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16화 (16/122)

16화. 우연 아닌 우연 (6)

“그렇게 해서 무사히 갤러리 지분 인수를 완수했습니다.”

마담 리페에게 말했던 대로 날이 밝자마자 베넛 남작가에 대리인을 보낸 아네타는 점심이 지나서야 결과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인수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를 확인한 뒤 그에게 돌려주었다.

“수고했어요. 오늘 안에 모든 절차를 끝낼 수 있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남은 일도 잘 처리해 주세요.”

“네. 그럼 저는 이만 갤러리로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대리인은 받아 든 문서를 마담 리페에게 전하기 위해 저택을 떠났다.

뒤이어 아데나워가의 저택을 찾은 사람은 전날 방문을 예고한 세르세였다.

이사벨에게서 그의 도착을 전해 들은 아네타는 응접실로 걸음을 옮기며 자연히 어제 일을 떠올렸다.

그녀의 반사적인 행동을 포함한 모든 전말이 밝혀지자, 칼로스는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연한 얼굴로 굳어 버린 그의 모습을 떠올리던 아네타는 곧 상념을 밀어내고 응접실 문을 열었다.

“왔어?”

소파에 앉아 내부를 훑던 세르세에게 담백한 인사를 건네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정해 준 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그는 아네타가 저택으로 돌아온 후 처음 맞이하는 손님이었다. 그 덕에 주방의 사용인들은 융숭한 대접을 다짐하며 티 푸드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것을 알기에, 아네타는 그들이 실력 발휘할 시간을 조금 더 벌어 주기로 했다.

“그림부터 보러 갈 거지?”

“아니라고 해도 내 의견은 반영되지 않을 것 같은데?”

“맞아.”

아네타는 선선히 인정했다. 어제 그녀에게 했던 행동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세르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차 대접도 안 해 주려는 건 아니지?”

“그건 조금 있다가. 사용인들이 널 위해 아주 바쁘게 움직이고 있거든.”

“그런 거라면 좋아. 어디로 가면 돼?”

“따라와. 안내해 줄게.”

아네타는 우아하게 몸을 일으키는 세르세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섰다.

거의 10년 만에 되밟는 복도를 걸으며, 세르세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을 더듬었다.

앞장서서 걷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어린 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건 필시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일 것이다.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한데 묶여 안내하고 안내받아야만 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자의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안내인이 듬직해서 마음에 드네.”

“그렇다고 반하진 말고.”

장난스럽게 건네는 말에 여상스레 대꾸한 아네타는 그림이 늘어진 복도 앞에 멈춰 섰다.

“여기야.”

덩달아 걸음을 멈춘 세르세는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광경이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아네타. 아무래도 우리,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네 저택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을 정도면 좋겠는데.”

세르세는 진심이 그득 묻어나는 말과 함께 무언가에 홀린 듯 그림 앞으로 다가섰다.

아네타는 대답 대신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뒤로 물러섰다.

세르세가 저러는 건 꽤나 익숙한 일이었다. 아마 에레즈가 환영회에서 아네타를 저격하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그의 목걸이를 보며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아네타는 팔짱을 끼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상기된 눈가를 보니 혼자 마음껏 감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복도를 따라 늘어진 그림에는 획과 획 사이를 노닐며 향유하던 화가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감상에 몰두하는 그의 눈초리는 날카롭기 이를 데 없었다. 어두운 녹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세르세의 감상이 끝난 건 그로부터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인내심을 갖고 자리를 지키던 아네타는 그를 다시 응접실로 이끌었다.

세르세가 몽롱하게 풀린 얼굴로 넋을 놓거나 말거나, 자리에 앉은 아네타는 사용인을 불러 차를 내오라고 일렀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오색찬란함을 뽐내는 티 푸드가 적당히 우러난 차와 함께 두 사람 앞에 놓일 때였다.

어디에 먼저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많은 가짓수를 보던 세르세는 불현듯 떠오른 일을 언급했다.

“아, 갤러리 지분 인수는 어떻게 됐어?”

“시셋값에 조금 더 얹어 주는 정도로 사들였어.”

찻잔을 든 아네타는 향을 음미하며 답했다.

“조금 의외였지. 부르는 게 값이라는 식으로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말은 그렇게 했어도 베넛 남작이 과도한 요구를 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베넛 남작은 돈을 챙긴 뒤 닥쳐올 뒷감당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허튼수작을 부릴 수 없었을 테고.

“상대가 너만 아니었다면 그랬을걸.”

공교롭게도 세르세의 의견 역시 그녀와 같았다.

“하여튼, 지금쯤 모든 절차가 끝났을 거야.”

이제 갤러리는 완전히 마담 리페의 소유가 되었다. 아네타는 그 사실이 퍽 기꺼웠다.

여전히 과한 선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예정에 없었다고 한들, 그 정도 지출은 아데나워가의 재정에 티끌만 한 타격도 주지 못하니까.

“신문사 일은?”

“허마이오니에 심부름꾼을 보내서 항의했어.”

“그 제임이라는 기자, 윗선에 완전히 찍혔겠네. 승진은 꿈도 못 꿀 테고.”

“바로 쫓겨났다던데. 문제를 일으킨 게 한두 번이 아니라 그쪽에서도 처우를 논의하던 중이었다나 봐. 마침 나라는 명분이 생겼으니 냉큼 내보낸 거겠지.”

덕분에 리타 기자의 사수도 바뀌었다. 잘된 일이라고 여긴 아네타는 적당히 식은 차로 마른 입 안을 축였다.

그 뒤로 두 사람의 대화는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로 이어졌다.

세르세가 돌아갈 채비를 마친 건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옷매무새를 고친 그는 마차에 오르기에 앞서 배웅을 나온 아네타를 돌아보았다.

“너만 괜찮다면, 앞으로 이런 시간을 자주 가질 수 있었으면 해.”

“왜? 그림 때문에?”

넌지시 꺼낸 말이 의외라는 듯 아네타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저녁 하늘에 흐무러진 노을이 그녀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뭐, 어느 정도는.”

“다른 이유가 또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글쎄.”

모호한 대답에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 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인 그는 그대로 마차에 올랐다.

“덕분에 오늘 즐거웠어.”

***

“듣기로는 오늘, 라폴리 자작이 아데나워 후작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돌아갔다던데.”

러셀을 도와 서류 처리에 열중하던 칼로스는 예고 없이 날아든 소식에 몸을 움찔 떨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른 질투가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러셀은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굳어 버린 아우의 모습이 안쓰러워 혀를 끌끌 찼다.

안타까운 건 아네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가 가진 게 많다는 이유로 아네타를 부러워하지만, 러셀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여유를 가장한 그녀의 내면은 사실 가뭄으로 갈라진 땅처럼 건조하고 황폐했다.

그것을 돈으로 메운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뛰어난 인재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막대한 부와 온갖 고통으로 점철된 노력밖에 없는 여자. 그렇기에 타인의 감정을 받아 줄 여유가 없는 여자.

비꼬는 게 아니라, 사실 그대로였다.

러셀은 생각에 잠긴 칼로스를 고요히 응시했다. 어쩌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리 의문을 던지자니 성마른 웃음이 나왔다.

칼로스는 위태롭지만 위태롭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종종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그때부터 이리될 줄 알았던 주제에 새삼스럽기 짝이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아우가 경쟁자보다 뒤처져서야 쓰나.”

세르세의 일방적인 태도 변화를 눈여겨 살피던 러셀은 오늘에서야 그를 경쟁자로 낙인찍었다.

“조만간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지.”

러셀이 응당 도와야 하는 일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칼로스는 기대 어린 눈으로 그를 보는 한편,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네타가 난처해할 만한 일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말도록 해. 잠시 숨 돌릴 시간을 주고, 거기에 널 끼워 넣는 것뿐이니.”

곧 폴터 자작의 처벌 건으로 인해 마주할 시간도 줄어들 테니 그 정도야 괜찮겠거니 싶었다.

***

“각하, 정말 이 옷을 입으시려는 건가요?”

민가에서나 볼 법한 옷을 바라보는 시녀들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제 주인에게 이런 걸 입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손대기 망설여졌다.

“못 입을 이유는 없지. 게다가 싫어도 어쩔 수 없어. 폐하께서 내린 명령이니까.”

아네타는 러셀에게 황궁으로 출근하는 대신 민가로 암행을 다녀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때 함께 받은 것이 시녀들을 주저하게 만든 이 옷이었다.

그녀는 장식이나 무늬 하나 없이 밋밋한 옷을 집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재질 하나는 퍽 괜찮았다.

“이 정도면 평민 중에서도 그럭저럭 잘 사는 수준으로 보이겠네.”

손끝으로 감촉을 느끼던 아네타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내기 시작했다. 뒤늦게 다가온 시녀들이 도우려는 걸 괜찮다는 말로 거절했다.

눈을 감고서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디자인이니 굳이 여럿이서 손을 보탤 필요는 없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폐하께선 왜 하필 각하께 암행을 명하신 걸까요?”

환복을 마친 후에도 시녀들의 걱정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러셀에게 원망의 화살이 겨누어지자, 잠자코 있던 이사벨이 나섰다.

“그건 각하께서 복지부 수장이시기 때문이니 섣부른 발언은 삼가거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

러셀은 말단보다는 상부에 위치한 이들이 더 많은 걸 보고 겪길 바랐다. 장관인 아네타가 나서게 한 이유도 그와 같았다.

유감은 없었다. 실제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건 힘없는 말단이 아닌 상부였으니까.

“폐하께서 안내역 겸 호위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사벨은 시녀들을 부드럽게 타일렀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아네타에게로 다가와 무언가를 손에 쥐여 주었다.

“하지만 각하, 혹시 모르니 이걸 가지고 가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아네타는 이사벨이 건네준 무언가를 내려다보았다. 주머니에 감싸인 그것은 아네타가 여행을 다닐 적에 들고 다녔던 호신용 구슬이었다.

크기에 비해 상당한 값을 치르고 구해 온 그것은 안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전류가 흐르게 되어 있었다.

아네타는 복잡한 눈으로 그걸 보다가, 하나 있는 주머니에 넣었다. 가져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거절하는 순간 그녀들의 걱정이 다시 시작될 터였다.

“각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문 밖에서 시종이 목청을 높이자, 아네타는 서둘러 나머지 채비를 마치고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눈에 덜 띄는 마차를 보낼 거라던 러셀의 언질대로 저택 앞에 서 있는 마차는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디서 이런 걸 구했는지 모르겠다. 생소한 기분으로 마차를 살피는데 갑자기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익숙한 이를 보며 아네타는 입을 열었다.

“칼로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그녀가 입은 옷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옷을 입은 그가 답했다.

“내가 오늘 당신 호위를 맡았으니까.”

어쩐지 호위로 붙는 이가 누구인지 말해 주지 않더라니. 미정인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내정되어 있던 모양이다.

“그 산더미 같던 서류는 어쩌고?”

“버논이 수고해 주고 있어.”

사촌 이름이 들려오자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권력을 등에 업은 냄새가 나는데.”

“새삼스럽게.”

“시치미 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당신한테 거짓말하기 싫으니까.”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말할 뿐이다. 칼로스는 그리 말하며 그녀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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