라진 것이다.

황급히 움직임을 멈춘 아네타는 무언가 펄럭이는 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바람을 몰고 나타난 누군가가 새까만 깃털을 날리며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늦었어, 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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