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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 재결합기-15화 (15/122)

15화. 우연 아닌 우연 (5)

낮은 목소리가 유혹적으로 귓가를 울리던 때였다. 아네타에 이어 소리 없이 집무실로 들어선 누군가가 두 사람의 곁에 섰다.

“칼로스 님?”

칼로스에 의해 눈이 가려진 아네타는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그에 칼로스는 아네타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아. 꽤나 불쾌한 일이 있었지.”

그녀를 다독이는 손길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녀가 오해할 만한 일을 벌인 에레즈를 향한 눈빛만은 살벌했다.

“지금 누구 하나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빛이십니다만.”

“내가 언제 그랬다고. ……난 그런 적 없어, 아네타.”

칼로스와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이의 목소리는 상당히 중성적이었다.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낮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아네타는 변명을 이어 나가는 그의 손을 가볍게 끌어내렸다.

“알았으니까, 손 좀 치워 줘. 불편해.”

방해물이 사라짐으로써 시야가 트이자, 갑자기 마주한 빛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두어 번 깜빡이는 것으로 회복된 시야에 낯선 이가 걸렸다.

남색의 짧은 단발과 적안, 그리고 발티모어가의 제복까지.

마주하는 건 처음이지만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아네타와 칼로스의 이혼을 기점으로 황제의 그림자에서 발티모어가의 기사단장으로 적을 옮긴 루이사 알펜 경이었다.

그녀의 짐작이 정답이었음은 칼로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증명해 주었다.

“루이사. 오자마자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네가 바우터 남작을 배웅해 줘야 할 것 같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배웅이라는 점잖은 표현에 감추어진 참뜻을 읽어 낸 루이사는 군말 없이 명령에 수긍했다. 에레즈를 보며 정중히 문을 가리킨 것은 그다음이었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

“가시죠.”

“…….”

“계속 이렇게 버티고 계시면 무력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입을 꾹 다문 채 고집스레 버티고 서 있는 그의 머리 위로 거듭 경고가 떨어졌다.

“어쩔 수 없군요.”

한숨을 쉰 루이사가 당장에라도 그를 들쳐 맬 태세를 갖추자, 에레즈는 그제야 짜증스러운 얼굴로 입을 떼었다.

“배웅 같은 거 필요 없고, 내 발로 나갈 거예요.”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따르기 위해, 루이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에레즈가 톡 쏘아붙인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 명령에 따르겠다는 태도였다.

아네타는 잠시간 제게 머문 분노 어린 눈빛에 헛웃음을 지었다.

제 딴에는 사나워 보이는 표정을 지은 것 같은데, 글쎄. 이도 얼마 나지 않은 하룻강아지가 눈앞에서 으르렁댄다고 해서 겁을 먹을 리 없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랬다.

에레즈는 화내는 얼굴도 그저 작은 심통을 부리는 것처럼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요정 같은 외모가 그리 보이게 했다.

“예쁘네.”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스쳐 지나간 에레즈의 뒤에 대고 말하자, 칼로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아네타의 감상이 에레즈의 몸을 향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애초에 숨긴 적도 없던 질투심을 드러냈다.

“내 몸이 더 예뻐, 아네타.”

엉뚱한 방향으로 드러난 질투는 그녀의 입가를 허물어뜨렸다.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 낸 아네타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글쎄.”

아네타는 칼로스의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었다. 언뜻 봐도 에레즈의 몸 선이 예쁜 건 사실이었기에 딱히 부정할 필요도 없다.

“잘 모르겠는데.”

어서 긍정하라는 눈빛에 애매한 반응으로 응수하며 손끝으로 그의 다부진 몸을 훑었다. 얇은 셔츠 아래로 가슴과 복부의 굴곡이 여실히 느껴졌다.

근육으로 옹골찬 상체를 쿡쿡 찌를 때마다 그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익숙한 몸을 감흥 없이 더듬는 아네타와 달리,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에게는 새삼스러운 반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쁘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아.”

차라리 조각처럼 아름답다는 표현이 걸맞았다. 여리여리한 에레즈와는 궤가 다른 느낌이라고 여기며, 아네타는 뻗은 손을 거두었다.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널찍한 가슴이 낮게 부풀었다 꺼졌다.

셔츠가 팽팽히 당겨졌다 제자리를 찾는 과정이 그녀의 눈에 적나라하게 들어왔다.

“언제는 나 같은 몸이 취향이라더니.”

“그건 지금도 그래.”

스스럼없는 대답에 칼로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외적 취향이 변했을까 싶어 걱정하던 그의 낯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그럼 됐어.”

전에 없던 어색함이 흘렀다. 그가 시선을 비낀 채 묘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때였다.

레녹스 앞까지 에레즈를 배웅하고 돌아온 루이사가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들어섰다. 열린 문을 지나온 그녀는 내부의 풍경을 살폈다.

“……잘 익은 토마토가 되셨군요.”

누굴 향한 감상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건조한 음성을 타고 나온 진심 어린 비유에 아네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참지 못한 웃음에 칼로스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그는 아네타가 웃고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 여기며 항의를 포기했다.

“당신, 나 없는 사이에 새로운 기사를 들인 모양이네.”

아네타는 입가에 머문 웃음을 거두지 않으며 물었다. 아는 체하기에는 그녀는 양지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 당신은 모르겠군. 이쪽은 루이사 알펜 경. 공석이었던 발티모어의 기사 단장 자리를 꿰찬 인재지.”

그의 입에서 나온 확언은 루이사가 여타의 어중이떠중이들과 다른 실력자임을 증명했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뛰어난 인재의 등장은 언제나 흥미로운 법이다. 아네타는 루이사의 검을 보다 검붉은 적안을 마주했다.

“단번에 기사 단장 자리에 오른 걸로 봐서는 폐하의 그림자였던 것 같은데…….”

아네타는 황제파의 기둥 중 하나로써 그림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누가 소속되어 있는지 모를 뿐이지, 그들의 실력이나 임무에 대해선 빠짐없이 전해 듣곤 했기에 능청스레 언급할 수 있었다.

“내 짐작이 맞나요?”

“네, 정확합니다.”

“실력을 확인할 필요도 없겠네요. 알펜 경, 우리 가문으로 오지 않을래요?”

러셀은 까다롭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의 눈에 들어 그림자에 소속되었으니 실력에 대해 떠들어 봤자 입만 아프다.

“발티모어가보다 높은 수준의 복지를 약속할게요.”

“안 돼, 아네타.”

아네타가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에, 칼로스의 눈매가 휘었다. 그녀의 장난에 어울려 줄 참이었다.

“당신, 내가 보는 앞에서 우리 가문 가신에게 스카웃 제의를 하는 거야?”

“가주로서 뛰어난 가신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욕구지. 그러니 잘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니까.”

물론 루이사가 정말로 아데나워로 넘어올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데리고 올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지만, 그녀는 양지로 나온 지금도 여전히 황제의 그림자였다.

러셀의 사람을 탐하는 건 아무리 그녀라도 사양하고 싶었다.

“이런, 내가 더 노력해야겠군.”

가벼운 분위기로 이어지는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루이사는 칼로스의 표정을 살폈다.

엄동설한 같던 이는 어디 가고 만연한 봄의 기운만이 너울댔다. 아네타에게 사랑을 담뿍 담은 눈길을 보내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보기 좋았다.

붉은 시선은 곧 잔잔히 일렁이는 불꽃처럼 아네타에게로 옮겨붙었다. 기민한 직감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한 달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그녀는 어딘가 변해 있다고.

칼로스와 웃음기 어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그 변화의 조각 중 하나였다. 떠나기 전의 그녀는 그에게 늘 의무적인 태도만을 보였으니까.

하지만 루이사는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지금의 관계가 더 위태롭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날카로이 흩어진 조각은 억지로 그러모은다고 해서 합쳐지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상처 입거나, 그게 아니면 두 사람 모두 행복을 찾거나.

운명의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루이사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끝을 보길 바라며, 아네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루이사 알펜입니다.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각하.”

“나를?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충분히 지켜보았을 텐데.

아네타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모르는 이가 없는 사실을 입 밖에 내려다 말았다.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칼로스 님께서 손수 꽃까지 가꾸게 만든 분을 가까이서 뵙고 싶었습니다.”

루이사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화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것은 오늘도 화사한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저 꽃을 당신이 직접 가꿨다고? 정말이야?”

아네타의 고개가 칼로스를 향해 돌아갔다.

“당신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꽃이잖아. 내 손으로 직접 가꿔서 매일 아침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었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사실 여부를 확인하자 긍정이 돌아왔다. 아네타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꽃이라는 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저 사람을 시켜 사 온 것이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직접 가꾼 꽃이었다니.’

조금이라도 시들해질 기미가 보이면 귀신같이 바뀌어 있던 것이 기억났다.

아네타는 꽃을 들고 출근하는 칼로스의 모습을 상상했다.

정성도 이런 정성이 없었다.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섬세함이었다.

“꽃 외에도 많습니다. 이곳에 있는 건 모두 칼로스 님께서 직접 골라 들인 것들이니까요.”

창가에 걸린 커튼부터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카펫, 그녀가 앉던 의자, 하다못해 소모품인 잉크나 깃펜까지.

끝없이 열거되는 물건의 이름을 듣고 있자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루이사의 말대로 집무실에 있는 모든 것은 그가 직접 채워 넣은 것들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각하께서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한다며 이리저리 발품을 파셨습니다.”

칼로스의 정성을 고하던 루이사는 또 한 번 그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내었다.

“마치 신혼집 꾸미는 팔불출 같았죠.”

“더 해 봐, 어서.”

이제껏 티 한 번 내지 않던 칼로스는 루이사를 만류하기는커녕 더 하라고 부추겼다. 팔불출 소리에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니, 거기까지만 해 줘요.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

칼로스를 위해 입을 열던 그녀를 제지한 사람은 아네타였다. 차오르는 부담감을 능숙하게 감춘 아네타는 어둑해진 창밖을 가리켰다.

“아.”

그제야 해가 저물었음을 자각한 칼로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네타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책상을 향해 걸었다. 서랍을 열어 핑곗거리로 삼았던 서류를 꺼내자, 칼로스의 얼굴에 아쉬움이 깃들었다.

“가려고?”

“그래야지. 본래 목적은 이걸 가지고 돌아가는 거였으니까.”

“조금만 더 있다 가. 열심히 입술을 지켜 냈으니까, 그에 대한 칭찬의 의미로.”

문 앞에 있는 그들을 향해 걷던 아네타는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기대를 담아 반짝이는 금안을 마주한 그녀는 환영식 때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할까 고민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세르세를 만나면 알게 될 일이다.

“아니. 바우터 남작이 아니더라도 당신 입술은 이미 다른 사람한테 빼앗긴 지 오래야.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빼앗은 쪽이지.”

“하늘에 맹세코 그런 일은 없었어.”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게 무슨……?”

“남작의 환영식 때, 인사불성이 된 당신이 세르세의 분신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거든.”

두 남자의 입술이 만남을 이룬 데에는 그녀의 책임이 컸지만, 원인 제공은 그가 했다.

“당신, 입술의 정조를 지키는 건 물 건너갔어.”

아네타의 확인 사살에, 칼로스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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