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14화 (14/122)

14화. 우연 아닌 우연 (4)

같은 그림 앞에 선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똬리를 튼 간극은 아네타로 하여금 세르세와의 차이를 극명하게 깨닫게 했다.

그와 그녀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세르세는 그림 그 자체를 사랑하지만, 아네타는 달랐다.

그녀가 많은 그림을 눈에 담는 건, 사실 어머니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아네타의 눈동자는 하염없이 떠도는 부랑자처럼 존재할 리 없는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저 화가의 섬세한 붓 터치는 마치 어머니의 것을 닮은 듯했다. 저 화가는 물감의 농도 조절이, 또 저 화가는 배경을 표현하는 기법이.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억지로 끼워 맞추듯 공통점을 찾는 행위가 반복되다 보니, 부분적인 것은 보아도 전체적인 조화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아네타는 여전히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환생 이후 혼란으로 가득했던 그녀를 붙잡아 준 그 여린 손을, 아네타는 영원히 잊지 못할 터였다.

이번 생의 삶을 인정하는 순간, 그와 함께 머릿속에 각인처럼 새겨진 존재는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그리움 그 자체였다.

아네타는 세르세가 다음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제 앞에 있던 그림에 초점을 맞추었다.

캔버스 위에 거친 질감으로 표현된 심해가 그녀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듯했다.

아네타는 자신을 집어삼킬 듯 짙고 짙게 말라붙은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내면과 닮아 있었다.

느껴지는 감상은 허구적이면서도 이중적이었다. 두려움과 함께 느껴지는 편안함이라니. 마치 포식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먹잇감이나 느낄 법한 감정이지 않은가.

“그 그림이 마음에 들어?”

다음 그림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세르세가 같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아네타를 발견하곤 물었다.

“글쎄.”

그녀의 대답은 모호했다.

다만 그것은 그녀의 심정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 말이었다.

“세르세.”

“왜?”

“과연 내가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네타는 저택 복도에 늘어진 그림들을 떠올렸다. 한 점 한 점 떠오를 때마다 가슴으로 삼켜 낸 무언의 감정이 그 무게를 더해 갔다.

“소유할 자격이, 있을까.”

지난 시간의 고통을 읊듯이 아네타가 물었다.

그까짓 그림 몇 점이 아니다. 모두 그린 이의 소망과 영혼이 담겨 있는 작품이었다. 아네타는 그런 귀중한 열정을 가치라곤 조금도 알아볼 수 없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죄스러웠다.

“널 보면 내가 이곳에 드나들어도 될까, 하는 회의감이 들어.”

그는 타고난 안목으로 그림의 본질을 꿰뚫고, 가치를 알아보곤 했다. 그림을 감상하는 표정, 눈빛, 태도. 무엇 하나 그녀와 닮은 것이 없었다.

“헛소리야, 그거. 너 같은 재력가를 못 잡아서 안달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건 알지?”

세르세는 주저 없이 부정하며 그녀가 보던 그림을 가리듯 섰다. 차갑고 거친 물결을 담은 눈동자를 보니, 그녀가 금방이라도 그 안에 뛰어들 것만 같았다.

검푸른 심해 속에서 마지막 숨을 토하는 즉시, 끝없이 밀려드는 감정이라는 물결에 익사할 것이다.

“…….”

아니, 어쩌면 그것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세르세는 그녀의 눈동자가 저를 담자, 손바닥 뒤집듯 생각을 바꾸었다.

위태로운 일렁임은 이미 그녀의 눈동자 안에 담겨 있었다. 특유의 감이 머리를 들었다.

이대로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사람마다 그림을 가까이하는 이유는 달라. 모두가 같을 수 없지. 나는 너도 알다시피 아름다운 걸 내 눈에 담는 게 좋아서, 누군가는 비자금 조성이나 이익을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는 단지 그림이 좋아서 접하게 되지.”

세르세는 조심스럽게 아네타의 어깨를 잡고 다음 그림 앞으로 이끌었다.

“너는, 네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라고 하자.”

그로 인해 그녀가 마주한 것은,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는 등대 그림이었다.

“네가 사들이는 그림이나 피후원자의 그림에서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는 대신, 그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화가에게 다음 그림을 그릴 기회를 주는 거야.”

어둠에 잠긴 밤, 길 잃은 자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 빛은 참으로 따스해 보였다. 그 위를 더듬는 즉시, 밤하늘을 가르는 빛의 온기가 손끝에 옮겨붙을 것만 같았다.

“그만한 보상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틀려?”

“……아니.”

그 고요하게 쏟아지는 빛 속에서, 아네타는 깨달았다. 그의 말대로 헛소리로 치부될 법한 멍청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네 말이 맞아.”

고민을 반복했던 세월이 무색하게 수긍은 빨랐다.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기회를 준다. 틀린 게 없는 말이다. 더불어 가벼이 여길 만한 무게를 가진 일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중대사가 될지 모르니까.

“고마워.”

“별말씀을.”

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그들이 갤러리를 나선 것은 아네타가 말없이 뒤따라 걷던 리페에게 등대 그림을 구매한 후였다.

“마담.”

맞물린 입술 새에 머물던 침묵이 멸했다. 아네타는 배웅을 위해 따라나선 리페를 돌아보았다.

“난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베넛 남작에게 사람을 보낼 거예요.”

아직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리페에 비해, 세르세는 여유로이 휘파람을 불었다.

길게 끌어낸 숨이 다하자, 그는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요, 마담 리페.”

“뭘 축하한다는…… 설마?”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어깨를 으쓱인 세르세가 동의를 구하듯 아네타를 보았다.

“내일부터 당신이 이곳의 유일한 주인이에요.”

“각하!”

리페가 놀라 외치자,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이 푸드덕 요란스러운 날갯짓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선물이니 받아 주세요.”

아네타는 리페의 얼굴이 희게 질린 것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주머니에 있던 알사탕 하나를 건네주듯 별거 아니라는 태도였지만, 세르세는 알았다. 부담 갖지 말라는 그녀 나름의 배려라는 걸.

“친구 같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죠. 내 성격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제대로 보여 줘야 하지 않겠어요?”

아네타는 이곳에 걸음하게 된 순간부터 모든 소유권을 그녀가 갖게 할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그동안 내색하지 않았던 건 적기를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이유와 함께 넘기려고 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시일이 앞당겨졌네요. 딱히 상관은 없지만.”

“하지만 이건 너무 과분한…….”

“거절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봐요. 이미 당신은 화가들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잖아요?”

총명한 그녀가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 모를 리 없기에, 아네타는 강요 대신 선택권을 넘겨주었다.

“다만 이거 하나는 명심해요. 한 번 걷어찬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되돌릴 수 없다. 경고와도 같은 말에 망설이던 리페의 얼굴에 결심이 서렸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각하.”

“현명한 선택이에요.”

리페는 결국 최선의 선택을 했다.

목적을 이룬 아네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리페를 들여보내자, 그 모습을 주의 깊게 살피던 세르세가 물었다.

“나는?”

“너 뭐.”

“내가 곤경에 처하면 오늘처럼 멋지게 나서 줄 수 있어?”

눈매를 나른히 접으며 하는 말에, 아네타는 웃었다.

“너는 딱히 도와주고 싶지 않은데. 별로 안 친하잖아, 우리.”

“그것도 그렇네.”

세르세는 반발 대신 동의를 표했다. 20년을 알고 지냈으면 뭐 하나. 서로에 대해 아는 거라곤 성격이나 엉망진창인 가족사 같은 것밖에 없는데.

새삼스럽지만 참 애매하기 짝이 없는 관계였다.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그 이도 저도 아닌 관계를 개선해 그녀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다는 의사가 생긴 것 정도.

“뭐, 더 분발해야겠네.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차나 한잔 할까?”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네타는 그리 여기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갑자기 떠오른 칼로스의 얼굴만 아니었다면.

함께 가고 싶다고 했던 그를 일이나 하라는 말로 떼어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 선뜻 승낙의 말을 돌려줄 수 없었다.

“아네타?”

아네타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걸 본 세르세가 이름을 불렀다. 아네타는 한숨을 쉬며 결정을 내렸다.

“미안. 황궁에 일이 좀 있어서. 차는 다음에 마시는 걸로 하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세르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내일 저택으로 찾아가도 될까? 네가 소유한 그림들을 보고 싶은데.”

“그래, 그럼. 오전에는 바쁠 예정이니까 점심 이후에 와.”

두 사람은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나란히 걸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돌아서자, 마부가 다가왔다.

“각하, 저택으로 모실까요?”

“아니. 다시 황궁으로 가 줘.”

반쯤 충동적으로 일을 벌인 아네타는 칼로스의 상태만 잠깐 확인하고 나오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그리 중요치 않은 서류가 집무실 서랍에 남아 있다는 걸 상기했다.

‘그걸 가지고 가야겠어.’

굳이 가지러 올 필요 없는 서류라는 걸 그는 모를 테니까.

다수의 휴일이라 그런지 한창 소란스러워야 할 레녹스의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일하기 딱 좋은 날이네.’

아네타는 고요를 울리며 계단을 올랐다. 내부가 조용하니 구두 굽과 바닥이 마찰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복도에 올라선 뒤로는 의식적으로 발소리를 죽였다. 어차피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무의미해질 배려였지만, 아예 시도조차 않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익숙해진 복도와 달리,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문패는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네타는 생경한 기분으로 그와 자신의 이름을 보다 두어 번의 노크와 함께 문을 열었다.

자연히 그가 있을 곳으로 향한 눈동자에 담긴 것은 반쯤 열어젖힌 셔츠 사이로 하얀 상체를 드러낸 에레즈와, 그런 그를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던 칼로스였다.

“아네타?”

아네타를 발견하는 순간, 차가운 얼음송곳 같던 눈초리가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렸다.

“내가 좋은 시간을 방해했나 봐?”

아네타는 그리 말하며 문턱에 기대어 섰다. 굳이 나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런 거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결백을 주장하며 시선을 마주해 오는 칼로스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뭐 두고 간 거라도 있어?”

“어. 그런데 아무래도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네.”

“그러지 마. 나가야 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칼로스는 삽시간에 싸늘하게 식은 시선을 ‘나가야 할 사람’으로 지칭된 이에게 두었다.

어서 나가지 않고 뭐 하냐는 눈총을 받으면서도, 에레즈는 미동 없이 서서 칼로스를 향해 원망 어린 시선을 던졌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아네타는 에레즈가 환생자 혹은 빙의자일 거라는 가설에 무게를 실었다.

자신이 주인공이었던 원작이 틀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애가 탄 것일지도 모른다. 칼로스가 엉뚱한 이와 입을 맞추고 키스는커녕 둘만의 시간조차 보내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쪽의 일방적인 육탄 공세라…….’

아네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는 에레즈를 찬찬히 훑었다. 그 담백하다 못해 건조한 시선에 지레 찔린 에레즈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의 시선에 반응한 사람은 에레즈뿐만이 아니었다. 별안간 칼로스가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아네타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의 눈을 가려 버렸다.

“칼로스?”

큼직한 손이 눈가를 덮자, 시야가 어둠으로 뒤덮였다. 문턱에 기대어 있던 몸은 허리에 휘감긴 팔에 의해 단단한 품에 파묻힌 지 오래다.

“보지 마.”

“뭐?”

“정 보고 싶으면 내가 보여 줄게. 그러니까 나 아닌 다른 남자 몸은 눈에 담지 마, 아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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